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은 우리 안에 있습니다” 이승복씨
“기적은 우리 안에 있습니다”
“만일 한국에 있었다면 지금처럼 의사가 되어 있지 못했을 겁니다. 미국은 나에게 장애를 안겨주었지만 최고의 기회를 주기도 했지요.”
자서전 <기적은 당신 안에 있습니다>(황금나침반) 출판 기념을 위해 한국에 온 이승복(41) 존스홉킨스병원 재활의학과 수석전문의는 29일 미국의 장애인 지원 시스템이 있었기에 지금의 자기가 가능했다고 말했다. 그는 미국에서 단 두 명뿐인 사지마비 장애인 의사 중 한 명이다. 휠체어를 타고 병동을 누비며 자신처럼 장애인이 된 환자의 재활을 돕고 있다.
자서전 출판기념차 방한
고3때 마루운동 중 목골절
필사적 재활훈련 끝에
잃어버린 상반신 찾아 그가 하반신 마비의 장애인이 된 것은 1983년. 여덟 살에 부모를 따라 미국에 건너간 지 11년째 되는 고교 3년 때다. 마루운동을 하다가 목을 쭉 늘인 상태로 턱으로 땅을 박으면서 7번과 8번 경골이 완전히 꺾였다.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시작한 체조가 기량이 향상되면서 바야흐로 물이 올라 올림픽 예비군단의 최고 선수로 인정받은 상황이었다. 평생 일어설 수 없으며 잘 구부러지지 않는 손가락, 잘 쥘 수 없는 아귀힘으로 살아야 한다는 진단 앞에 절망했다. 하지만 그것은 잠시.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가 사랑하는, 그를 사랑하는 부모형제를 위해 재활훈련에 나섰다. 석 달 만에 휠체어를 타고 병원을 돌아다닐 수 있었고 물리치료 넉 달 만에 가능한 모든 근육을 쓸 수 있게 되었다. 뉴욕대, 콜럼비아대, 다트머스대 의대를 거쳐 하버드대 의대 인턴과정을 수석으로 마치고 지금의 자리에 이르기까지 그가 들인 노력과 뒤에서 그를 도와준 이들의 노고는 이루 말할 수 없다. 스스로는 잠을 줄였고 동료들은 함께 공부했다. 무엇보다 의지력이 강한 어머니의 뒷심이 컸다고 했다. 그런 어머니가 4년 전 중풍으로 반신마비가 되었다. 2년 전부터는 한해에 5~6개월 함께 산다. 자기가 어머니의 주치의이기도 하지만 각각 성한 부분인 상반신과 한쪽 반신을 합치면 웬만한 일을 할 수 있다. 함께 외출해 노인정에도 가도 쇼핑도 한다. “환자를 진료할 때 다른 사람보다 서너 배의 시간과 힘이 들어요. 그런데 환자들이 그것을 더 좋아하더군요.” 처음에는 이상하게 보다가 ‘어떻게 다쳤느냐’ 호기심을 보이고 자신의 역정을 들려주면 ‘나도 당신처럼 살 수 있게 해 달라’고 말한다는 것. “진료를 하면서 환자나 저나 서로 도움을 받아요.” 때론 어눌하고 때로는 너무 뜸을 들였지만 그의 한국어 발음은 또렷했다. 어릴 때 가져간 초등학교 교과서를 읽고 또 읽으면서 한국어를 잊지 않으려고 했단다. 지금도 한국의 텔레비전 드라마와 영화를 즐겨본다.
그는 회견을 하면서 마이크를 두 손으로 잡아야 했고 식사할 때도 중지와 약지 사이에 숟가락를 끼워서 들어 올렸다. 그의 애칭은 승복의 첫 자인 에스비(SB). 거기에서 ‘슈퍼보이’로 발전했는데, 지금은 슈퍼맨이 되었다고 웃지도 않고 너스레다. 기회가 되면 한국에서도 나 같은 사람이 정상인처럼 생활할 수 있는 사회 시스템을 갖출 수 있도록 미국에서의 경험을 전수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그는 국립재활원, 태릉선수촌 방문 등 공식일정을 마치고 가족들과 시간을 보낸 뒤 14일 출국할 예정이다. 임종업 기자 blitz@hani.co.kr
고3때 마루운동 중 목골절
필사적 재활훈련 끝에
잃어버린 상반신 찾아 그가 하반신 마비의 장애인이 된 것은 1983년. 여덟 살에 부모를 따라 미국에 건너간 지 11년째 되는 고교 3년 때다. 마루운동을 하다가 목을 쭉 늘인 상태로 턱으로 땅을 박으면서 7번과 8번 경골이 완전히 꺾였다.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시작한 체조가 기량이 향상되면서 바야흐로 물이 올라 올림픽 예비군단의 최고 선수로 인정받은 상황이었다. 평생 일어설 수 없으며 잘 구부러지지 않는 손가락, 잘 쥘 수 없는 아귀힘으로 살아야 한다는 진단 앞에 절망했다. 하지만 그것은 잠시.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가 사랑하는, 그를 사랑하는 부모형제를 위해 재활훈련에 나섰다. 석 달 만에 휠체어를 타고 병원을 돌아다닐 수 있었고 물리치료 넉 달 만에 가능한 모든 근육을 쓸 수 있게 되었다. 뉴욕대, 콜럼비아대, 다트머스대 의대를 거쳐 하버드대 의대 인턴과정을 수석으로 마치고 지금의 자리에 이르기까지 그가 들인 노력과 뒤에서 그를 도와준 이들의 노고는 이루 말할 수 없다. 스스로는 잠을 줄였고 동료들은 함께 공부했다. 무엇보다 의지력이 강한 어머니의 뒷심이 컸다고 했다. 그런 어머니가 4년 전 중풍으로 반신마비가 되었다. 2년 전부터는 한해에 5~6개월 함께 산다. 자기가 어머니의 주치의이기도 하지만 각각 성한 부분인 상반신과 한쪽 반신을 합치면 웬만한 일을 할 수 있다. 함께 외출해 노인정에도 가도 쇼핑도 한다. “환자를 진료할 때 다른 사람보다 서너 배의 시간과 힘이 들어요. 그런데 환자들이 그것을 더 좋아하더군요.” 처음에는 이상하게 보다가 ‘어떻게 다쳤느냐’ 호기심을 보이고 자신의 역정을 들려주면 ‘나도 당신처럼 살 수 있게 해 달라’고 말한다는 것. “진료를 하면서 환자나 저나 서로 도움을 받아요.” 때론 어눌하고 때로는 너무 뜸을 들였지만 그의 한국어 발음은 또렷했다. 어릴 때 가져간 초등학교 교과서를 읽고 또 읽으면서 한국어를 잊지 않으려고 했단다. 지금도 한국의 텔레비전 드라마와 영화를 즐겨본다.
그는 회견을 하면서 마이크를 두 손으로 잡아야 했고 식사할 때도 중지와 약지 사이에 숟가락를 끼워서 들어 올렸다. 그의 애칭은 승복의 첫 자인 에스비(SB). 거기에서 ‘슈퍼보이’로 발전했는데, 지금은 슈퍼맨이 되었다고 웃지도 않고 너스레다. 기회가 되면 한국에서도 나 같은 사람이 정상인처럼 생활할 수 있는 사회 시스템을 갖출 수 있도록 미국에서의 경험을 전수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그는 국립재활원, 태릉선수촌 방문 등 공식일정을 마치고 가족들과 시간을 보낸 뒤 14일 출국할 예정이다. 임종업 기자 blitz@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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