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국무위원장과 김여정 조선노동당 제1부부장이 2018년 4월27일 오전 판문점 평화의집 2층 회담장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에 참석해 자신의 자리로 다가가고 있다. 판문점/한국공동사진기자단
“김여정 당중앙위원회 제1부부장은 뻔한 술수가 엿보이는 이 불순한 제의를 철저히 불허한다는 입장을 알렸다.”
<노동신문> 17일치 2면에 실린 “15일 남조선 당국이 특사 파견을 간청하는 서푼짜리 광대극을 연출했다”는 <조선중앙통신> 기사의 한 구절이다. <노동신문>은 “남측은 문재인 ‘대통령’이 우리 (김정은) 국무위원회 위원장 동지께 특사를 보내고자 하며 특사는 정의용 국가안보실장과 서훈 국가정보원장으로 한다고 하면서 방문 시기는 가장 빠른 일자로 하며 우리측이 희망하는 일자를 존중할 것이라고 간청해왔다”고 전했다.
<노동신문>이 밝힌 특사 거절 주체는 김여정 제1부부장이다. 북한의 “신성한 최고존엄”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아니다. 김 제1부부장이 사실상 전권을 행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전례없는 일로, 각별히 주목할 대목이다.
앞서 김 제1부부장은 13일 밤 담화에서 “(김정은) 위원장 동지와 당과 국가로부터 부여받은 나의 권한을 행사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그 ‘위임받은 권한’에 최고지도자의 고유 권한인 특사 교환 여부 결정권이 포함된다는 건 차원이 다른 얘기다. 김 제1부부장이 ‘2인자’이자 ‘후계자’에 오른 게 아니냐는 분석이 쏟아지는 배경이다.
사실 최근 대남 강경 기조의 포문을 연 김 제1부부장의 4일 담화 이후 북한 당국과 <노동신문>의 행보는 내용과 형식 면에서 전례를 찾기 어렵다. ‘김여정 담화’를 ‘김정은 담화’급으로 대하는 ‘증거’는 너무 많다.
우선 통일전선부(통전부)는 5일 대변인 담화에서 김 제1부부장이 “대남사업을 총괄한다”고 밝혔다. ‘조국통일’을 국시로 한 북한에서 대남사업의 최고 책임자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이며, 실무책임자는 노동당의 대남사업 전문부서인 통전부의 장금철 부장이다.
둘째, 김 제1부부장의 ‘지시’를 <노동신문>에 여러차례 공개했다. “김여정 제1부부장은 5일 대남사업부문에 지시를 내렸다”(5일 통전부 담화), “김여정 동지는 8일 북남 사이의 모든 통신연락선을 완전 차단해버릴 데 대한 지시를 내렸다”(9일 <조선중앙통신> 보도)는 게 대표적이다. 수령의 ‘유일영도체계’를 신성시하는 북쪽에서 <노동신문>에 ‘지시’ 사실이 실릴 수 있는 주체는 원칙적으로 유일무이한 최고지도자인 김정은 위원장뿐이다.
셋째, ‘김여정 4일 담화’ 이후 16일까지 열사흘째 <노동신문>에 하루도 빠짐없이 항의군중집회 등 “각계 반향”과 관련 부문의 후속조처가 비중있게 보도되고 있다. 청년동맹·직업총동맹·여성동맹 등 노동당 외곽기구 주도의 항의군중집회에선 예외없이 “조선노동당 중앙위 제1부부장 동지 담화 낭독”이 이뤄진다. 평양시당위원장·국가계획위원장 등 고위인사의 ‘기고문’도 <노동신문>에 실렸다.
“담화 낭독”과 “각계 반향” 등은 최고지도자의 ‘특별 담화·지시’를 떠받치는 북쪽 특유의 인민 동원 방식이다. 공식 권력구조상 ‘서열 2위’로 불리는 최룡해 국무위원회 제1부위원장한테도 해당되지 않는 일이다.
더구나 김 제1부부장의 ‘권한’에는 조선인민군에 대한 ‘지시권’도 들어 있는 듯하다. 그는 13일 담화에서 “다음번 대적행동의 행사권은 우리 군대 총참모부에 넘겨주려고 한다”고 밝혔다. 그러자 인민군 총참모부가 16일과 17일 이틀 연속으로 ‘후속 조처’를 발표했다. ‘김여정’을 둘러싼 이런 특이 동향은 북한 권력 지형과 2018년 이후 한반도 정세 흐름이라는 서로 다른 두 측면으로 나눠 짚어볼 필요가 있다.
정세현 민주평통 수석부의장은 지난 10일 “사실관계는 확인하지 못했다”는 전제를 달아 “최근에 김여정을 당중앙으로 부르라는 지시가 내려가고 있다고 한다”고 말했다. 이어 “김정은 위원장은 내부 통치와 경제문제 해결에 주력하고 대남·대외 문제는 사실상 ‘넘버2’인 김여정한테 넘긴 거 같다”고 풀이했다. 정 부의장은 15일엔 “대북전단 문제를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따라 김여정이 2인자 자리를 굳힐 수도, 무너질 수도 있는 상황이라 (남쪽에) 굉장히 극렬하게 나오는 것”이라며 “남북관계의 겨울이 길어질 것 같다”고 내다봤다.
문정인 대통령 통일외교안보특보는 최근 “김여정이 2018년 이후 남북·북미 정상회담에 깊이 관여했는데 그 결과적 실패에 대한 책임을 지고 전면에 나선 것으로 본다”고 짚었다. 김 제1부부장의 “자아비판” 성격이 짙은 절체절명의 상황 타개 행보라는 풀이다. 문 특보가 북쪽의 최근 대남 강경 기조가 “실존적 위험을 느낀 정면돌파” 성격이 짙다며 ‘군사행동’의 위험성까지 경고하는 맥락이다.
그렇다면 김정은 위원장의 ‘긴 침묵’은 어떻게 봐야 할까. 한편에선 김 위원장의 ‘건강이상’ ‘권력 내부 이상 동향’ 따위를 새삼 제기하지만, 정통한 소식통은 “김 위원장의 건강엔 별문제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남북관계의 파란만장을 오래 겪어온 원로들은 “언젠가 정세 전환을 염두에 둔 마지막 안전판 차원의 의도된 침묵·부재”로 풀이했다. 청와대 핵심관계자도 “김정은 위원장이 전면에 나서지 않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이제훈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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