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내용 기억 안나, 대응 큰 흐름에 맡길것
“여기(워싱턴) 올 때도 내 뜻대로 온 게 아니다. 앞으로도 큰 흐름에 맡기겠다.”
옛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 도청사건의 피해자이자 핵심 주역이 된 홍석현 주미 대사는 21일(현지시각) “지금은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한다”며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홍 대사는 이날 오전엔 기자들의 접촉을 피하다가, 점심 무렵과 오후 늦게 기자들과 만나 현재 심정을 토로했다. 그의 두 눈 주위는 약간 충혈됐고,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이날 워싱턴 시내 주미대사관에서 점심식사를 하러 나가면서 기자들과 만나 도청테이프에 대해 질문을 받자, “오래된 일이라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내용이 기억나지 않는데도 방송금지 가처분신청을 한 데 대해선, “이상한 테이프가 있다는데 그것을 방송하겠다니까…. 그 테이프 내용이 어떻든 사적 자리의 대화가 공개되는 걸 즐겁게 받아들일 사람이 어디 있겠나”라고 대답했다.
그는 ‘도청된 자리가 어딘지 기억하나’라는 질문에 “모르겠다. 어디서 녹음했다고 하나”라고 되묻고는, ‘신라호텔’이란 얘기를 듣고는 “내가 자주 가던 곳이긴 하다”고 말했다. 또 “그 무렵 이학수씨와는 가끔 보는 사이였다”고 덧붙였다.
그는 오후 늦게 다시 기자들과 만나선, 앞으로의 대응방안에 대해 “여기 올 때도 뜻대로 된 게 아니다. 앞으로도 큰 흐름에 맡기겠다”고 말했다. “내 인생에 어느 게 중요한지 모르겠다”는 말도 했다.
‘왜 지금 이 시점에 (홍 대사 대화를 담은) 도청테이프가 문제가 된다고 보나’라는 질문엔 “생각하는 바가 있지만 맞지 않을 수도 있어 말하지 않겠다. 다른 사람들이 불편해할 수도 있고…”라고 대답해, 뭔가 짚히는 데가 있음을 내비쳤다. 그는 안기부 도청사건 보도가 터지기 전인 지난 12일에도 “김대중 정권 초기에 안기부에서 녹음테이프 수백개가 흘러나와 돌아다닌다는 얘기를 들었다”며 “그중에 나와 관계된 것만 요즘 (소문이) 나도는 건 이상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워싱턴/박찬수 특파원 pc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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