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0일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에서 열린 노태우 전 대통령의 국가장 영결식 뒤 운구 행렬이 서울추모공원으로 향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조형근 ㅣ 사회학자
1987년 12월17일, 제13대 대통령선거일 다음날, 노태우가 당선되자 고향의 어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서 도망치라며 흐느끼셨다. 진심이셔서 당황했다. 고작 대학 2학년생이던 나 따위가 뭐라고? 어머니를 안심시키느라 고생했다. 아직 공포의 시대였다. 그해에만 박종철, 이한열, 이석규 등 28명이 고문, 최루탄 직격, 분신, 투신, 의문사, 민주화운동 중의 사고로 죽었다.
몇년이 흐른 1990년 8월의 어느 날, 철창 너머의 아들을 면회 온 어머니가 울다가 문득 말했다. “우리 차 샀다.” ‘국민차’에 불과했지만 자가용 승용차가 생겼다는 것이다. 아들은 수갑을 차고 부모는 차를 샀다. 그것이 노태우 시대였다. 군부독재와 자본주의의 곡선이 그랜드크로스를 하고 있었다. 낡은 모순과 새로운 모순이 뒤얽혔다.
직선제 개헌을 비롯한 민주화 조치들을 결행하겠다는 노태우의 6·29선언을 보면서 왠지 “앞으로 훨씬 어려워질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캄캄하고 추워도 함께 보고 갈 북극성이 있던 시대는 그렇게 끝났다. 북극성이 없는 시대, 아니 각자의 북극성들로 갈라지고 다투는 시대가 시작됐다. 우리는 아직도 그 시대에 살고 있다.
군사반란과 내란에 주요 책임자로 종사한 노태우 전 대통령이 죽었다 . 이승을 살다 떠난 뭇 생명 중의 한 단독자를 향해 명복을 빌어줄 수 있다 . 하지만 장례는 다르다 . 그것은 망자를 빌미로 산 자들이 치르는 결속의 의례다 . 그리고 우리 정부는 공화국을 파괴한 자를 공화국의 이름으로 장사 지냈다 . 이로써 그의 죽음과 장례는 심대한 정치적 사건이 되었다 . 논쟁해야 할 이유다 .
죽음을 계기로 그에 대한 평들이 가득하다. 대개 이런 공과 저런 과가 있으니 견줘보자는 식이다. 나는 공과론을 펼칠 생각이 없다. 공화국 파괴라는 원죄와 견줄 만한 공 따위는 없다. 그의 시대를 생각하는 이유는 공과를 따지기 위함이 아니다. 그가 통치자로서 연루되었던 사건들을 돌아보며 지금 우리가 선 자리를 묻고자 함이다.
6공화국 출범 첫해인 1988년 10월27일 서울 구로공단의 신애전자 노동자들이 노조탄압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이다 강제해산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뉴욕 타임스>의 비아냥처럼 노태우의 당선은 “어차피 대통령이 되었을 사람을 힘들게 선거를 통해 뽑”은 일이었다. 양김의 분열은 치명적이었다. 그래도 항쟁을 거친 세상이 예전과 같을 수는 없었다. 우선 정치세력 교체의 절차로서 선거의 의미가 심대해졌다. 어떤 정치세력도 여론에서 자유로울 수 없게 됐다. 여론조사가 본격화됐고, 언론의 힘이 갈수록 커졌다. 군부독재를 이은 보수주의 정당과 민주화운동을 계승한 자유주의 정당 사이에 권력투쟁 규칙에 대한 합의도 얼추 이루어졌다. 정치의 언어는 늘 거칠고 과격했지만, ‘투쟁 끝의 타협’도 제도화됐다. 형식적, 절차적 민주주의가 진전되기 시작한 것이다.
노태우의 임기가 시작된 1988년은 3저호황의 정점이었다. 재임 5년간 경제는 해마다 8.5%씩 고속성장했다. 1988년에 도입된 최저임금은 연평균 17%씩 증가해서 역대 최고 인상률이었다. 재임 마지막 해인 1992년의 갤럽조사에서 76.3%가 중산층이라고 응답한 것도 역대 최고 수치였다. 1989년에는 전국민 의료보험이 실시됐고, 해외여행이 자유화됐다. 1980년대 말부터는 아파트 가격 폭등으로 어엿한 자산계층이 형성됐다. 1980년대 중반에 우리는 ‘제3세계인’이었다. 1990년대가 되자 제3세계 감수성은 촌스러워졌다. 민주화의 진전, 노동자와 서민의 투쟁, 경제성장이 맞물린 결과였다.
노태우 정부는 여소야대의 소수 정부였다. 제1야당인 김대중의 평화민주당을 국정의 파트너로 삼았다. 제2야당인 통일민주당의 김영삼은 공약대로 중간평가를 받으라며 정권을 압박했다. 김대중은 혼란을 이유로 반대했고, 결국 중간평가는 무산됐다. 집권세력은 온건 노선을 걷던 김대중에게 합당을 제안했지만 그가 받아들일 수 있는 제안이 아니었다. 결국 1990년 1월, 민주정의당과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이 3당 합당을 결행했고, 보수대연합이 구축됐다. 이로써 1987년 이후의 유동적 정치 지형이 굳어졌다. 지금도 여파가 지속되고 있는 지역주의 기반의 보수 우위 구도, ‘기울어진 운동장’의 출현이다.
집권세력의 애초 구상은 평민당까지 포함한 4당 합당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초거대 보수정당과 미미한 혁신정당의 구도를 꾀하려 했다. 왜 그랬을까? 약간의 형식적 민주주의만으로도 억눌렸던 사람들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학생운동과 노동운동, 민중운동이 타올랐다. 학생운동은 운동권의 경계를 넘어 한 세대를 규정짓는 문화적 토양이 됐다. 6월항쟁의 넥타이 부대가 멈춘 곳에서는 노동자대투쟁이 시작됐다. 1989년에는 전교조와 전국빈민연합이, 1990년에는 전노협이 탄생했다. 부문별 시민운동도 부상했다. 바야흐로 ‘대중운동의 시대’, 몫 없는 자들이 제 몫을 요구하고 나서고 있었다.
1990년 5월16일 노태우 퇴진 등 ‘5월 투쟁’ 선포식이 열린 광주 조선대에 경찰이 진입해 학생을 때리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1990년 상반기 이래의 공안정국은 흔히 노태우 정권의 ‘재야’에 대한 공격이라고 기억되곤 한다. 실은 그 이상이었다. 광범위한 기층 민중운동을 타격 대상으로 겨냥했다. 변두리 주택가에서 검문을 하고 시위대에 겨누라며 총기까지 지급했던 이유다. 수많은 노동조합과 민중운동단체가 파괴됐다. 구사대와 철거깡패의 살인적 폭력이 노골화됐다.
1989년 8월5일, 서울 신월동의 택시기사 최성조(33)가 구사대의 쇠파이프에 맞아 숨졌다. 경찰은 범인의 자진출두를 기다린다며 모르쇠였다. 신혼의 부인을 남기고 죽은 날은 그의 생일이었다. 같은 날 서울 시흥동의 운수회사에서 직장폐쇄 공고를 붙이던 전무가 다치자 신속 출동한 경찰이 노조원 47명을 연행하고 2명을 구속했다. 10월29일, 인천 지역 공장의 노조원 이재호(24)가 귀가 중 둔기에 사망했다. 군 출신에 민정당 부위원장이던 사장에게 맞서던 중이었다. 경찰은 혈흔 묻은 피해자의 점퍼를 세탁하는 등 상식 밖 대처로 일관하다 사건을 종결했다. 1990년 5월16일, 경기 성남시 은행동의 날품팔이 노동자 이원기(42)가 숨졌다. 부인과 4남매의 보금자리인 무허가 판잣집이 철거당하게 되자 나무에 목을 맸다. 얼마 전 막내아들의 그네를 달아준 나무였다. 12월6일, 부산의 신발공장 노동자 권미경(22)이 살인적인 노동조건과 폭언에 항의하며 회사 옥상에서 투신해 숨졌다. 왼팔에 유서를 새겨놓았다. “인간답게 살고 싶었다. 더 이상 우리를 억압하지 마라. 내 이름은 공순이가 아니라 미경이다.” 추리고 또 추린 사례들이다.
노태우의 시대를 거치며 억대 아파트에 살면서 마이카를 타고 해외여행을 가는 중산층이 본격적으로 형성됐다. 이들이 ‘선진국’으로 가는 동안 어떤 이들은 ‘제3세계’에 남았다. 구조화된 양극화의 시작이다. 정권이 몇번 바뀌고 오갔지만 이 격차사회의 틀은 바뀌지 않았다. 오늘날 이들은 800만명을 넘긴 비정규직 노동자, 220만명쯤의 특수고용직, 수많은 영세자영업자와 무급 가내종사자의 얼굴로 우리 사이에 있다. 두 거대 정당의 과점 구조도 여전하다. 노태우의 죽음 앞에 우리가 성찰해야 할 것이 있다면 이런 것이다. 그의 시대에 시작된 형식적 민주화는 이렇듯 심대한 불평등 체제로 귀결됐다. 그가 죽었다. 이 체제도 죽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