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생명
거울실험 보라·보석·보람이 이야기
거울실험 보라·보석·보람이 이야기
지난 4일 오후 경기 과천 서울대공원 유인원사 야외방사장에서 오랑우탄 보람이가 관람객들을 바라보고 있다. 보람이는 11일 거울 앞에 선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보람은 잡종, 보라·보석은 순종
어릴 때 놀았지만 지금은 헤어져
보람은 지금도 외로이 큰다 침을 뱉고 수세미를 데우고…
과학은 모든 것 설명 못한다
11일 시작될 거울실험도
앎의 제단에 작은 돌을 쌓는 것 보람이가 혼자인 이유 보람이는 2005년 서울대공원에서 태어났다. 엄마 오순이(47살 추정)는 아직 살아있고, 아빠 아롱이는 세상을 떠났다. 임양묵 사육사는 “보람이는 인공포육을 해서 사람과 함께한 시간이 길었다. 그래서 사람에게 비교적 순한 편”이라고 말했다. 외로움이 보람이를 키웠다. 보람이가 네살 때인 2009년 서울대공원이 낸 보도자료는 보람이를 “엄마 오순이의 노령화로 더 이상의 보살핌이 어려워 어미로부터 떨어져 황근석, 우경미, 박현탁 사육사의 품에서 자라온 아기 오랑우탄”이라고 소개한다. 세 사육사는 보람이를 위해 같은 또래의 오랑우탄들과 어울리도록 ‘친구 만들어주기 프로젝트’를 했지만, “친구들의 반응은 홀대 그 자체”였고 “위험할 정도의 공격적인 반응에 가만히 당하게만 할 수 없어서” 떼어놓았다고 전한다. 현대생물학은 오랑우탄(속)을 보르네오오랑우탄과 수마트라오랑우탄 등 두가지 ‘종’으로 분류하고 있다. 각각 동남아시아 보르네오섬과 수마트라섬에서 사는데, 털색의 밝기, 얼굴의 가늘기 등이 약간 다르다. 보람이의 아빠 아롱이는 순종 보르네오오랑우탄이었지만, 엄마 오순이는 두 종이 섞인 잡종이었다. 순혈주의는 가차 없다. 엄마 때문에 보람이는 잡종이다. 지금 보람이가 보라, 보석이와 함께 있을 수 없는 이유는 보람이가 잡종이기 때문이다. 종 보전기관인 현대 동물원에서 종 다양성은 으뜸가는 가치다. 선진 동물원일수록 순혈주의가 지배한다. 이종은 같이 있어선 안 된다. 자연에 없는 잡종이 태어나기 때문이다. 라이거(사자와 호랑이의 잡종)가 원칙 없는 과거의 동물원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순종이든 잡종이든 고통과 슬픔 그리고 복잡한 삶을 가진 생명이다. 거울실험을 하면 보람이가 좀더 빨리 반응을 보일 거라고 사육사들은 기대해왔다. 다른 아이들에 비해 보람이가 재간이 좋고 머리가 좋다고 느낀다. 반면 보라, 보석이는 동물원의 적자다. 순종 보르네오오랑우탄이란 말이다. 각각 2004년과 2005년 세관에서 압수되어 이곳에 왔다. 보라는 무엇이든 보면 끝장을 내고 마는 집념이 있다고 사육사들은 전했다. 2009년 보라는 셸터 내벽에 부착된 전기난로에 나뭇가지를 갖다대고 불을 붙였다. 보라 등 당시 오랑우탄들은 불이 붙은 나뭇가지를 골똘히 바라보며 놀았고, 이 장면은 ‘추위 피하기’라는 제목으로 보도되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한번은 수세미를 전기난로에 가까이 대었다가 자기 머리에 대고 있더라고요. 따뜻하게 하려고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요.” 보라는 관람객이 던진 플라스틱병을 주워 자신의 소변을 받은 뒤 뚜껑을 닫고 위아래로 흔드는 등 가지고 노는 게 한 동물 블로거의 카메라에 찍히기도 했다. 옷을 주면 팔을 끼우고 장갑을 주면 손에 끼우고 담요를 주면 뒤집어쓰고 돌아다니는 게 오랑우탄이다. 보석이는 이런 보라를 곧잘 따라 한다. 보석이는 2013년 야외방사장 나무 집의 구조물 일부를 손으로 잘라 해체했다. 야생 오랑우탄은 시시때때로 나뭇가지를 꺾고 잘라 도구를 제작하여 이용한다. 보석이의 행동은 그걸 연상시켰다. “오랑우탄은 관계에 민감해요” 침팬지를 제인 구달이 알려주었다면, 오랑우탄은 비루테 갈디카스가 알려주었다. 갈디카스는 1971년 보르네오섬에 스승의 이름을 딴 ‘리키 캠프’를 세우고 오랑우탄 행동 연구에 들어갔다. 차갑게 관찰만 할 게 아니라 따뜻하게 참가할 것. 제인 구달의 연구 방법을 따랐다. 1980년대만 해도 오랑우탄이 동물원에서 도구를 만들어 쓰는 게 관찰됐지만, 주류학계는 오랑우탄이 인간을 모방한 것일 뿐 야생 오랑우탄은 그런 능력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갈디카스는 야생 오랑우탄의 도구 사용 사례를 학계에 보고했지만, 주류 과학자들은 야생의 연구원을 모방한 것이라고 폄하했다. 1988년 말 그녀는 이런 과학자들의 평가에 분개해 과학전문지인 <사이언스>에 열정적인 문체로 편지를 보낸다. “탄중푸팅 국립공원에서 야생 오랑우탄 연구는 이제 17년째에 이르지만, 오랑우탄의 도구 사용은 아주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어른 수컷은 강철나무를 잘라 자신의 몸을 긁는 데 사용합니다. 청소년은 나뭇가지를 끊어 휘휘 저으면서 말벌을 쫓아냅니다.” 갈디카스의 인간우월주의에 대한 투쟁은 승리했고, 이제 오랑우탄의 도구 사용은 상식이 됐다. 취리히대학의 저명한 영장류학자 카럴 판스하이크 등의 ‘야생 수마트라오랑우탄의 지적 도구 사용’에서 정리한 사례만 봐도, 오랑우탄은 잎을 이용해 배설물을 닦고, 나뭇가지를 이용해 가시 돋친 두리안 열매를 다루고, 비가 오면 펑퍼짐한 잎으로 우산을 만든다. 마치 원시 인류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보라가 수세미를 전기난로에 데운 이유는 무엇인가? 나에게 침을 뱉은 이유는 무엇인가? 어찌 보면 동물의 많은 것에 대해 우리는 직관적으로 알고 있다. 다만 그들의 의도를 과학으로 증명하지 못하는 것이다. 인간에게 마음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지만 마음의 전모를 과학으로 증명하지 못하듯이, 직관적으로 터득되는 진리는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종종 찬밥 취급을 받는다. 동물에게 자의식이 없을까? 데카르트의 선언처럼 동물은 감정이 없고 고통을 느끼지 않는 기계인가? 그런 점에서 거울실험은 동물에 대한 우리의 앎의 제단에 아주 작은 돌을 쌓는 것이다. 실험에 사용할 거울을 시범 설치하기 위해 잠깐 야외방사장으로 통하는 문을 잠그고 셸터에 들어갔다. 야외방사장에 나갔던 보람이가 다가와 밖에서 문을 쿵쿵쿵 쳤다. 무엇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단 소리일까. 셸터를 빠져나오는데, 보람이가 처음 본 나를 보고 철창 사이로 손을 내밀었다. 김동선 사육사가 말했다. “오랑우탄은 관계에 민감해요.” 거울실험은 11일부터 일주일에 세차례씩 진행된다. 박성호 감독 등 촬영 스태프와 사육사들은 동물의 안전을 위해 깨지지 않는 반사필름을 거울로 사용하기로 하고, 셸터 내벽에 붙인 뒤 보라, 보석, 보람이를 차례로 노출시키기로 했다. 남종영 기자 fand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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