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마지막 금요일인 30일 밤 서울 안국동 정독도서관 맞은 편에 있는 찻집 ‘문향재’에서 여성환경연대 주최로 열린 촛불켜기 행사 참석자들이 촛불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매달 마지막 금요일 저녁 8시부터 2시간 전기플러그를 뽑고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들어도 좋아요…식사를 해도 촛불 아래서
목욕을 하는 것도 좋아요…세상이 달라집니다” “한 달에 하루는/ 숨가쁜 삶의 플러그를 뽑고/ 어둠의 물결을 지피려 합니다.//촛불이 켜지면/ 우리의 숨은 느려지고, 생각이 충만해 지며,/ 에너지, 평화, 그리고 지구 반대편의 이웃을/ 떠올리게 됩니다.”(촛불켜기운동 포스터 중에서) 한 달에 한 번 전등을 끄고 촛불을 밝히자는 촛불켜기운동이 환경단체 회원과 대학생 사이에 소리없이 번지고 있다. 여성환경연대가 ‘플러그를 뽑고, 한박자 천천히’라는 구호를 내걸고 제안한 이 운동에 참여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매달 마지막 금요일과 하지와 동짓날 저녁 8시부터 2시간 동안 텔레비전과 라디오 등 주변에 있는 전기제품들의 플러그를 뽑고, 전깃불 대신 촛불로 어둠을 밝히기만 하면 된다. 이미영 여성환경연대 사무국장은 “전기제품의 플러그를 뽑아내 바쁘게 돌아가는 세계와의 연결고리를 끊고 촛불을 켜는 순간, 우리의 시간과 행동은 느리게 흘러가는 자연의 속도에 맞춰지게 된다”며 “그렇게 자연의 속도와 조화된 ‘느림’을 실천함으로써 더불어 사는 삶의 작은 싹을 틔우자는 것이 촛불을 켜는 뜻”이라고 말했다. 촛불을 켠 다음은 각자 해야 되거나 하고 싶은 일을 하면 된다. 옆 사람과 대화를 하거나 식사를 해도 좋고,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들어도 좋다. 자녀들이 있다면 함께 놀아주거나 촛불 아래서 목욕을 하는 것도 좋다. 아무 것도 할 만한 일이 생각나지 않는다면 그저 촛불을 바라보고 있기만 해도 된다. 특별할 것이 없는 행동들이지만, 촛불 아래서는 특별한 느낌을 준다는 것이 촛불켜기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촛불은 오래전부터 사람들에게 단순한 조명수단 이상의 의미를 지니게 됐기 때문이다. “촛불을 켜는 순간 둘 사이의 막이 하나씩 벗겨지더니 그동안 말하지 못했던 속 깊은 이야기들이 술술 나오더군요.” “어둠 속에 자리 잡은 촛불을 보니 저절로 차분해졌다. 책상을 정리하고, 일기를 쓰기로 했다. 잠깐 명상도 하면서…” “소박한 저녁 밥상이 촛불 때문에 푸짐해졌어요. 평소에는 급하게 먹었지만, 촛불을 바라보며 꼭꼭 씹어 먹었답니다.” (촛불켜기운동 게시판 글 중에서) 4개월전부터 소리없이 확산
9월의 마지막 금요일인 30일 저녁. 서울 안국동 정독도서관 맞은 편에 있는 ‘문향재’라는 이름의 작은 찻집에 여성환경연대 회원과 대학생 중심의 동아리인 ‘캔들나이트’회원 등 20여명이 모였다. 이날은 지난 6월 하짓날을 맞아 촛불켜기운동을 시작한 뒤 네번째 맞는 촛불켜는 날이었다. 여성환경연대의 촛불켜기운동은 그동안 촛불켜기에 공감하는 개인들이 각자의 공간에서 촛불을 켜는 방식으로 진행돼 왔다. 하지만 이날은 원불교여성회가 운영하는 찻집인 문향재를 ‘촛불켜는 가게’ 1호점으로 지정한 것을 계기로 함께 모여 음악과 시를 나누는 조촐한 행사를 열기로 한 것이다. 저녁 8시가 조금 안돼 찾아간 찻집에서는 이미 천정의 밝은 조명이 모두 꺼지고 대신 삼삼오오 둘러 앉은 테이블 위에 놓인 작은 촛불들이 실내를 비추고 있었다. 밀납초가 만들어내는 흔들리는 불빛은 마주 앉은 얼굴의 이마 위 땀구멍까지 각박하게 드러내주는 전등 불빛과 달리 구석구석에 숨어 있는 어둠도 다 밀어내지 못했다. 하지만 그렇게 남은 어둠 덕분에 찻집 안에 있는 모든 각지고 모난 형상들은 부드럽게 뭉그러져 보였다. 취미 삼아 오카리나를 만들고 불기도 한다는 박광일(인천카톨릭대 조소4)씨가 오카리나로 ‘바다에 넘실거리며’라는 곡을 연주해 첫 순서를 열었다. 다음카페 ‘캔들나이트’의 카페지기 양진영(서울대 소비자학3)씨의 ‘꽃씨를 닮은 마침표처럼’이라는 이해인 시인의 시 낭송이 뒤따랐다. 양씨는 “모두들 웰빙을 추구하지만, 주변을 돌아보면 양적으로 잘 사는 것만 추구하고 질적으로 잘 사는 것은 소홀히 하는 것 같다”며 “촛불을 켜고 느림, 에너지 문제, 평화, 이웃을 생각하는 것이 삶을 질적으로 업그레이드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질적으로 잘사는 진짜 웰빙”
이어 하남시에 있는 대안학교인 ‘꽃피는 학교’ 어린이 트리오의 리코더 연주를 감상한 참석자들은 폐지로 만든 엽서에 누군가에게로 보내는 글을 썼다. 전날 밤 꿈 속에서 만난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 사람에게 엽서를 썼다는 김혜령(이화여대 생명과학1)씨는 “살다보면 자신을 들여다보기 힘든데, 한 달에 한 번 촛불을 밝히는 동안만은 자신에게 충실할 수 있는 것 같아 좋다”고 말했다. 이날 행사는 9시가 조금 넘어, 참석자들이 여성환경연대 간사들에게 엽서를 우체통에 넣어달라고 맡기고 떠나면서 끝났다. 이미영 사무국장은 “촛불은 우리를 그 시간과 공간의 주인으로 만들어주고, 생태적 삶, 지속가능한 삶 등에 대해 성찰하도록 이끌어 준다”며 “오는 동짓날에는 더욱 큰 규모로 함께하는 행사를 마련해 촛불켜기운동을 확산시켜 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글 김정수 기자 jsk21@hani.co.kr 사진 이종찬 기자 rhee@hani.co.kr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들어도 좋아요…식사를 해도 촛불 아래서
목욕을 하는 것도 좋아요…세상이 달라집니다” “한 달에 하루는/ 숨가쁜 삶의 플러그를 뽑고/ 어둠의 물결을 지피려 합니다.//촛불이 켜지면/ 우리의 숨은 느려지고, 생각이 충만해 지며,/ 에너지, 평화, 그리고 지구 반대편의 이웃을/ 떠올리게 됩니다.”(촛불켜기운동 포스터 중에서) 한 달에 한 번 전등을 끄고 촛불을 밝히자는 촛불켜기운동이 환경단체 회원과 대학생 사이에 소리없이 번지고 있다. 여성환경연대가 ‘플러그를 뽑고, 한박자 천천히’라는 구호를 내걸고 제안한 이 운동에 참여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매달 마지막 금요일과 하지와 동짓날 저녁 8시부터 2시간 동안 텔레비전과 라디오 등 주변에 있는 전기제품들의 플러그를 뽑고, 전깃불 대신 촛불로 어둠을 밝히기만 하면 된다. 이미영 여성환경연대 사무국장은 “전기제품의 플러그를 뽑아내 바쁘게 돌아가는 세계와의 연결고리를 끊고 촛불을 켜는 순간, 우리의 시간과 행동은 느리게 흘러가는 자연의 속도에 맞춰지게 된다”며 “그렇게 자연의 속도와 조화된 ‘느림’을 실천함으로써 더불어 사는 삶의 작은 싹을 틔우자는 것이 촛불을 켜는 뜻”이라고 말했다. 촛불을 켠 다음은 각자 해야 되거나 하고 싶은 일을 하면 된다. 옆 사람과 대화를 하거나 식사를 해도 좋고,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들어도 좋다. 자녀들이 있다면 함께 놀아주거나 촛불 아래서 목욕을 하는 것도 좋다. 아무 것도 할 만한 일이 생각나지 않는다면 그저 촛불을 바라보고 있기만 해도 된다. 특별할 것이 없는 행동들이지만, 촛불 아래서는 특별한 느낌을 준다는 것이 촛불켜기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촛불은 오래전부터 사람들에게 단순한 조명수단 이상의 의미를 지니게 됐기 때문이다. “촛불을 켜는 순간 둘 사이의 막이 하나씩 벗겨지더니 그동안 말하지 못했던 속 깊은 이야기들이 술술 나오더군요.” “어둠 속에 자리 잡은 촛불을 보니 저절로 차분해졌다. 책상을 정리하고, 일기를 쓰기로 했다. 잠깐 명상도 하면서…” “소박한 저녁 밥상이 촛불 때문에 푸짐해졌어요. 평소에는 급하게 먹었지만, 촛불을 바라보며 꼭꼭 씹어 먹었답니다.” (촛불켜기운동 게시판 글 중에서) 4개월전부터 소리없이 확산
9월의 마지막 금요일인 30일 저녁. 서울 안국동 정독도서관 맞은 편에 있는 ‘문향재’라는 이름의 작은 찻집에 여성환경연대 회원과 대학생 중심의 동아리인 ‘캔들나이트’회원 등 20여명이 모였다. 이날은 지난 6월 하짓날을 맞아 촛불켜기운동을 시작한 뒤 네번째 맞는 촛불켜는 날이었다. 여성환경연대의 촛불켜기운동은 그동안 촛불켜기에 공감하는 개인들이 각자의 공간에서 촛불을 켜는 방식으로 진행돼 왔다. 하지만 이날은 원불교여성회가 운영하는 찻집인 문향재를 ‘촛불켜는 가게’ 1호점으로 지정한 것을 계기로 함께 모여 음악과 시를 나누는 조촐한 행사를 열기로 한 것이다. 저녁 8시가 조금 안돼 찾아간 찻집에서는 이미 천정의 밝은 조명이 모두 꺼지고 대신 삼삼오오 둘러 앉은 테이블 위에 놓인 작은 촛불들이 실내를 비추고 있었다. 밀납초가 만들어내는 흔들리는 불빛은 마주 앉은 얼굴의 이마 위 땀구멍까지 각박하게 드러내주는 전등 불빛과 달리 구석구석에 숨어 있는 어둠도 다 밀어내지 못했다. 하지만 그렇게 남은 어둠 덕분에 찻집 안에 있는 모든 각지고 모난 형상들은 부드럽게 뭉그러져 보였다. 취미 삼아 오카리나를 만들고 불기도 한다는 박광일(인천카톨릭대 조소4)씨가 오카리나로 ‘바다에 넘실거리며’라는 곡을 연주해 첫 순서를 열었다. 다음카페 ‘캔들나이트’의 카페지기 양진영(서울대 소비자학3)씨의 ‘꽃씨를 닮은 마침표처럼’이라는 이해인 시인의 시 낭송이 뒤따랐다. 양씨는 “모두들 웰빙을 추구하지만, 주변을 돌아보면 양적으로 잘 사는 것만 추구하고 질적으로 잘 사는 것은 소홀히 하는 것 같다”며 “촛불을 켜고 느림, 에너지 문제, 평화, 이웃을 생각하는 것이 삶을 질적으로 업그레이드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질적으로 잘사는 진짜 웰빙”
이어 하남시에 있는 대안학교인 ‘꽃피는 학교’ 어린이 트리오의 리코더 연주를 감상한 참석자들은 폐지로 만든 엽서에 누군가에게로 보내는 글을 썼다. 전날 밤 꿈 속에서 만난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 사람에게 엽서를 썼다는 김혜령(이화여대 생명과학1)씨는 “살다보면 자신을 들여다보기 힘든데, 한 달에 한 번 촛불을 밝히는 동안만은 자신에게 충실할 수 있는 것 같아 좋다”고 말했다. 이날 행사는 9시가 조금 넘어, 참석자들이 여성환경연대 간사들에게 엽서를 우체통에 넣어달라고 맡기고 떠나면서 끝났다. 이미영 사무국장은 “촛불은 우리를 그 시간과 공간의 주인으로 만들어주고, 생태적 삶, 지속가능한 삶 등에 대해 성찰하도록 이끌어 준다”며 “오는 동짓날에는 더욱 큰 규모로 함께하는 행사를 마련해 촛불켜기운동을 확산시켜 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글 김정수 기자 jsk21@hani.co.kr 사진 이종찬 기자 rh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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