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부상·선질꾼의 길
불영계곡 옆으로 국도 36호선이 뚫리기 전까지 내륙인 경북 봉화와 바닷가인 경북 울진을 잇는 가장 가까운 길은 십이령 길이었다. 이 길은 조선시대부터 방물고리에 댕기, 비녀, 얼레빗, 분통 등을 담아 멜빵에 맨 봇짐장수와 지게에 생선, 소금, 토기, 목기 등을 진 등짐장수를 일컫는 보부상의 길이기도 했다.
물류 통로인 십이령 길은 거의 일직선으로 뚫려 있다. 에둘러 갈 여유가 없으니 수많은 고개를 넘는다. 큰 고개만 해도 바릿재, 평밭, 샛재, 느삼밭재, 너불한재, 저진치, 한나무재, 넓재, 고치비재, 멧재, 배나들재, 노루재 차례로 열두 개를 넘어야 한다. 작은 고개는 30~40개에 이른다.
조선시대 보부상은 이후 선질꾼으로 바뀌었는데, 이들이 거래한 물목은 울진·흥부의 미역, 각종 어물, 소금과 내륙지방에서 생산된 쌀과 보리, 대추, 담배, 옷감 등이었다.
이들은 울진에서 봉화까지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130리 길을 3박4일 동안 주파했다. 안동의 간고등어가 유명해질 수 있었던 건 이들이 길바닥에 뿌린 땀방울 덕분이었다.
울진문화원이 최근 발간한 <열두 고개 언제 가노>를 보면, 선질꾼은 가지가 없는 지게를 지고 가다 선 채로 쉬었는데 자신이 먹을 밥을 지을 도기로 만든 솥과 여벌 짚신을 꼭 달고 다녔다. 또 소 장수들은 고개를 넘으면서 소의 발굽이 상하는 것을 막기 위해 밤새 수십 켤레의 ‘소 짚신’을 만들어 신겼다고 한다.
행상이 머무는 곳마다 주막이 있었는데, 숙박비는 따로 받지 않고 밥과 술값을 받았으며 잠을 자는 봉놋방은 장작을 넉넉히 때 따로 이부자리가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행상 중에는 집 없이 처자를 이끌고 장삿길에 오르는 이도 적지 않았다. 최윤석 숲해설가는 “길 위에서 들꽃을 꺾어 혼인하고 주막에서 아이 낳은 가난한 상인의 삶의 애환이 깃든 곳이 바로 이 숲길”이라고 말했다.
울진/조홍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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