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일 오전 경기 평택시 원평로에 위치한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의 치유공동체 ‘와락‘에서 해고노동자와 가족들이 모여 함께 김장을 하고 있다. 평택/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대법원 판결 슬픔 소금에 절이고 연대 마음 버무린 ‘김장’ 담그던 날
“건강지키며 끈질기게 싸우자는 염원 녹여”…300포기 김치는 해고자 품에
“건강지키며 끈질기게 싸우자는 염원 녹여”…300포기 김치는 해고자 품에
잘 때도 벗지 않던 남색 금속노조 조끼는 잠시 옆에 걸쳐두었다. 고무장갑에 앞치마까지 분홍색으로 ‘(색)깔맞춤’해 입은 쌍용차 해고노동자 김수경(52)씨가 21일 하루 ‘김장 아저씨’로 변신했다. “나르는 건 많이 해봤는데 직접 담가본 건 처음이에요. 먹어보세요. 부당해고의 진실을 알리고픈 해고자의 마음이 담겨서 더 맛있을 거에요.”
마음과 달리 초보 김장 아저씨들은 서툴다. 수경씨는 김치를 통에 너무 눌러 담는 바람에 “안 돼, 그러면 넘친다니까”라는 아줌마들의 지적을 피하지 못한다. 해고노동자 박정만(47)씨도 김치 속을 아낌없이 넣다 “속 모자라면 어떻게 해”라는 핀잔을 들었다. 그래도 꿋꿋하게 “속이 많아야 맛있지”라며 유난히 빨간 김치를 만들었다. 며칠 전 평택에 왔다 김장을 담그겠다며 주저앉은 이갑호(42) 금속노조 쌍용차지부 창원지회장은 점심으로 예고된 수육이 늦어진다는 말에 “그럼 우리 파업할 거야”라며 추임새를 넣었다. 쌍용차 노동자·가족 치유공동체인 ‘와락’ 권지영(40) 대표의 지휘 아래, 자동차를 만들던 억센 손으로 김치를 담그던 해고노동자들의 얼굴에 모처럼 웃음꽃이 피었다. 한상균 전 쌍용차지부장의 아내 정영희(49)씨도 “대법원 판결 나고 속상해서 보지 말자고 했는데 그 뒤로도 2000일 집회 등 볼 일이 자꾸 생긴다”며 “그래도 김장하느라 바쁘니까 분위기가 좋네요. 이런 날도 있어야죠”라고 말했다.
이날 오전 경기도 평택시 ‘와락’에는 쌍용차 해고노동자와 아내들 20여명이 김장을 담그러 모였다. 절인 배추 300포기는 미군기지 확장 반대 운동을 벌인 대추리 평화마을에서, 천일염은 같은 처지의 보워터코리아 해고노동자들한테서 사왔다. 김치 속에 들어갈 갓, 무, 쪽파는 쌍용차 해고노동자 가족들이 직접 농사지어 수확했다. 우리 사회의 아픔이 하나 돼 김장을 담그는 셈이다.
와락이 문을 연 2011년부터 해마다 담가온 김장이다. 하지만 ‘해고는 정당하다’던 13일 대법원 파기환송 판결 직후라 감회가 남다르다. 김장 담그는 사이사이 웃음과 농담이 오가지만, ‘마지막 희망’이던 법원의 외면이 남긴 상처는 어쩔 수 없다. “김장날이니까 웃는 거죠, 인상쓰면 맛이 없잖아요”라던 박정만씨는 ‘그날’ 얘기가 나오자 낯빛이 어두워졌다. 쉬는 시간 휴대전화를 쳐다보던 이갑호 지회장이 혼잣말을 했다. “쌍용차 주식은 판결 뒤 계속 오르네….”
해고노동자 이근주씨의 아내인 권지영 와락 대표는 “어제도 해고자들이 모여 울었대요. 오늘의 활기는 앞날이 더 나아 보여서가 아니라 내일을 기약할 수 없으니까 지금이라도 즐겁자는 거죠”라고 말했다.
이날 담근 300포기는 쌍용차 해고자 가족 품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이들은 ‘와락’에서 김장을 담그며 얻은 ‘함께 있다’는 위안을 어려운 처지의 다른 노동자들과 나누려 한다. 이날 담근 김장김치의 일부를 12일부터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 옆 20m 높이의 대형 전광판 위에서 고공농성 중인 씨앤앰 케이블 방송 설치·수리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 현장에 보내기로 했다. 종일 손을 분주하게 놀리던 수경씨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김치를 담그며 건강을 빌었어요. 우리도 씨앤앰 노동자도 건강 지키며 끈질기게 싸우자고.”
평택/김민경 기자 salmat@hani.co.kr, 사진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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