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리왕산의 ‘3신목‘ 가운데 하나였던 들메나무 거목(왼쪽)은 스키 활강경기장 건설로 밑둥만 남긴 채 잘려나갔다.
2012년 8월 환경단체 우이령 사람들 회원들이 동계올림픽 스키 슬로프 예정지인 하봉 일대의 식물을 조사했다. 임도 아래 계곡에서 휴식을 하다가 일행은 우리나라 어디에서도 보기 힘든 들메나무 거목을 발견하고 탄성을 질렀다(■ 관련기사=가리왕산 세 아름 들메나무는 울고 있었다 ).
하늘을 향해 쭉 뻗은 나무는 어른 세 명이 안아야 할 만큼 굵고 단단해 보였다. 천연기념물로 지정할 만하다는 소리가 나왔고 곧 ‘가리왕산의 3신 나무’ 가운데 하나인 ‘할미 나무’로 이름 붙였다(■ 관련기사=공사 앞둔 가리왕산, 600살 주목의 ‘마지막 겨울’).
회원들은 9일 벌목이 거의 마무리 단계로 접어든 가리왕산을 다시 찾았다. 울창한 숲은 황무지가 됐고 거목들은 팔다리가 잘린 채 목재 토막이 돼 나뒹굴었다.
여러 차례 찾아 익었던 숲길은 간 데가 없었다. 어렵게 ‘할미나무’를 발견했다. 황토물이 되어 흐르고 있던 작은 시냇물이 그대로였다.
들메나무 거목은 등걸만 남아 있었다. 바로 밑에서 굴삭기가 들메나무에서 베어낸 나무토막을 무한궤도가 달린 운반차에 실었다. 한 회원이 눈물을 감추느라 하늘을 보고 담배를 피워물었다.
가리왕산은 오르기에 쉽지 않은 산이다. 가파르고 먼데다 여름엔 잦은 비와 땅벌, 진드기가 득실대고 겨울에는 허벅지까지 눈에 쌓여 설피를 신어야 한다.
그러나 벌목과 함께 이 산 하봉 정상까지 수십~수백m 폭의 길이 났다. 헤치고 지나가기 힘들 정도로 우거졌던 숲은 황량한 벌판으로 바뀌었다. 군데군데 아름드리 나무의 둥치만이 숲의 기억을 되살렸다.
회원들은 지난 몇 년 동안 공사 예정지의 대형 나무를 조사해 왔다. 나무마다 가슴높이 지름, 키, 지피에스(GPS) 좌표를 기록했다. 할머니 들메나무는 ‘가슴높이 지름 110㎝, 키 25m’로 적혀있었다. 이번에는 등걸의 지름과 좌표를 기록하고 나이테를 세기도 했다. 들메나무는 밑동 지름 123㎝에 나이는 약 100살이었다.
남자 활강경기의 출발점인 해발 1370m 지점 부근에는 낮은 기온 때문에 보기보다 나이 많은 신갈나무가 즐비했다. 그 밑에는 바람꽃 등 각종 야생화도 많았다.
가리왕산에 희귀식물이 많은 것은 풍혈 지형 덕분이다. 땅속에 묻힌 돌들이 여름철 고온을 막아주고 연중 적절한 습기를 유지해 준다. 굴삭기로 파헤친 산허리에는 이런 풍혈 구조가 파헤쳐진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풍혈을 허물고 불도저로 다진 곳도 눈에 띄었다. 토양구조를 파괴하면 복원은 불가능해진다.
가리왕산엔 어른 손목 굵기의 대형 철쭉이 하봉 정상에서 스키장 예정지를 따라 다수 분포해 봄에는 장관을 이뤘다. 때론 어른 장딴지 굵기의 거대 철쭉도 있었다. 그러나 철쭉 군락지는 골재 채취장처럼 변했고 일부 이식하기 위해 가는 철쭉들을 따로 모아 놓은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다른 어느 산에서보다 나무가 굵고 형태가 좋아 가리왕산을 특별하게 만들던 왕사스레나무, 사시나무, 음나무, 신갈나무, 물푸레나무, 다릅나무, 고로쇠나무 거목들은 모두 나무토막이 되어 있었다. 공사 전 거목을 200여 그루로 세었지만 이번 조사에서 발견된 등걸은 400개가 넘었다.
등걸을 조사하며 산비탈을 내려오던 이병천 우이령 사람들 회장의 혼잣말이 쓸쓸하게 들렸다. “싫다 싫어. 정말 싫다.”
가리왕산(정선)/ 글·사진 조홍섭 환경전문기자 ecothin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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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8월 하봉 공사 예정지에서 발견한 들메나무 거목. 시내가 흐르는 울창한 계곡이었다.
등걸만 남은 들메나무에게 우이령 사람들 회원들이 제를 올리고 있다.
공사 전 하봉 일대 모습. 활엽수가 많은 부드러운 능선을 보여준다.
벌목이 이뤄진 하봉 사면. 껑충한 왕사스레나무가 잘린 나무를 말해준다.
하봉 정상 부근의 봄. 거대 신갈나무 옆에 박새와 얼레지가 한창이다.
황무지로 바뀐 하봉 정상 부근. 돌을 다져 놓아 토양구조도 훼손됐다.
하봉 일대에는 어른 허벅지 굵기의 이런 거대 철쭉을 비롯해 대규모 철쭉이 무리를 짓고 있었다(위). 공사를 하면서 이식하기 위해 옮겨놓은 철쭉(아래).
공사 전 낙엽송 조림지 모습(위). 왕사스레나무 등 천연림을 지나 낙엽송 조림지까지 벌채한 모습(아래).
벌채된 거목 실태를 조사하는 이병천 박사. 산림청에서 식물전문가로 근무하다 정년 퇴임한 뒤 최근 환경단체인 우이령 사람들 회장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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