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일 오후 민간인출입통제구역인 강원도 철원군 동송읍 이길리의 한 논에서 강추위로 부리에 얼음이 얼어 붙는 바람에 먹이를 먹지 못해 탈진한 상태로 구조돼 디엠지철새평화센터에서 보호받고 있는 재두루미. 스스로 얼음을 떼내려고 애쓰는 과정에서 부리의 형태까지 변형된 모습이다. 김일남 철원군문화관광해설사 제공
25일 오후 철원 민간인출입통제구역 안에서 구조된 재두루미의 부리에 얼음이 얼어 붙어 있는 모습. 김일남 철원군문화관광해설사 제공
강원도 철원군 대마리 비무장지대 위 하늘을 나는 두루미들. 환경부 제공
“저기 있네요. 왼쪽 10시 방향입니다."
기자 일행을 태운 버스가 강원도 철원 양지리 민간인출입통제구역 검문소를 통과하고 5분 쯤 지났을까. 버스 앞 쪽에서 이선희 철원군 문화관광해설사가 마침내 두루미 출현을 알렸다. 좌석에서 일어나 가리킨 방향을 보니 도로에서 40~50m 떨어진 눈 덮힌 논 위에 재두루미 4마리가 눈에 들어왔다. 두 마리의 크기가 다른 두 마리에 비해 조금 작아 보이는 것이 가족임이 분명했다. 재두루미들은 버스를 의식한 듯 몸을 돌려 도로 반대 쪽으로 움직였으나, 느릿느릿한 걸음새가 서두르는 모습은 아니었다.
처음 만난 재두루미 가족이 버스 뒤로 점점 멀어지는 것을 아쉬워하며 막 좌석에 등을 기대려는데 김일남 철원군 문화관광해설사가 또다른 두루미들의 출현을 알렸다. 목과 꼬리깃이 검고 정수리가 붉어 단정학으로 불리는 두루미였다. 연이은 두루미들의 출현에 “어제는 날씨가 너무 추워서인지 두루미들이 잘 보이지 않았는데 오늘은 어떨지 모르겠다”는 김 해설사의 설명을 들을 때의 걱정은 모두 사라졌다.
두루미들을 제대로 못볼 수도 있다는 걱정이 괜한 것은 아니었다. 실제 날씨가 너무 추울 때는 두루미들이 먹이 활동을 포기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동행한 철새 전문가 박진영 국립생물자원관 동물자원과 연구관은 “두루미 같은 새들은 날씨가 아주 추워서 멀리 날아가 먹이를 찾는데 들어가는 에너지가 찾아낸 먹이에서 얻을 수 있는 에너지보다 더 큰 경우에는 아예 잠자리에서 나오지 않기도 한다”고 말했다.
다행히 이날 오후는 그런 상황까지 벌어지지는 않았다. 기자 일행이 디엠지철새평화타운을 출발해 철원근대문화유적센터, 월정리역, 한탄강변 두루미 탐조대까지 2시간 가량 이동하는 동안 논에서 평화롭게 먹이를 찾거나 우아한 날갯짓으로 날아가는 모습을 보여준 두루미는 거의 100마리에 육박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강추위에 움츠려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두루미가 날아가는 모습을 찍은 사진이나 연하장의 단골 모델인 두루미 그림을 보면, 두루미는 두 다리를 몸과 수평으로 곧게 뻗고 난다. 하지만 이번에 철원에서 하늘을 나는 두루미 가운데는 다리가 보이지 않는 녀석들이 많았다. 박 연구관은 “날씨가 아주 추울 때는 다리를 쭉 뻗지 않고 안으로 접어넣은 채 저렇게 ‘쪼그려날기’를 한다”고 설명했다. 이날 오후에는 재두루미 한 마리가 부리에 얼음이 얼어 붙어 먹이를 먹지 못해 탈진한 상태로 구조되는 황당한 일까지 빚어졌다.
두루미류로 통칭되는 두루미목 두루미과 새 15종 가운데 한국에서 주로 관찰되는 것은 두루미, 재두루미, 흑두루미 등 3종이다. 이들은 모두 환경부 지정 멸종위기종이고, 특히 키가 1m가 넘어 한국을 찾는 새 가운데 가장 큰 두루미는 지구상에 2800~3300마리 밖에 남지 않은 세계적 멸종위기종이다.
임진강과 한탄강 주변에 펼쳐진 약 150㎢의 철원평야는 세계 최대 두루미 월동지역으로 꼽힌다. 먹이를 얻을 수 있는 넓은 농경지, 겨울에도 얼지 않는 여울, 민간인 출입이 통제돼 사람의 간섭으로부터 안전한 잠자리 등이 어우러져 두루미에게 최적의 서식 환경을 만들어주고 있기 때문이다.
환경부가 지난 19일부터 21일까지 철원평야에서 벌인 겨울철 조류 동시센서스에서 관찰된 두루미와 재두루미는 각각 930마리와 3983마리로 전 세계 야생개체수의 64%와 28%에 이른다는 것이 환경부의 설명이다. 센서스 결과에는 두루미를 포함해 철원평야를 찾는 전체 철새 개체수도 해마다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2015년 47종 1만864마리였던 것이 2016년 1만7213마리, 2017년 2만9915마리로 늘었고, 2018년에는 49종 3만9898마리로 2015년에 비해 2.7배나 늘어난 것이다.
철원평야에서 월동하는 철새가 이처럼 늘어나는 것은 철새와 상생의 길을 찾는 지역주민들의 적극적인 보호 활동의 결과라는 것이 환경부의 분석이다. 농민들이 생태계 보전을 위한 생물다양성관리계약에 참여해 탈곡한 볏짚을 논에 그대로 놔둬 철새의 먹이원으로 제공하고, 수확이 끝난 논에 물을 채우고 우렁이를 키워 두루미가 잠자리이자 먹이터로 이용할 수 있게 하는 등의 노력이 효과를 나타냈다는 것이다.
철원군과 농민들 사이의 생물다양성관리계약에 따른 철원평야 ‘볏짚 존치’ 면적은 그러나 지난해 2042만2000㎡에서 올해 1787만8000㎡로 12% 줄어든 상태다. 지난해에는 국비와 지방비를 포함해 2억45500여만원이었던 사업비가 올해 2억200여만원으로 줄었기 때문이다.
채윤병 철원군청 환경산림과장은 “현재 두루미의 먹이 활동에 특히 핵심적인 지역에는 농민들에게 1㎡에 50원씩 지원해서 매년 10월부터 3월까지 볏집을 존치시키고, 일반 지역은 4개 권역으로 나누어 4년 주기로 돌아가며 1㎡에 30원씩 지원해 볏짚을 남겨두고 있다”며 “일반 지역의 권역별 사업 시행 주기를 2년으로 단축해 한 해 사업 면적을 더 늘리면 좋겠지만 국비 지원이 크게 늘지 않아 힘들다”고 말했다. 올해 철원군 볏집 존치사업에 지원된 국비는 6000만원으로 지난해보다 50만원 늘어나는데 그쳤다.
수확이 끝난 논에 물을 채우고 우렁이를 키워 두루미의 잠자리와 먹이터가 되도록 하는 무논 조성 사업은 국비 지원도 없이 이뤄지고 있다. 그러다보니 올해 조성 면적은 약 35만평에 불과하다. 철원군 환경단체와 주민들로 구성된 철원두루미협의체 최종수 사무국장은 “올해 조성된 무논 35만평 가운데 10만평은 한국전력공사의 도움으로 평당 150원씩 지원해 조성됐지만, 나머지 25만평은 농민들이 아무 지원금 없이 두루미를 보호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조성한 것”이라고 말했다. 최 사무국장은 “두루미는 삵과 같은 천적을 피해 얕은 물 속이나 얼음판 위에 모여 잠을 자기 때문에 가을부터 날아들기 시작하는 두루미들에게 토교저수지가 얼기 전까지 먹이터와 함께 안전한 잠자리를 제공해주는 것이 중요하다”며 “이를 위한 정부 예산 지원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철원/김정수 선임기자
jsk21@hani.co.kr
25일 오후 강원도 철원군 민통선 북쪽 철새서식지에서 탐조단을 태운 버스가 지나가는 도로 옆 논 위로 두루미들이 날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