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사이언스>, https://youtu.be/UoDlxQ7YDzc
꼼꼼함 또는 깐깐함이 빚어낸 착시일까? 찾아 해결하려는 문제들이 실제로는 줄어들었는데도, 사람들은 문제의 개념을 확장해 이전의 잣대에선 문제가 되지 않았을 법한 것을 문제로 판단하기도 한다. 이런 일이 보통 사람들의 지각과 판단에서 종종 일어나는 심리적 경향성이라는 심리실험 결과가 나왔다.
미국 하버드대학교 등 소속 연구진은 최근
과학저널 <사이언스>에 낸 논문에서 찾아내어 해결하려는 문제들이 나타나는 빈도수에 따라서 사람들이 무엇이 문제인지 아닌지를 지각하고 판단하는 데에도 변화가 나타나는 것으로 심리실험에서 관찰됐다고 보고했다.
연구진은 이런 현상에 ‘빈도에 의한 개념 변화(prevalence-induced concept change)”라는 이름을 붙였다. 진열대에 잘 익은 과일이 적으면, 조금 덜 익은 과일도 익은 과일로 선택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과일 쇼핑의 문제라면 사소할 법하지만, 사회 문제에서는 이런 경향이 더 큰 탈을 일으킬 수도 있다. 다음은 논문의 한 대목이다.
“익은 과일로 여기게 하는 것은 우리 눈에 보이는 다른 과일들에 따라 달라져야 테지만 중범죄나 경기 득점, 종양으로 여기게 하는 것은 그래서는 안 된다. 이런 것들[중범죄, 득점, 종양]이 없는데도 경찰, 심판, 의사가 그 개념을 확장해 그것들을 찾으려 해서는 안 된다. 현대 사회에서 사람들은 일관성을 유지하는 개념을 사용해야 하며 그 개념을 확장해서는 안 된다.”
연구진은 어떤 개념의 사례들이 줄어들 때 그 개념을 확장해 이전에는 배제되던 사례들도 그 개념에 포함하는 이런 심리 경향을 세 가지 실험을 통해 보여주고자 했다.
먼저 지각을 보여주는 색깔 실험이다. 실험참가자들에게 확실히 파란색인 점과 확실히 자주색인 점, 그리고 약간씩 다른 중간색들의 점들을 보여주면서 파란색 점만을 찾으라는 과제를 주었다. 이 실험에서 한 실험그룹한테는 처음부터 끝까지 파란색 점을 일정한 빈도로 노출하며 400개 점을 보여주었으나, 다른 실험그룹한테는 전반에는 일정한 비율로 파란색 점을 노출하여 200개 점을 보여준 다음에 후반에는 파란색 점들의 노출을 줄이면서 다시 200개 점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파란색 점의 노출 빈도를 줄인 실험에서 실험참여자들은 실험 후반에서 파란색 점들이 점점 줄어들자 전반에서 파란색으로 판단하지 않았던 중간색 점들도 파란색으로 지각하는 경향을 보여주었다. 연구진은 실험참가자들에게 ‘이제부터는 파란색 점들이 줄어든다’고 미리 상황을 알려주었을 때에도, ‘과제를 잘 수행하면 상금을 준다’며 보상을 약속했을 때에도, 이런 경향성은 다섯 가지 설힘에서 크게 변하지 않았다고 논문에서 보고했다.
다르게 설계한 실험에서도 비슷한 결과가 나왔다고 한다. 연구진은 이번에는 ‘위협적인 인상의 얼굴’과 ‘비위협적인 인상의 얼굴’로 미리 분류한 얼굴 사진들을 실험참가자들에게 보여주며 ‘위협적인 얼굴’을 찾으라는 과제를 수행하게 했다. 색깔 실험과 마찬가지로 전반에는 일정 비율로 위협적인 얼굴을 노출하며 200개 얼굴 사진을 보여주고 후반에는 위협적인 얼굴의 노출을 줄였다. 연구진은 이 실험에서도 실험참가자들이 위협적인 얼굴 빈도가 줄어든 후반에는 덜 위협적이거나 중립적 얼굴도 위협적인 얼굴로 판단하는 경향성을 비슷하게 보여주었다고 밝혔다.
이번에는 윤리성에 대한 판단 실험을 했다. 연구자들은 흔히 연구에 나서기 전에 연구 방법이나 주제에 비윤리적인 문제는 없는지를 심사 받기 위해 자신이 속한 기관의 ‘기관윤리위원회(IRB)]의 심사를 거치는데, 이때에 제출되는 연구신청서들을 살펴 윤리성 여부를 판단하게 했다. 기관윤리위원회의 심사위원 역할을 맡은 실험참가자들은 미리 윤리성 정도가 분류된 연구신청서들을 살펴 ‘윤리적’ 또는 ‘비윤리적’ 판단을 내려야 한다. 연구진은 이 실험에서도 전반에는 윤리적 등급을 받은 연구신청서를 일정한 비율로 노출했으나 후반에는 그런 신청서의 노출을 점점 줄였다. 그랬더니 실험참가자들은 윤리적 등급을 받은 연구신청서의 빈도가 줄어들자 전반에서는 비윤리적이라고 판단했을 법한 연구신청서를 윤리적이라고 판단하는 비슷한 경향성을 보여주었다.
세 가지 실험의 결과를 연구진은 논문 초록에서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일련의 실험을 통해, 우리는 사람들이 종종 어떤 자극의 빈도가 감소할 때 그것의 개념을 확장하는 방식으로 반응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파란 점들이 드물어지자 실험참가자들은 자주색 점들을 파란색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위협적인 인상의 얼굴이 드물어지자, 참가자들은 중립적인 인상의 얼굴을 위협적인 것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비윤리적인 연구신청서가 드물어지자, 참가자들은 문제가 없는 연구신청서를 비윤리적인 것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연구진에 따르면, 이런 경향성의 관찰이 아주 새로운 것은 아니다. 애초 설정한 문제나 경계가 조금씩 변형되고 확장하는 현상은 여러 다른 분야에서 다른 이름으로 설명되어 왔다는 것이다.
‘크리프(creep)’는 이런 경향성을 설명하는 대표적인 용어가 되어 왔다. 애초에는 소재의 변형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하중을 받는 고체 소재가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변형하는 현상을 뜻하는 용어인데, 최근에는 애초에 설정한 미션도 시간이 흐르면 점차 확장하는 의미의 ‘미션 크리프’나 애초에 설정한 소프트웨어의 기능이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확장한다는 의미에서 ‘피쳐 크리프’라는 말이 생겨나 쓰이고 있으며, 심리학에서도 어떤 개념의 애초 경계가 점점 확장하는 현상을 가리켜 ‘크리프’라는 말을 쓰기도 한다는 것이다. 일종의 ‘개념 크리프(concept creep)’인 것이다.
이번 실험은 ‘개념 크리프’ 현상이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보여주는데, 특히 단순히 문제의 노출 빈도만으로도 그런 개념의 확장이 일어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끌고 있다.
이런 심리적 경향성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는 상황이나 문제의 성격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보이지 않던 작은 문제까지 세심하게 지각하고 판단해 문제 해결에 도움을 줄 수도 있지만, 애초에 찾으려는 문제가 실제로는 개선돼 새로운 단계의 문제를 설정해야 할 때에도 여전히 과거 문제 단계에 머무를 수도 있다.
연구진도 이런 심리 경향성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를 판단하는 것이 이번 실험의 목적이 아니며, 다만 사람들이 자신도 모르게 ‘빈도에 의한 개념 변화’의 경향에 종종 빠질 수 있음을 보여줄 뿐이라고 말했다.
연구진은 논문 말미에서 “현대 사회가 빈곤과 문맹부터 폭력과 아동사망률까지 폭넓은 사회문제의 해결에서 굉장한 진보를 이뤄왔는데도 대다수 사람들은 세상이 점점 나빠지고 있다고 믿는다”면서 “어떤 개념의 사례들이 줄어들면 그 개념이 점점 확장한다는 사실이 이런 비관주의의 원천 중 하나일 수 있다”고 말했다.
적어도 어떤 비관주의가 그저 이런 심리적 경향에 사로잡힌 것인지, 아니면 문제가 실제로 심각한지를 한 번쯤 더 돌아보게 하는 데에 이 연구결과는 유용할 듯하다.
논문 초록 (우리말 번역)
어떤 사회적 문제들은 왜 그토록 풀기 어려워 보일까? 일련의 실험을 통해, 우리는 사람들이 종종 어떤 자극의 빈도가 감소할 때 그것의 개념을 확장하는 방식으로 반응함을 보여준다. 파란 점들이 드물어지자 실험참가자들은 자주색 점들을 파란색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위협적인 인상의 얼굴이 드물어지자, 참가자들은 중립적인 인상의 얼굴을 위협적인 것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비윤리적인 연구신청서가 드물어지자, 참가자들은 무해한 연구신청서를 비윤리적인 것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이런 ‘빈도수에 유도된 개념 변화(prevalence-induced concept change)’는 참여자들에게 사전에 주의를 주었을 때에도, 그리고 지시를 했을 때에도, 또 보상을 준다고 했을 때에도 발생했다. 사회 문제들이 난치성으로 보이는 이유의 일부는 문제의 빈도 감소가 사람들로 하여금 그 문제들을 더 많이 보게 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Science(2018),
http://www.danielgilbert.com/LEVARI2018COMPLETE.pdf]
오철우 선임기자
cheolwo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