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에서 가장 많은 동물은 무엇일까. 60억이 넘는 인간은 정답이 아니다. 수로 치면 개미가 사람보다 더 많다. 하지만 지구에서 가장 많은 생물은 바로 박테리아(세균)다. 우리 몸에 붙어사는 박테리아만도 적어도 200종에 이른다.
입속과 창자 속에 각각 약 80종, 그리고 피부에 약 40종이 허락도 없이 얹혀산다. 마릿수로 치면 피부 1㎠당 약 천만 마리가 산다. 먹을 것이 풍부한 창자에는 ㎠당 무려 100억 마리에 이른다. 천문학적인 숫자다. 하지만 워낙 작다 보니 피부에 사는 박테리아를 모두 합쳐도 완두콩 하나 부피밖에 안 된다. 게다가 이들은 대부분 우리 몸에 이로운 구실을 한다. 흔한 오해와 달리 동·식물의 몸속에 살면서 병을 일으키는 세균은 소수이다. 박테리아의 92~94%는 흙과 바다 속에 산다. 눈에 보이지 않는 이들이 산소 공급, 물 정화, 토양에 영양분 제공, 식품과 비타민 제조 등 막중한 일을 한다.
500만의 1조배 개 박테리아, 지구의 주인
미국 조지아 대 연구팀은 얼마 전 처음으로 지구에 사는 모든 박테리아의 수를 추정했다. 그 결과는 무려 500만의 1조 배의 1조 배, 곧 5 뒤에 0이 30개 붙는 숫자였다. 무게로 치면 지구상 전체 생물 무게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박테리아는 수명이 짧고 수가 많다. 따라서 웬만한 환경변화에는 쉽게 적응한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 몸의 기능과 형태가 바뀌는 것이 진화다.
진화의 속도는 번식주기가 짧은 생물일수록 또 숫자가 많을수록 빠르다. 돌연변이가 재빨리 일어나고 쉽게 확산되기 때문이다. 박테리아는 그런 점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전문가들은 실험실에서는 100억 년을 기다려야 한 번 일어날까 말까 한 드문 돌연변이도 지구 전체의 박테리아에게는 매초 발생한다고 말한다. 그만큼 수가 많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구 어느 곳에건 박테리아가 없는 곳은 없고 또 아무리 험한 환경이라도 이겨낸다. 항생제에 내성을 갖는 세균이 쉽게 등장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박테리아는 어디서나 산다. 고온을 좋아해서 해저 화산 분출구의 110도의 열탕에서 번창하다가 상온에 갖다 놓으면 ‘동면’ 상태에 빠지는 세균도 발견됐다. 강한 산성이나 알칼리성 온천, 포화상태의 소금물 속에서도 너끈히 살아가는 놈도 있다. 과학자들은 이들이 수십억 년 전 지구에서 생명이 탄생한 초창기에 진화한 원시생물일 것으로 믿고 있다.
기괴한 미생물도 있다. 미국 오레곤주립 대 해양학자들은 해저에서 1.6㎞ 파 들어간 현무암 암반 속에서 ‘바위를 먹고사는’ 미생물의 디엔에이(DNA)를 발견했다. 또 미국 사반나 리버에서는 사용한 핵연료 저장 수조에서 강한 방사능과 아무런 영양분이 없는데도 금속을 분해하는 박테리아가 사는 사실이 밝혀졌다. 사실 박테리아는 영하 30도의 남극 얼음 속에서부터 끓는 물까지, 진공에 가까운 고공에서부터 수백 기압의 바다 밑까지 어디든 분포한다. 게다가 차고 건조한 상태라면 포자 상태로 수백만 년 동안 휴면할 수도 있다.
생물의 우주이동설 주장…‘화성생물’의 후예일 수도
보스토크호 얼음 표면. 1983년 지구상에서 가장 추운 기온인 영하 89.2도가 여기서 기록됐다. 컬럼비아 대 제공
이런 생존력이라면, 한때 따뜻하고 물이 있었던 화성이나 두터운 얼음장 밑에 물이 있는 목성의 위성 유로파에 박테리아가 살았거나 현재 살지 말라는 법도 없다.
오스트레일리아의 물리학자이자 작가인 폴 데이비스는 이를 바탕으로 생물의 우주이동설을 주장한다. 36억 년 전 지구에 등장한 미생물은 비 오듯 쏟아지는 운석의 재앙을 피해 땅속으로 숨어들었다. 운석 충돌 때 바위와 함께 우주로 퉁겨 나간 미생물이 당시 생물이 살 만했던 화성에 이주해 땅속에 살고 있을지 모른다. 이들 중 일부 또는 화성에서 독자적으로 출현한 미생물이 운석 충돌과 함께 지구로 돌아왔을 수도 있다. 그럴 경우 우리는 ‘화성생물’의 후손인 셈이다.
흥미롭게도 눈에도 보이지 않는 미생물로부터 우리는 우주에 있을지 모르는 또 다른 생물의 모습을 본다. 그 가능성을 확인하려는 국제적인 노력이 남극에서 벌어지고 있다. 수천m 깊이의 얼음으로 뒤덮인 남극 대륙은 아직까지 신비의 세계이다. 그런 수수께끼 가운데 하나가 바로 얼음 밑 호수들이다.
두꺼운 얼음 밑에 100개 이상의 호수가 갇혀 있음이 밝혀졌다. 얼음을 투과하는 레이더 기술 덕분이다. 이 호수들은 대개 길이가 몇 킬로미터나 된다. 그 가운데 가장 큰 것이 보스토크 호수다. 세계에서 가장 신비로운 호수라고 할 수 있다. 충청도 크기의 이 거대한 호수는 수백만 년 동안 외부와 완전히 격리돼 있을 가능성이 크다. 호수 물속에는 원시시대의 생물들이 고스란히 남아있지 않을까. 이 ‘잃어버린 세계’를 탐사하려는 과학자들의 노력이 한창이다. 과학자들은 이곳에서 옛 생물을 찾아낼 뿐 아니라 외계생명체 탐사를 위한 현장훈련을 하기도 한다.
남극 대륙 한가운데 있는 러시아 보스토크 기지 근처에서 과학자들은 1974년부터 심상치 않은 현상을 눈치챘다. 유독 이 지역의 얼음이 편평했다. 얼음 밑에 무언가 거대한 것이 있었다. 지난 93년 인공위성의 고도측량과 96년 러시아와 영국 과학자들은 얼음 밑에 호수가 있음을 확인했다. 호수는 얼음 밑 3700m 지점에 충청 남·북도를 합친 것과 비슷한 1만 4천㎢에 걸쳐 펼쳐져 있다.
수백만 년 전에 묻힌 지구역사의 ‘타임캡슐’
보스토크호의 모습과 연구 프로젝트 구상도_컬럼비아 대 제공
호수는 바위로 된 산맥으로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으며 깊은 곳은 수심은 약 800m, 얕은 곳은 200m이다. 여기엔 민물로 추정되는 물이 소양 댐의 620배에 해당하는 용량으로 담겨있다. 호수바닥엔 400m 두께의 퇴적물도 쌓여있다. 약 1천500만~2000만 년 전 남극대륙이 두꺼운 얼음으로 덮이기 전 지각변동에 의해 거대한 호수가 생겼고, 그 뒤 눈에 덮였지만 지열로 녹아 얼음 속 호수가 생겼을 것으로 과학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이들이 주목하는 것은 오랜 세월 지상과 단절된 채 진화해 온 특이한 생물이 호수 속에 살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아마도 그 생물은 원시적인 미생물일 가능성이 크다. 수백만 년 전에 묻은 지구역사의 ‘타임캡슐’을 열어보려는 시도에 과학자들은 흥분하고 있다.
그러나 비밀을 파헤치는 일은 간단치 않다. 무엇보다 수천m의 얼음을 파 들어 가는 것도 만만치 않다. 그러나 굴착이 이 탐사의 핵심은 아니다. 지난 98년 러시아와 미국 연구진은 특수 장비를 동원해 3623m까지 굴착했으나 작업을 중단했다. 그 이유는 지표의 생물로부터 호수를 ‘오염’시키지 않을 방법이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얼음시추에서는 다양한 미생물과 생물의 흔적을 발견했다. 호수 근처의 얼음은 42만 년 전의 것으로 밝혀졌다. 미국 컬럼비아 대 라몽 도허티 지구관측소의 최근 연구결과를 보면, 호수 바닥의 물은 호수가 처음 생긴 태초부터 그대로인 상태이지만 호수 윗부분은 움직이는 빙상에 쓸려 서서히 얼음층을 형성하며 이동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호수는 살아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호수 한쪽 끝의 물이 다른 쪽 끝으로 갈 때까지 걸리는 시간은 아주 느려 5만~10만 년으로 추정됐다.
호수 탐사에는 미국, 프랑스, 독일, 영국이 참여하고 있다. 가장 적극적 관심을 보이는 나라는 미국이다. 그 이유는 우주탐사와 관련된다. 보스토크 호수와 비슷한 곳이 있다. 목성에서 4번째로 큰 위성 유로파이다. 갈릴레이가 1610년 발견한 유로파는 달보다 약간 작지만 여러 가지 점에서 과학자들의 눈길을 붙잡아왔다. 1천m 이상의 산이 없을 정도로 표면이 고르고 달보다 5배나 밝다. 또 비중이 비교적 작다. 이는 얼음 지각 밑에 액체 바다가 존재한다는 강력한 암시이다.
미 항공우주국 15년 예정으로 2003년부터 탐사 나서
보스토크호 위성사진. 얼음위에 평평한 모습이 두드러진다.컬럼비아 대 제공
무엇보다 유로파가 우주과학자들에게 귀중한 까닭은 외계 생명체가 있을 가능성 때문이다. 화성보다 그 가능성을 더 크게 치는 행성이다. 행성 탐사선 보이저가 보내온 유로파는 두꺼운 얼음으로 덮여 있다. 그런데 조석의 영향으로 얼음은 군데군데 깨져 있음이 발견됐다. 얼음 밑에 바다도 있을 것으로 믿어진다. 물이 있고 해저화산이나 운석·혜성이 날라 오는 유기물질이 있다면 생명체가 탄생할 조건은 충분하다.
미 항공우주국 제트추진연구소는 2003년부터 15년 동안 유로파 탐사에 나섰다. 탐사로봇을 이용해 얼음층을 깨고, 물과 퇴적층을 조사해 외계 생물체를 확인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임무이다. 유로파와 여건이 비슷한 남극의 보스토크 호수는 절호의 예행연습 대상이다.
아직 본격 탐사는 시작되지 않았지만 보스토크 호수에 적용할 핵심기술은 이미 마련돼 있다. 먼저 길이 3m, 직경 15㎝의 케이블이 달린 연필 모양의 탐사기구인 ‘크리오봇’이 동원된다. 전기로 뜨겁게 달군 몸체가 얼음을 녹이는 한편 지표 생물의 침입을 막는다. 호수에 도달하면 크리오봇은 2개로 분리된다. 얼음과 물 경계에 남는 부분에서는 생명체를 찾는다. 나머지 부분은 호수 밑바닥까지 내려가 퇴적물을 조사한 뒤 초소형 잠수구 로봇인 ‘하이드로봇’을 분리시킨다. 직경 12㎝의 이 로봇은 물방울처럼 서서히 물 위로 떠오르며 관측결과를 송신한다.
최근 남극 얼음 밑 호수 연구는 새로운 전기를 만났다. 우주탐사보다는 기후변화가 현안으로 닥치면서 남극 호수가 새로운 주목을 받게 된 것이다. 남극의 빙상이 얼마나 빨리 녹을 것인가는 지구온난화 대책에서 매우 중요한 요인이다. 그런데 최근 북극에서 드러나고 있듯이 물은 빙상의 붕괴를 재촉한다. 남극의 얼음 밑 호수가 남극 얼음층에 윤활유 구실을 해 빙상을 빨리 무너지게 할지를 밝히는데 과학자들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조홍섭 환경전문기자 ecothink@hani.co.kr
※이 글은 졸저 <생명과 환경의 수수께끼>(고즈윈/2005/8500원)의 ‘지구의 주인은 박테리아’를 일부 수정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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