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30일 오후 판문점 남쪽 자유의 집에서 회동을 마친 뒤 함께 군사분계선으로 이동하고 있다. 판문점/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예측 불허 셀럽 외교’가 한국전쟁에서 서로 총부리를 겨눴던 북-미 양국 정상의 비무장지대(DMZ) 공동경비구역(JSA) 군사분계선 넘나들기, 북-미 및 남·북·미 정상의 ‘판문점 만남’으로 이어졌다. 모두 1953년 정전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한반도에서 두 세기에 걸친 냉전적 대립과 갈등의 핵심 상징 공간인 디엠제트가 ‘비핵화’를 포함한 한반도 평화 과정의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톱다운 외교’의 무대로 세계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이다. ‘셀럽’은 ‘셀러브리티’의 줄임말로, 대중의 뜨거운 관심을 촉발하는 화제 창출 능력을 지닌 유명인사를 뜻한다. ‘트위터 정치·외교’의 달인 트럼프 대통령이 대표적이다.
판문점 만남의 첫 밑돌은 “김정은 위원장이 이것을 본다면, 나는 디엠제트에서 그를 만나 손을 잡고 인사(say hello)를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트럼프 대통령의 29일 아침 트위터 글이다. 평양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만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28일 오후 비공식 협의를 한 직후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 트위터 글을 “오늘(29일) 아침 생각한 것”이라고 했지만, ‘디엠제트 만남’은 “오랜 생각”이라고도 했다. ‘디엠제트 만남’은 실무 협상 없이 이뤄진 즉흥 제안이지만, ‘셀럽 트럼프’의 오랜 구상이기도 하다는 얘기다. 그리고 그 ‘오랜 구상’의 촉발자는 문재인 대통령이다. 지난해 1차 북-미 정상회담을 준비할 때 한국 정부는 물밑 협의 과정에서 회담 장소로 판문점을 미국 쪽에 끈질기게 추천했고, 트럼프 대통령은 긍정적이었는데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 등 고위 측근들의 거센 반대로 무산됐다. 30일 오후 북-미 정상의 판문점 만남은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에 있어 아주 역사적인 위대한 순간”이라는 문 대통령의 평가는 이런 문맥 속에 있다.
판문점 만남은 지난 2월 하노이 2차 북-미 정상회담 실패 이후 크게 약화된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의 추동력을 다시 높이려는 톱다운 방식의 가속 페달 밟기 노력이다. 하노이 회담 실패에 따른 김정은 위원장의 국내 리더십 상처, 트럼프 대통령의 속내에 대한 김 위원장의 의구심을 해소하는 데 적잖이 기여할 전망이다. 실제 김 위원장은 “오늘 만남은 앞으로 우리가 하는 행동에 긍정적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밝혔다.
판문점 만남에서 김 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이 ‘공동 주연’으로 나서고, 문 대통령이 ‘조연’을 자처한 데에는 각자의 서로 다른 전략적 구상과 셈법이 깔려 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30일 오후 판문점 자유의 집에서 대화하기 앞서 악수하고 있다. 판문점/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먼저 트럼프 대통령. 서로 차원이 전혀 다른 두가지 ‘재선용 셈법’이 작용한 듯하다. 첫째, 트럼프 특유의 ‘나만 할 수 있다’는 자기 과시와 ‘제 논에 물 대기’ 식 논법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금껏 누구도 다루지 못한 북한과 김정은을 내 뜻대로 요리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안팎에 과시하려는 듯하다는 게 여러 전문가의 분석이다. 다른 한편 트럼프 대통령은 ‘한반도 평화를 위한 회동’의 무대로 선택한 디엠제트를 가리켜 “아무도 그 국경을 통과하지 못한다. 그런 걸 진정한 국경이라고 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이는 명백히 멕시코와의 국경지대에 ‘반이민 장벽’을 쌓으려는 자신의 구상을 염두에 둔 표현이다. 둘째,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의 하노이 ‘노 딜 선언’으로 훼손됐을 김 위원장과의 신뢰관계를 복원하고 톱다운 방식으로 교착 국면을 타개하려 한 듯하다.
김정은 위원장이 ‘악수와 인사만 하는 짧은 만남’을 제안한 트럼프 대통령의 노림수를 몰랐을 리는 없다. 그럼에도 김 위원장이 지체 없이 제안을 받아들인 건 예상 밖의 반응이 전혀 아니다. “조미 수뇌분들이 아무리 새로운 관계 수립을 위해 애쓴다고 하여도, 대조선 적대감이 골수에 찬 정책작성자들이 미국 정치를 좌지우지하는 한 조미 관계 개선도 조선반도 비핵화도 기대하기 어렵다”(26일 외무성 대변인 담화)며 ‘톱다운 방식’을 강조해온 북쪽한테 디엠제트 만남 제안은 ‘불감청고소원’(청하지 않았으나 바라던 바)이다.
문 대통령이 ‘조연’의 자리에 선 데에는 서로 다른 세가지 이유가 맞물려 있는 듯하다. 디엠제트 만남의 주메뉴가 남북관계가 아닌 비핵화를 포함한 북-미 관계 문제라는 점, 김 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의 ‘극장정치’ 욕망, ‘한반도 평화만 이룬다면 공은 다투지 않겠다’는 문 대통령의 지론이 그것이다. 문 대통령은 북-미 정상의 군사분계선 월경에 세계 언론의 관심이 쏠리는 장면을 멀찍이 떨어져 바라봤고, 북-미 정상과 함께 셋이서 짧게 대화를 나누고는 다시 뒤로 빠졌다. 문 대통령은 “오늘 대화의 중심은 미국과 북한”이라며 ‘조연’을 자처하면서도 “우리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라고 강조했다. 북-미 정상이 내외신 기자회견과 양자 회동을 한 장소가 한국 정부가 관할하는 ‘자유의 집’이라는 사실은 문 대통령의 적극적 조력을 방증한다.
관건은 이날의 판문점 만남이 역사적 형식에 버금가는 ‘내용’을 채울 수 있느냐다. 최소한의 가늠자는 두가지다. 3차 북-미 정상회담 연내 개최 원칙적 공감, 그에 필요한 고위급 북-미 실무협상 조기 재개가 그것이다. “김 위원장을 백악관에 기꺼이 초청할 것”이라는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은 나쁘지 않은 징조다. 트럼프 대통령이 김 위원장과 ‘긴 환담’ 뒤 “우리는 각자 대표를 지정해 포괄적 협상을 하겠다는 데 합의했다”며, 폼페이오 장관 주도로 2~3주 안에 스티븐 비건 국무부 대북특별대표를 대표로 한 실무협상팀을 꾸리겠다고 밝힌 건 구체적인 성과다. 비건 대표는 29일 밤 판문점에서 최선희 북한 외무성 제1부상과 북-미 정상의 판문점 만남을 사전 조율했다. 하노이 이후 첫 실무접촉이다.
이제훈 선임기자 nomad@hani.co.kr[관련 영상] 한겨레 라이브 | 7월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