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위에서 위장한 채 미끄러지듯 이동하는 대형 먹구렁이의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
[물바람 숲] 국립수목원 구렁이 관찰기
헛걸음만 수십번 했다. 지난 2년 동안 구렁이가 있다는 제보를 받고 여기저기 다녔지만 구렁이를 만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지난 5월 초 휴대전화로 찍은 사진과 함께 구체적인 제보를 접했다. 경기도 포천의 국립수목원에 구렁이가 출몰한다는 것이었다.
광릉의 국립수목원에는 540년을 지켜온 오랜 숲과 습지가 있어 다양한 파충류가 서식하는 곳이다. 수목원 숲 해설사의 안내로 구렁이가 나타난다는 곳에 가 보았지만 구렁이가 우릴 기다리고 있을 턱이 없다. 허탈했지만 발길을 돌릴 수밖에. 하지만 무언가 이상한 느낌에 고개를 돌려 나무 위를 보았더니 검은 구렁이가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머리와 얼굴이 달걀 모양으로 길고 주둥이 끝 부분은 잘린 듯 뭉뚝했다. 목은 가늘지만 몸통은 길고 굵었다. 전체적으로 검은빛이었지만 몸통부터 꼬리까지 배 부위에 밝은 가로줄 무늬가 있었고, 얼굴 아래는 유난히 노란 황색이 도드라졌다. 2m까지 자라는 대형 파충류의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이었다.
제보 장소인 계곡에서 해설사가 나무 위를 가리켰다. 먹구렁이가 나뭇가지에 기다랗게 누워 일광욕을 즐기고 있었다. 하루에 구렁이를 2마리나 보다니! 지난 한 달 동안의 고생이 한순간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구렁이는 타고난 위장술을 지니고 있었다. 나뭇가지의 굴곡에 따라 몸의 형태를 바꿨고, 바람이 불어 나뭇잎과 가지와 함께 흔들리는 것을 빼곤 전혀 움직임이 없었다. 물론 나뭇잎이 햇볕을 가리면 양지 쪽으로 슬그머니 이동했는데, 그 속도가 너무 느려 거의 눈치채지 못할 정도였다. 한 번은 5시간 동안 50㎝를 이동하는 것을 관찰했다. 시속 10㎝!
배가 불룩한 것을 보니 먹이를 사냥한 뒤였던 것 같다. 햇살로 체온을 올려 느긋하게 소화를 시키려던 모양이다. 나뭇가지에서 굴러떨어질 걱정은 없어 보였다. 배를 넓게 벌려 가지를 감싸 안듯 나무에 업혀 있다.
나뭇가지 굴곡 따라 형태 바꾸는
완벽한 위장술로 느긋하게 일광욕
구렁이는 눈에 띄지 않았을 뿐
가까이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어 그림자 피해 ‘시속 10㎝’ 초저속 이동
구렁이가 잠입한 나무구멍에서
튀어나온 원앙 암컷은 ‘넋 나간듯’ 구렁이는 활엽수를 좋아하는 것 같았다. 참나무의 회색 어린 가지는 햇빛을 받으면 유난히 반짝이는 구렁이의 광택을 위장하기에 제격이었다. 이런 위장술 덕분에 수목원을 찾은 탐방객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구렁이가 내려다보는 나무 밑을 무심코 지나가고 있었다. 며칠째 허탕을 치던 지난달 28일 마침내 나뭇가지를 휘감고 밑을 내려다보고 있는 황구렁이와 마주쳤다. 2m는 됨 직한 커다란 녀석이었는데, 색이 밝아서인지 둥그런 눈이 더 크고 선하게 보였다. 꼬리로 나뭇가지를 꼭 움켜쥐고 목을 이리저리 뻗으며 나무에 난 구멍으로 향했다. 날씨가 너무 더워 체온 조절을 위해 구멍 속에 들어가는 것 같았다. 행동은 매우 조심스러웠다. 구멍을 여러 차례 살핀 뒤 목에 힘을 주고 몸을 수축시켰다. 꼬리로 감은 나뭇가지가 구멍 쪽으로 딸려오면서 무게 중심을 잡아주었다. 구멍으로 들어갈 자세를 확보하자 꼬리로 움켜쥔 나뭇가지를 풀었다. 구렁이가 구멍 속으로 완전히 들어갔다. 이제 구렁이가 다시 나올 때까지 또 얼마나 기다려야 하나. 그 순간 구멍에서 원앙 암컷이 튀어나왔다. 원앙은 넋이 나간 듯 둥지 들머리에 10여분 동안 앉아 있더니 체념한 듯 다른 나무로 날아갔다. 구렁이가 노린 것은 원앙이 아니었다. 지금은 원앙의 포란 시기이다. 구렁이는 구멍 속에서 원앙 암컷을 밀어내고 알들을 꾸역꾸역 삼키고 있을 것이다. 이 나무 구멍은 구렁이가 수시로 찾아와 알을 꺼내가는 양계장 비슷한 곳일지도 모른다. 알을 빼앗긴 원앙은 다른 둥지를 찾아 떠나겠지만 워낙 나무 구멍 쟁탈전이 심해 조만간 다른 원앙이 알을 낳으러 이곳에 올 것이다. 구렁이는 우리 눈에 띄지 않아서 그렇지 사람들이 드나드는 개방된 곳에서 해바라기를 즐기고 있었다. 동네 어귀의 오래된 정자나무 밑이나 장독대, 양지바른 흙 담장, 돌담의 터줏대감이 구렁이 아니던가. 구렁이는 사람 곁을 떠난 적이 없었다. 우리를 믿는 동물이다. 그들을 밀어내고 탐욕스럽게 먹어치운 것은 우리였다. 글·사진 윤순영 한겨레 웹진 <물바람숲> 필진, 한국야생조류보호협회 이사장
황구렁이(사진). 색깔이 전혀 다르지만 대형 먹구렁이와 동일한 종의 구렁이이다.
구렁이가 조심스럽게 원앙 둥지에 접근해 포란중이던 알을 습격하자 화들짝 놀란 어미 원앙이 둥지 밖에 나와 어쩔 줄 모르는 모습까지 담은 연속 사진이다.
완벽한 위장술로 느긋하게 일광욕
구렁이는 눈에 띄지 않았을 뿐
가까이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어 그림자 피해 ‘시속 10㎝’ 초저속 이동
구렁이가 잠입한 나무구멍에서
튀어나온 원앙 암컷은 ‘넋 나간듯’ 구렁이는 활엽수를 좋아하는 것 같았다. 참나무의 회색 어린 가지는 햇빛을 받으면 유난히 반짝이는 구렁이의 광택을 위장하기에 제격이었다. 이런 위장술 덕분에 수목원을 찾은 탐방객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구렁이가 내려다보는 나무 밑을 무심코 지나가고 있었다. 며칠째 허탕을 치던 지난달 28일 마침내 나뭇가지를 휘감고 밑을 내려다보고 있는 황구렁이와 마주쳤다. 2m는 됨 직한 커다란 녀석이었는데, 색이 밝아서인지 둥그런 눈이 더 크고 선하게 보였다. 꼬리로 나뭇가지를 꼭 움켜쥐고 목을 이리저리 뻗으며 나무에 난 구멍으로 향했다. 날씨가 너무 더워 체온 조절을 위해 구멍 속에 들어가는 것 같았다. 행동은 매우 조심스러웠다. 구멍을 여러 차례 살핀 뒤 목에 힘을 주고 몸을 수축시켰다. 꼬리로 감은 나뭇가지가 구멍 쪽으로 딸려오면서 무게 중심을 잡아주었다. 구멍으로 들어갈 자세를 확보하자 꼬리로 움켜쥔 나뭇가지를 풀었다. 구렁이가 구멍 속으로 완전히 들어갔다. 이제 구렁이가 다시 나올 때까지 또 얼마나 기다려야 하나. 그 순간 구멍에서 원앙 암컷이 튀어나왔다. 원앙은 넋이 나간 듯 둥지 들머리에 10여분 동안 앉아 있더니 체념한 듯 다른 나무로 날아갔다. 구렁이가 노린 것은 원앙이 아니었다. 지금은 원앙의 포란 시기이다. 구렁이는 구멍 속에서 원앙 암컷을 밀어내고 알들을 꾸역꾸역 삼키고 있을 것이다. 이 나무 구멍은 구렁이가 수시로 찾아와 알을 꺼내가는 양계장 비슷한 곳일지도 모른다. 알을 빼앗긴 원앙은 다른 둥지를 찾아 떠나겠지만 워낙 나무 구멍 쟁탈전이 심해 조만간 다른 원앙이 알을 낳으러 이곳에 올 것이다. 구렁이는 우리 눈에 띄지 않아서 그렇지 사람들이 드나드는 개방된 곳에서 해바라기를 즐기고 있었다. 동네 어귀의 오래된 정자나무 밑이나 장독대, 양지바른 흙 담장, 돌담의 터줏대감이 구렁이 아니던가. 구렁이는 사람 곁을 떠난 적이 없었다. 우리를 믿는 동물이다. 그들을 밀어내고 탐욕스럽게 먹어치운 것은 우리였다. 글·사진 윤순영 한겨레 웹진 <물바람숲> 필진, 한국야생조류보호협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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