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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창간 20돌] 스무살 이야기
“나 없이 살 수 있어?”
밀린 일거리에 치여 책상머리 저만치 밀어뒀는데도 쉴 새 없이 울려대는 휴대전화 소리는 오늘 따라 마치 애인의 살짝 토라진 목소리 같다. 이번엔 한 음정 낮춰 말한다. “정말, 나 없이 살 수 있겠어?” 이쯤 되면 더 배길 수 없다. “아니~!”
자주 토라져도 죽고 못사는 애인만큼이나 휴대전화 없는 내 삶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다. 오늘 애인은 이렇게 말한다. “근데, 그거 알아? 올해 스무살이 된거?”
스무해 전, 힘찬 ‘울음소리’를 세상에 내지른 아기는 이제 어엿한 성년기로 접어든다. 사람과 사람을 마주서게 하고, 마음과 마음을 이어주며, 막힌 곳은 힘센 전파가 되어 뚫어내고, 가려진 곳은 들춰내 환한 빛을 쏘여준다. 남녀노소, 가진자 못가진자, 힘있는자와 억눌린자 가릴 것 없이 모두를 ‘소통’의 마당으로 불러낸다. 바로 오늘 스무살둥이가 된 <한겨레>의 또다른 얼굴인 듯하다.
둘러보면, <한겨레> 동갑내기는 이 땅에 널려 있다. 이미 스무살짜리 청년이 떡하니 버티고 있던 땅에 도전장을 내민 아기는 지난 20년 동안 꾸준히 몸집을 불리며 세계 곳곳의 하늘길을 하나둘씩 열어갔고, 유독 호기심이 많았던 아기는 바르고 곧게 쑥쑥 자라 ‘바이러스’란 이름의 요괴가 판치는 세상을 정화하는 지킴이로 우뚝서기도 했다. 어디 이들뿐일까. 권위와 허세의 옷을 벗어던지고, 버림받고 억눌린 사람들의 목소리를 찾아 저 낮은 곳으로 내려간 젊은 법조인들, 하루하루 삶속에서 자연과 인간의 평화로운 ‘공존’을 몸으로 실천해 내는 사람들이야말로 지난 20년 동안 도전정신과 실험정신으로 우리 사회에 향기를 보태준, 말 그대로 ‘벤처기업’이자 또다른 <한겨레>일터. 지금까지 걸어온 길은 탄탄대로가 아니었다. 때로는 우리가 함께 걸어 길을 만들었다. 앞으로도 스무살 <한겨레>와 그 동무들이 신명나게 걸어가는 곳, 그곳이 바로 ‘길’이다. 오래 전 공자는 “아는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을 따를 수 없고, 좋아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을 따르지 못하는 법”이라고 했다. 지난 세월 스무살이 바꿔 온 세상만큼이나, 앞으로 우리 스무살둥이들이 펼칠 흥겨운 ‘반란’은 그래서 더 아름다우리라. 최우성 기자 morgen@hani.co.kr
#1 ‘여성인권상’ 내가 받아야 하는거 아니야?
여성들은 나에게 고마워 해야 돼. 얼마 전 ‘모바일과 여성성’인가 하는 주제로 세미나가 열렸는데, 내가 여성들의 커뮤니케이션 통로를 여는 데 크게 기여했대.
내 아버지뻘 되는 유선전화 시절에는 여성이 집 안에서 전화를 걸거나 받는 게 어려웠어. 전화가 어른 방에 놓여 있어, 전화를 사용할 엄두조차 못냈거든. 하지만 요즘은 내 덕에 언제 어디서나 세상과 소통할 수 있게 됐잖아.
내가 생활필수품으로 자리잡기 전까지만 해도, 밤늦은 시간에 엄마나 아내가 아직 귀가하지 않은 자식이나 남편을 기다리며 사립문 밖에서 서성이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어. 요즘은 어때? 조금만 늦으면 바로 휴대전화 때리잖아. 내 덕에 엄마, 아내가 언제든지 가족들의 위치와 상황을 실시간으로 파악할 수 있게 된 거지.
약속 장소를 정하는 모습도 달라졌어. 내가 없던 시절에는 어땠어? ‘6시에 서울역 왼쪽 시계탑 앞에서 보자.’ 이런 식이었잖아. 거 왜 서울역 앞에는 시계탑이 2개 있잖아. 이 때문에 상대가 늦으면 약속 장소가 저쪽 시계탑인가 하고 몇 번씩 오가곤 했어. 요즘은 어때? ‘서울역 근처 와서 이 번호로 휴대폰 때려.’ 이러잖아.
#2 나 태어날땐 비만했지만 ‘왕’ 대접받았지
한 가지만 더 꼽아볼까. 요즘은 내가 있으면 ‘온라인’이 되고, 없으면 ‘오프라인’이 된대. 내가 없으면 세상과 단절된 상태가 돼 불안하대. 옛날에는 지갑을 놓고 왔을 때 불안했는데.
외국 여행 자유화와 마찬가지로 나도 88 서울올림픽 덕에 태어났어. 독재와 군사쿠데타 이미지를 벗고 선진국으로 탈바꿈하자며 올림픽까지 여는데, 내가 빠져서는 폼이 안 나잖아. 휴대전화도 없는 나라가 올림픽을 개최했다고 하면 얼마나 쪽팔리겠어.
처음엔 서울과 수도권, 부산에서만 서비스가 제공됐어. 다음해 전국 35개 도시와 4개 주요 고속도로로 확대된 것을 시작으로 서비스 지역이 넓어져, 1993년이 돼서야 비로소 전국 서비스 모양을 갖췄어. 하지만 내용은 형편없었어. 통화가 되는 곳보다 안 되는 곳이 더 많았고, 통화량이 조금만 늘어나도 장애가 발생했거든.
판촉? 그땐 그런 거 몰랐어. 휴대전화 통화 자제를 요청하는 보도자료가 나오기도 했으니까. 요금은 또 얼마나 높았다구. 당시에는 나 엄청나게 비쌌다. 설치비 65만원, 월 기본료 2만7천원, 10초당 통화료 25원, 단말기 값 수백만원. 당시 내 주인들은 애인이나 친구를 만날 때마다 나를 탁자 위에 올려놓기도 했어. 나를 갖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뭔가 있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황금알 낳는 거위’. 당시 내 별명이야.
#3 친한 친구? ‘엄지’…싫어하는 영화? ‘중독’
나 스스로도 많이 달라졌어. 아날로그 방식에서 디지털 방식으로 전환한 데 이어 영상통화까지 가능한 3세대 이동통신으로 발전했어. 이제는 내가 휴대형 전자기기의 ‘허브’로 성장하고 있어. 음악 재생기와 디지털카메라는 물론이고 컴퓨터와 신용카드·교통카드·텔레비전도 내 안으로 들어왔어. 요즘 지하철 타보면 나를 갖고 영화나 텔레비전을 시청하는 사람들 많잖아. 골프장에서는 캐디, 낚시터에서는 어군 탐지기 몫도 해.
‘엄지족’. 이것도 내가 만든 말이잖아. 90년대까지만 해도 나는 음성통화 수단으로 주로 이용됐어. 요즘은 애들한테 전화 걸면 구식이라고 해. 문자로 날려야 신식이래. 심지어 문자로 시를 보내는 ‘모바일 시인’까지 등장했어. ‘4426만’. 지난 3월 말 현재 나를 이용하는 대한민국 국민 수야. 대한민국 국민 열에 아홉 이상이 나를 이용하고 있다는 거지.
물론 아쉬운 점도 많아. 무엇보다 나로 말미암은 부작용도 많아졌다는 게 안타까워. ‘휴대전화 중독’이란 말까지 생겼대. 내가 없으면 불안해하는 청소년들이 많대. 어른들이야 처자식 먹여 살리자니 어쩔 수 없다지만 청소년들까지 그렇다니 안타까워.
다시 20년이 흘러 내 나이 40이 되면, 좋은 모습만 남았으면 좋겠다. 어떤 모습으로 변하든, 누구를 중독시켰다거나 대를 끊는다는 소리는 듣고 싶지 않거든.
김재섭 기자 jskim@hani.co.kr
둘러보면, <한겨레> 동갑내기는 이 땅에 널려 있다. 이미 스무살짜리 청년이 떡하니 버티고 있던 땅에 도전장을 내민 아기는 지난 20년 동안 꾸준히 몸집을 불리며 세계 곳곳의 하늘길을 하나둘씩 열어갔고, 유독 호기심이 많았던 아기는 바르고 곧게 쑥쑥 자라 ‘바이러스’란 이름의 요괴가 판치는 세상을 정화하는 지킴이로 우뚝서기도 했다. 어디 이들뿐일까. 권위와 허세의 옷을 벗어던지고, 버림받고 억눌린 사람들의 목소리를 찾아 저 낮은 곳으로 내려간 젊은 법조인들, 하루하루 삶속에서 자연과 인간의 평화로운 ‘공존’을 몸으로 실천해 내는 사람들이야말로 지난 20년 동안 도전정신과 실험정신으로 우리 사회에 향기를 보태준, 말 그대로 ‘벤처기업’이자 또다른 <한겨레>일터. 지금까지 걸어온 길은 탄탄대로가 아니었다. 때로는 우리가 함께 걸어 길을 만들었다. 앞으로도 스무살 <한겨레>와 그 동무들이 신명나게 걸어가는 곳, 그곳이 바로 ‘길’이다. 오래 전 공자는 “아는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을 따를 수 없고, 좋아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을 따르지 못하는 법”이라고 했다. 지난 세월 스무살이 바꿔 온 세상만큼이나, 앞으로 우리 스무살둥이들이 펼칠 흥겨운 ‘반란’은 그래서 더 아름다우리라. 최우성 기자 morge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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