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표(67) 새정치민주연합 후보는 스스로 “중도균형의 정치인(책 <국민 먼저> 중)”이라고 말한다. 달리 말해 누구의 편도 아니라는 말이다. 진보 진영에서는 그를 보수라고 말한다. 보수 앞에서 그는 진보 인사다. 그는 이런 복잡함을 마다하지 않는다. 지금도 변함없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은 전략적 선택의 문제”라고 말하고, “재벌은 발전적 개혁의 대상(책 <줄탁> 중)”이라고 말한다. 정치 입문이 노무현 대통령 덕분이라는 사실을 감추지 않는다. 질문마다 교과서 같은 답을 내놓지만 가슴을 치지는 않는다. 그래서 그는 진보 진영에서 보자면, 안정감과 뭔가 아쉬운 듯한 그 사이 어딘가에 있다.
그는 황해도에서 태어났다. 한국전쟁 1·4후퇴 때 아버지는 장남인 김진표만 데리고 내려와 수원에 터잡았다. “가진 것 없는 실향민의 아들”(책 <응답하라 2014: 실천이 개혁이다> 중)이었다. “공부할 시간이 없었다. 상수도가 없어 물지게 아르바이트로 돈을 벌어야 했다”고 할 만큼 어려운 가정에서 자랐다. “예습·복습이 비결”이라는 다소 헛헛한 이유로 경복고 수석을 차지할 만큼 머리가 좋았다. 소년 시절을 풀어놓으면, 근래 보기 드문 개천에서 난 ‘용’의 이야기다. 고3 시절, 한일회담 반대시위에 참여했다가 경찰의 곤봉에 맞았다. 상처는 화농성 근육염으로 덧났고, 40일 동안 학교에 못 갔다. 그 탓에 대입에 낙방하는 순간이 불우한 성장기의 1막 마지막이다.
2막은 전형적 엘리트의 삶이다. 집안의 기대에 부응해 서울대 법대에 들어갔다. 스물일곱에 행정고시에 합격했다. 5공·6공 시절 재무부 공무원으로 그는 늘 고시 동기 중 맨 앞에 있었다. 30대에 이미 전두환 정권의 부름으로 청와대 비선팀에서 금융실명제를 검토했다. 40대에는 실무팀장으로 김영삼 정부의 금융실명제 도입을 이끌었다. 이후 재경원 금융정책실 은행보험심의관, 재경부 세제실장에 이어 2001년 재경부 차관에 이르렀다. 김대중 대통령 당시 청와대 정책기획수석으로 2002년 월드컵의 숨은 공로자가 됐고, 이어 출범한 참여정부에서는 초대 경제부총리로 발탁됐다. 타고난 관복이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그를 가리켜 “대한민국 최고의 공무원”이라고 했다. 장·차관급 이상의 공직을 다섯차례, 부총리를 두차례(경제, 교육) 맡은 공무원은 그가 유일하다. 화제가 되는 정책에는 그가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김영삼 정부의 치적으로 평가받는 금융실명제뿐 아니다. 참여정부의 재벌개혁, 부동산 정책 등은 대부분 그의 손을 거쳤다. 참여정부가 보수로부터 좌편향이라는 의심을 받을 때, 반대로 진보로부터 우회전이라는 지탄을 받을 때 그의 이름이 오르내렸다.
2003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을 계기로 그는 17대 국회의원 출마에 나선다. 그리고 수원에서 내리 3선의원이 됐다. 하지만 화려했던 관료 시절과 달리 정치인 김진표에게 위기는 계속됐다. 2010년 경기도지사 경선이 첫 위기였다. 유시민 국민참여당 후보에게 0.96%포인트 차이로 패배하면서 정계 은퇴 얘기가 공공연하게 나왔다. “내가 현실인식을 잘못한 것”이라며 결과를 깨끗하게 승복했지만, 당시만 해도 그의 재기를 예상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절치부심한 끝에 2011년 민주당 원내대표로 다시 중앙무대에 복귀했다. 정책정당·대안정당의 포부도 잠깐, 한-미 자유무역협정 비준동의안 처리와 관련해 한나라당에서는 “민주당은 민주노동당의 2중대”라는 비난을, 당내를 포함한 야권에서는 “한나라당 2중대”라는 비난을 들어야 했다. 2012년 총선을 앞두고는 원내사령탑임에도 정체성 문제로 공천이 미뤄지는 수모를 겪었다. 그러나 그는 “김진표마저 용납하지 못하는 협소한 스펙트럼으로 광범위한 중도를 끌어올 수 있겠느냐”고 맞서 기어이 공천을 따냈다. 그 결과, 수도권 최다 득표율(61%)로 돌아왔다.
2014년 경기도지사 재도전. 그의 한 참모는 “김 후보에게 필요한 것은 간결한 언사와 새로운 이미지다. 그 문제만 해결되면 이길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지난 20일 국회 기자간담회에서의 그는 여전히 설명이 길었다. 쟁점으로 급부상한 보육교사 공무원화 문제를 묻자, 수치와 이론을 동원하며 설득하려 애쓴다. 때론 농담도 오가는 간담회는 딱딱한 공청회장처럼 변했다. 그 참모는 “그래도 짧아지고 있다”고 귀띔한다. 이미지 변신을 위한 노력도 보였다. 손을 내지르듯 제스처가 커졌다. 수십년 유지하던 2대8 가르마를 풀고 앞머리를 내렸다. 여전한 건 중도 지향이다. “이념적 중도, 지역적 중부, 계층적 중산층, 중(中)을 잡겠다”고 했다. 민심은 그에게 어떻게 화답할까.
하어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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