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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미디어

<한겨레> 공채 작문 시험을 AS 해드립니다

등록 2015-08-01 11:36수정 2015-08-01 14:47

지난 6월14일 오전 서울 동국대학교에서 열린 한겨레신문 공채 24기 채용시험에 응시한 수험생들이 작문시험을 치루고 있다. 탁기형 선임기자 khtak@hani.co.kr
지난 6월14일 오전 서울 동국대학교에서 열린 한겨레신문 공채 24기 채용시험에 응시한 수험생들이 작문시험을 치루고 있다. 탁기형 선임기자 khtak@hani.co.kr
■ 작문 채점에 참여한 이재훈 기자의 리뷰

이런 작문은 피하라
저널리즘 글쓰기는 일기와 달리 보편적 사례 제시해야
평면적인 구성이 아닌 구체적인 문장을 쓰도록

좋은 작문을 쓰려면
자신만의 시각을 갖추고 초점이 선명한 주제 선정
간결한 문장을 쓰고 단락 구성에 신경을 써야

한겨레신문사는 7월27일 새로운 식구를 맞이했습니다. 경영관리직 3명, 기자직 4명 등 모두 7명이 함께 일하게 됐습니다. 언론사는 선발 인원이 몹시 적습니다. 한겨레신문사 입사를 원했던 훌륭한 지원자가 많았지만, 다수의 지원자에게 탈락의 고배를 내밀어야 했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한겨레신문사는 이번에 모두 4차에 걸쳐 전형을 진행했습니다. 기자직은 2차 전형에서 △종합교양 △논문 △작문 시험을 치렀습니다. 저는 2차 전형 작문 평가위원 가운데 한 명으로 채점에 참여했습니다.

어느 언론사든 글쓰기 시험을 보지 않는 곳은 없습니다. 기자가 되려면 기본적으로 가져야 할 능력이 글쓰기입니다. 2차 전형 지원자들은 짧은 시간 동안 필사적인 글쓰기 능력을 짜내 논문과 작문을 써냈습니다. 작문을 채점하면서 느낀 소감을 글로 한 번 정리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 까닭입니다. 필사적인 글쓰기를 했지만 좋지 못한 결과가 나온 이유는 무엇일까, 지원자들이 궁금해할 것 같았습니다. 한겨레신문사에 지원해 준 분들께 고마운 마음을 담아 건네는 일종의 애프터서비스라고 할 수 있을까요. 충분하지는 않겠지만요.

1. 평가 방식

평가 위원은 최소 경력 13년차 이상의 기자들이었습니다. 논문 3명, 작문 3명 등 모두 6명이 채점을 했습니다. 평가 위원들은 수험생들의 개인 정보를 가린 채 글만 보고 평가했습니다.

작문은 △창조적 글쓰기 능력 △생각의 깊이 △표현의 정확성 등으로 평가 기준을 나눠 점수를 매깁니다. 논문은 △글의 주장이 논리적이고 설득력이 있는가 △독창적이고 참신한 발상으로 글을 신선하게 전개하는가 △어법에 맞게 글을 명료하게 썼는가 등입니다. 논문 평가 위원과 작문 평가 위원이 각자의 영역에서 2차 전형에 참가한 참가자들의 글을 모두 읽고 점수를 매깁니다. 이 점수를 바탕으로 일정 수의 대상자를 추립니다. 이후 논문 평가 위원은 작문 상위권, 작문 평가 위원은 논문 상위권 지원자의 글을 보고 또 채점합니다. 그러니까 한 번 걸러진 상위권 지원자들의 논문과 작문을 평가 위원 6명이 모두 읽게 되는 방식입니다. 이 점수에 종합교양 점수를 합산해 2차 전형 최종 순위를 냈습니다.

평가 위원들은 한 방에 모여 일주일 동안 글을 읽으면서 계속 토론했습니다. 지원자들의 작문과 논문 글쓰기 능력은 균일하지 않았습니다. 작문을 유려하게 잘 쓴 이가 논문에서 엉망인 글을 쓴 경우도 있었고, 논문을 깔끔하게 잘 쓴 이가 작문은 평균 이하인 경우도 있었습니다. 물론 둘 모두 잘 쓴 이도 있었습니다.

글쓰기는 어떤 기계적 잣대나 정답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떤 방식의 글쓰기 방법이 좋은지는 세상에 존재하는 탁월한 필자들의 숫자만큼이나 각양각색일 것입니다. 심지어 평가에 참가한 평가 위원들의 견해도 각자 달랐습니다. 그러니 이 리뷰는 평가에 참가한 한 평가 위원의 개별적 생각이 담긴 소감문 정도로 생각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이하 리뷰는 온전히 글쓰기에 대한 평가입니다. 한겨레 최종 입사자는 다양한 전형으로 평가했기 때문에 글쓰기 능력은 하나의 부분에 불과합니다. 여기서 좋은 평가를 받은 분이 최종 합격자 명단에 없을 수도 있고, 여기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한 분이 다른 평가에서 훌륭한 점수를 받은 경우도 있습니다. 감안해서 읽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리뷰에는 모두 13편의 온전한 글이 사례로 게재돼 있습니다. 이 글을 올리기 전에 글 작성자에게 연락해 게재 동의를 받았습니다. 애초 리뷰를 위해 추려낸 글은 모두 22편이었습니다. 9편의 작성자는 여러 가지 이유로 글 공개를 부담스러워 했습니다. 9편 중 2~3편은 훌륭한 사례로 꼭 소개하고 싶었기 때문에 아쉬움이 남지만, 당연히 그분들의 처지와 견해를 존중해야겠지요.

자, 그럼 본격적으로 시작해 보겠습니다.

2. 이런 작문은 피하는 게 좋습니다.

1) 저널리즘 글쓰기는 일기와 다릅니다.

작문을 평가하는 과정에서 글을 하나씩 읽을 때마다 간략한 소감을 메모했습니다. 제가 가장 많이 쓴 메모는 이 문장입니다.

‘저널리즘 글쓰기는 일기가 아니다’

올해 작문의 제시어는 ‘나무’였습니다. 일단 한 지원자가 쓴 글을 보겠습니다.

재미없겠지만 군대 이야기다. 나는 강원도 동해안 최전선에서 군생활을 했다. 전역을 몇달 앞둔 어느 여름날, 우리 부대에 새로운 임무가 떨어졌다. 6월부터 8월까지 매일 밤마다 ‘송도’라는 섬에서 야간매복작전을 수행하라는 것이었다. 여름만 되면 북한 인민군이 인근 해역에서 해상 훈련을 비밀스레 진행한다는 한 탈북자의 증언이 있은 후였다. 송도는 우리가 발을 디딜 수 있는 동해안 최북단에 위치한 섬이었던 만큼, 적의 동향을 감시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다.

 첫 매복작전에 투입되던 날, 나는 극도로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송도는 본래 작전 지역이 아니었기 때문에 사람들의 흔적이 거의 없었다. 실제로 송도로 이어지는 해안가에는 유실된 지뢰가 군데군데 있었고 남쪽에서 북쪽으로 날렸을 법한 속칭 ‘삐라’도 상당수 흩어져 있었다. 불안한 마음을 붙잡고 드디어 송도에 첫발을 내디뎠다. 이름은 섬이지만 송도는 뭍과 거의 붙어있기 때문에 사실상 육지로 봐도 무방했다. 섬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날 반기는 건 소나무들이 아니라 빽빽하게 솟아있는 대나무들이었기 때문이다.

 송도라는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땐 당연히 섬에 소나무가 많겠거니 싶었다. 인천과 부산에 있는 송도들도 소나무 송(松)자를 쓰지 않았던가. 그러나 동해 바다 가장 북쪽에 위치한 송도는 사실 죽(竹)도였다. 그날 밤, 나는 대나무 속에 둘러싸인 채, 왜 이 섬이 죽도가 아니라 송도일까 생각해봤다. 깊은 고민을 해봤지만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송도의 비밀은 다음날 알 수 있었다. 사실 섬의 반대편 쪽에는 소나무가 꽤 존재한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예로부터 송도라 불려왔다. 이 섬에 대나무가 많이 심어진 건 한국전쟁 때의 일이다. 동부전선은 산세가 험해 남한군과 북한군이 모두 진격을 하지 못하고 충돌만 하는 경우가 많았다. 결국 해안로가 그 대안이 됐다. 남북 모두 일종의 게릴라 부대를 운용하면서 송도 인근 해안을 장악하려 했다. 먼저 들어온 곳은 북한군이었다. 북한군은 남한군을 견제하기 위한 매복지로 송도를 선택했다. 그리고는 자신들의 위치가 발각당하지 않도록 무수히 많은 대나무를 심었다. 작전은 유효했다. 남한군은 송도와 인근 지역에 매복해 있던 북한군에게 연속적으로 타격을 입었고 더 이상 북으로 진출할 수 없었다. 전쟁이 끝날 때쯤에야 송도는 남한의 손에 들어왔고 군사분계선은 송도 바로 위 지역에서부터 시작하게 됐다.

 그날 이후, 매일같이 계속된 매복 작전 중에서도 전쟁이 주는 공포와 분단에서 비롯된 비극이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내가 군생활을 한 시기는 남북관계가 경색되던 때와 꼭 겹쳐 있다. 전역한 지 5년이 지난 지금에도 분단의 비극은 끝이 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예비역들은 자신이 군생활을 했던 지역을 쳐다보지도 않는다고 하지만 나는 지금도 그 송도의 대나무밭을 밟아보고 싶다. 대나무들을 끌어안고 오랜 시간 동안 슬픔만을 목격해와서 얼마나 힘들었느냐고 위로의 말을 던져주고 싶다.

자신의 군 생활 경험담을 길게 서술했습니다. 이 글은 남한 동북쪽 최북단에 ‘송도’라는 섬이 있다는 사실 외에는 별다른 정보값이 없습니다. 정보값이란, 읽는 이와 함께 공유하고 살펴볼 만한 유의미한 사실 관계를 일컫습니다. 정보값이 크지 않은 이런 글은 ‘군 생활 감상문’ 정도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많은 지원자가 이런 신변잡기적인 경험을 풀어쓰는 글쓰기를 했습니다. 그런 글은 의미 있는 저널리즘 글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이렇게 한 번 생각을 해보면 어떨까요. 여러분이 편집기자라면, 이런 신변잡기적 개인의 경험을 신문에 싣고 싶을까요. 저널리즘 글쓰기는 신문에 실을 칼럼을 쓴다고 생각하고 써야합니다. 그것이 비록 입사 시험이라고 해도 말이지요.

하나 더 보겠습니다.

소나무 같은 삶은 불가능하다.

어린 시절 가졌던 소망 중 하나는 소나무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사계절 변함없는 소나무는 성장하는 청소년기 내가 닮고 싶은 모델이었다. 언제나 같은 모습으로 살아가고 싶었다. 사람의 본성은 선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린 시절의 순수하고 건강한 마음을 지켜내고 싶었다.

 이런 생각에 대해 의문이 들기 시작한 건 그리 오랜 시간이 흐르지 않았을 때다. 철없던 초등학생 시절 닥쳐온 IMF 구제금융 사태는 나와 내 가족, 그리고 주변 친구들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었다. 아버지는 회사를 그만두셨고 우리 가족은 이사를 가야만 했다. 친한 친구네 가족은 서울을 떠나 인천으로 갔다. 중학생 때는 집안 형편이 조금 나아져 할머니, 동생과 함께 일본에 사는 작은 아버지 댁에 다녀왔다. 몇 번의 전학을 다니면서 수줍음이 오히려 많아졌던 나는 말이 안 통하는 일본에서 동생을 이끌고 동경 시내를 구경하고 다녔다. 복잡한 동경 전철을 아슬아슬하게 넘나들며 긴자 거리에서부터 디즈니랜드까지 몇일 동안 동경 이곳저곳을 누볐다.

 IMF 사태로 가족에게 닥친 불안이나 일본을 돌아다녔던 경험은 새로운 환경에 대한 적응을 필요로 했다. 고등학교와 대학에서의 생활 역시 매번 새로움의 연속이었다. 이전에 경험해본 적 없는 환경과 사람은 필연적으로 나를 변화시켰다. 변하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초등학생의 나는 더 이상 내 모습이 아니었다.

 성장 과정에서 겪었던 경험이 없었다면 아마 지금의 나는 초등학생 때와 별반 다르지 않은 사람이었을 테다. 그것은 곧 정체를 의미한다. 변화 없는 삶은 사실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도 알게 됐다. 항상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개인에게 매 순간은 새로운 경험이다.

 인간이 모여 사는 사회도 마찬가지다. 다양한 이해 관계를 가진 사람들은 각자의 의견을 표출하는 정치적 과정 속에서 사회를 조금씩 바꿔나간다. 사회가 진보한다는 믿음은 그래서 유효하다. 나와 다른 사람을 만나고 다른 환경에 처하면서 인간이 성장해가듯, 성장하는 개인들이 만들어가는 사회 역시 스스로 성장한다.

 소나무 같은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걸 알게 됐을 때 아쉽기보다는 오히려 기뻤다. 어제보다는 더 나은 내가 될 나 자신에 대해, 그리고 내가 속한 사회에 대한 믿음이 생겼기 때문이다. 순간의 경험이 때로는 나와 사회 구성원들을 고통스럽고 힘들게 만들지만 그 경험이 결국 나를, 그리고 우리 사회를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만들 거라고 믿는다.

이 글은 시선이 주로 ‘나’에 머물러 있습니다. 삶의 변곡점을 하나씩 거론하면서 ‘언제나 한결같은 소나무와 같은 삶을 살지 못함을 깨닫게 된 나’를 주제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이런 글은 형식적인 면만 봤을 때 자기소개서에 어울릴 법합니다. 저널리즘 글쓰기는 자기를 소개하는 글이 아니지요. 개인의 경험을 쓸 수는 있지만, 경험을 서술하는 데만 그쳐선 안 됩니다. 그 경험을 통해 말하고 싶은 사회적인 메시지가 있어야겠지요. 이 이야기는 이 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조금 더 하겠습니다.

게다가 이 글은 개인의 경험을 백화점식으로 하나씩 나열하고 있습니다. 그 경험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은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변화하면서 성장한다’는 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를 풀고 있습니다. 별다른 감흥을 남길 수 없는 까닭이겠지요.

아울러 5번째 문단에 나오는 ‘인간이 모여 사는 사회도 마찬가지다. 다양한 이해 관계를 가진 사람들은 각자의 의견을 표출하는 정치적 과정 속에서 사회를 조금씩 바꿔나간다. 사회가 진보한다는 믿음은 그래서 유효하다’는 문장은 전체적인 글의 맥락과 어떤 개연성이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경험을 통해 변화해가는 나’에 대한 서술과 ‘사회가 진보한다는 믿음’이라는 명제가 어떻게 연결되는지 설명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지요. 5문단이 글의 흐름에서 겉도는 까닭입니다.

또 다른 글을 하나 보겠습니다. 

소쿠리 하나에 대추가 한가득이다. 초록빛 여물지 않은 상큼한 어린 대추부터 쪼글쪼글 말려진 늙은 대추까지, 모두 집 마당에 심긴 대추나무로부터 온 것이었다.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이 집을 지켜온 대추나무는 철마다 한아름 열매를 맺었다. 엄마는 대추 소쿠리를 품안에 끼고 옆집 앞집을 드나들며 한봉지씩 대추를 나눠주는 것에 기쁨을 느꼈다. 이층집에 딸린 마당엔 대추나무 외에 감나무, 포도넝쿨이 있었고 철마다 과실이 맺히면 엄마의 손도 바빠지고 이웃 아주머니들과의 담소소리도 높아졌다. 내가 아홉살이 되던 해, 그러니까 우리집이 마당이 딸린 이층집에 살 때까지의 기억이다.

 열 살이 될 무렵, 우리 집은 이사를 했다. 새집은 같은 동네의 반지하방. 세계는 넓다고 큰소리치던 한 회장이 이끌던 D모기업에 다니던 아버지는 98년 직장을 잃었다. 배운 풍월로 제조업을 해보겠다며 회사를 차렸지만 2년도 채 못 가 부도를 맞았다. 어린 나는 집의 외형적 변화로부터 기울어진 가세를 감지했다. 새집엔 마당이 없었다. 마당이 왠말이냐, 반지하라 그런지 햇빛도 반밖에 들어오지 않아 낮에도 불을 켜고 살아야 했다. 이는 곧 나무와의 작별을 의미했다. 더이상 나무를, 식물을 키울 수 없는 삶으로의 추락. 창 너머로 나무 밑동이나 볼 수 있음 다행이었다.

 나무를 키운다는 것은 일부에게 허락된 나름의 특권이었다. 나무를 키운다는 것은 나무가 심길 땅을 가지고 있는 것이고 서울에서 이 땅을 가지려면 그만한 경제적 여력이 뒷받침돼야 한다. 우리집의 빈부는 나무를 기점으로 갈라졌다. 그때부터였다. 엄마가 작은 화분을 사모으기 시작한 것은. 마트에 다니기 시작한 엄마는 출퇴근 길에 조그만 식물들을 사왔다. 때로는 프리지아였고 때로는 장미 한송이였다. 양파를 물에 담가 싹을 틔우거나 고구마에 새순이 돋길 기다리기도 했다. 그렇게 모인 작은 화분들이 부엌 싱크대 위 네모난 창틀 위에 가득이다. 식물은 오래가지 못한다. 제가끔 고개를 푹 숙이며 고꾸라진다. 그럼에도 엄마는 화분 구매를 포기하지 못한다. 푸르른 나무의 기억이, 지나간 시절의 풍요가 엄마로 하여금 작은 화분이나마 키워보고 싶다는 꿈을 갖게 만드는 모양이다.

 며칠 전 광화문을 지나다 교보문고 빌딩에 걸린 글판이 눈에 들어왔다. 나무는 나무끼리 숲을 이루는데, 너와 나라는 나무는 왜 숲이 되지 못하고 홀로 서 있는가 묻고 있었다. 그 질문에 숨겨진 힐난이 나는 조금 미웠다. 나무조차 제대로 키우지 못하는 여건이다. 모두들 가지가 꺾이거나 밑동이 잘려버린, 제각각 불완전한 나무의 모습을 하고 서 있다. 스스로 살아내기도 벅찬 나무들에게 숲이 되기를 바라는 그 ‘착한 말’이 못내 미웠다. 요즘은 선인장을 엄마에게 선물한다. 사막에서도 살아내는 녀석이라니. 조금 더 오래 창틀에 남아주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서다. 엄마의 창틀이 오래 푸르렀으면 하는 마음이다.

이 글은 ‘나무’를 소재로 삼아 IMF 전후로 확연하게 달라진 개인의 가정사를 차분하게 서술했습니다. 두 번째 글과 비슷하게 개인의 가정사를 다루고 있지만, 앞의 두 글보다는 조금 낫습니다. ‘나무와 함께 살만큼 여유롭다가 어느 순간 처지가 어려워져 화분과 함께 살아가는 삶으로 바뀐 엄마’를 면밀하게 관찰하는 눈길로 묘사에 치중하는 글쓰기를 해주었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신변잡기적이지만, 앞의 두 글에 담긴 ‘나의 경험담’이나 ‘나의 다짐’보다는 개인의 경험담 속에서 조금이나마 사회를 읽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글 역시 아쉬움이 남습니다. 좀 더 명확하게 사회적인 메시지를 담아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IMF 이후 ‘추락한 가정’에 대한 이야기는 한국 사회에서 꽤나 보편적인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 점에서 글쓴이는 네 번째 문단에 있는 “나무조차 제대로 키우지 못하는 여건이다. 모두들 가지가 꺾이거나 밑동이 잘려버린, 제각각 불완전한 나무의 모습을 하고 서 있다.”는 문장을 통해 개인의 가정사를 한국 사회의 현재와 견주는 설명을 시도했습니다. 하지만 한국 사회의 특정한 세대나 계층이 왜 ‘나무조차 제대로 키우지 못하는 여건’에 처해 있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못했습니다. 단순히 비유에 그치고 말았지요. 앞의 세 문단에서 길게 이어진 묘사를 좀 더 압축적으로 줄이고, 네 번째 문단에 좀 더 구체적인 팩트를 제시하면서 설명을 했으면 어땠을까, 싶습니다. 그랬다면 ‘질문에 숨겨진 힐난’에 대해 ‘미워하는 감정’보다는 좀 더 객관적인 설명을 할 수 있었을 것이고, 읽는 이의 공감을 이끌어내기도 쉬웠을 겁니다.

한 가지 더 이야기를 하면서 이 장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작문에서 지원자 다수가 신변잡기적인 개인적 술회에 멈춘 글을 썼습니다. 그런 글을 쓴 많은 지원자들이 ‘나무’라는 주제어를 두고 부모 혹은 조부모에 대한 이야기를 썼습니다. ‘나를 낳아주고 키워준 부모(조부모)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 나는 가지’라는 프레임. 많은 지원자들이 선택한 주제입니다. 지원자들의 나이대를 생각하면, 지원자들의 부모 세대는 이제 막 인생의 은퇴기를 앞두고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IMF 이후 각자도생해야 상황 속에서 개인을 지지해준 건 그나마 가족뿐이었겠지요. 그 중에선 붕괴된 가족을 경험한 지원자도 있을 겁니다. 지금 세대 지원자들의 삶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경험이 혹시 ‘가족의 생존’은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도 해봤습니다. 개인 가정사나 경험담이 글의 대부분을 차지한 이유라고 볼 수도 있겠지요.

개인의 경험은 소중한 글쓰기 자원입니다. 자신의 경험이나 사유가 담겨 있지 않고, 책이나 신문에 담겨 있는 지식만 짜깁기해서 쓴 글은 좋은 글이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경험을 나열하는 것에만 머무른 글 역시 좋은 글이 되기 어렵습니다. 개인의 경험과 그에 따른 사유, 사회적 시선과 메시지가 잘 조화된 글이 좋은 글입니다. 개인적 경험이 어떻게 사회적인 의미가 있는지 설명하는 연결 고리를 찾아야 합니다.

개인의 경험과 그에 따른 사유를 객관화·사회화하지 않으면 좋은 저널리즘 글쓰기를 할 수 없습니다. 저널리즘 글쓰기는 사회적 글쓰기입니다. 글에 사회적 의미를 담고 있어야 합니다. 사회적 의미란 어떤 글에서 다루는 사안이 “많은 사람들이 절실하게 생각하거나 경험하는 문제여서 어떤 형태든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사회적 메시지라고도 합니다. 글에 사회적 의미를 담기 위해선 평소 면밀하게 관찰한 사회 현상을 글 주제와 관련한 사례로 제시하면서 현상에 대한 분석과 견해로 뒷받침해줘야 합니다.

2) 보편적인 사례를 제시해야 합니다.

저널리즘 글쓰기는 풍부한 사례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저널리즘 글쓰기는 그러니까, 설득력있는 글쓰기입니다. 어떤 주장을 직접적으로 드러내기보다는 많은 이들이 인지하고 있는 사례를 제시해 보편적인 공감을 얻고, 그 공감을 바탕으로 자신의 분석과 주장을 근거를 들어 설명하는 방식을 택하는 게 좋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제시하는 사례가 주제와 어떻게 연관되느냐,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례를 제시할 때는 신변잡기적인 자기 경험담보다는 좀 더 보편적인 사례를 제시하면서 글을 풀어나가는 게 좋습니다. 물론 앞서도 말씀드렸다시피 자기 경험담도 쓰는 이의 눈으로 본 사실을 정교하게 기술하는 방식으로 전개한 뒤 이를 사회적 메시지가 담긴 주제와 잘 연결하면 좋은 사례가 됩니다. 하지만 자기 경험에서 그런 메시지를 추출하기 어렵다면, 많은 이들이 알고 있는 사회적 현상이나 문화적 콘텐츠를 사례로 소개하면서 하고 싶은 이야기로 자연스럽게 연결하면 공감을 끌어내기 쉬운 글을 쓸 수 있습니다. 이런 사례로는 △역사적 사실 △백과사전적 지식 △신문 보도를 통해 드러난 각종 사회 현상 △영화나 미술 등 예술작품 이야기 △각종 과학적 통계 자료 등이 있을 수 있겠습니다.

사례를 들어 글을 쓴 한 지원자의 글을 보겠습니다.

“현재 모든 화가들이 비너스의 거짓을 얘기할 때, 마네는 물었다. 왜 거짓을 말해야 하는지, 진실을 얘기하지 않는지?”

 1863년 미술사의 물줄기를 바꾼 불후의 명작 <올랭피아>에 대한 에밀 졸라의 반응이다. 이 작품은 표현과 내용의 측면에서 기존 회화와 차이를 분명히 했다. 입체감과 원근감을 제거해 회화면의 울성에 집중하는 추상화의 가능성을 품고 있었으며, 신화나 종교가 아닌 당대의 인물을 등장시켜 ‘동시대성’을 획득하고 있었다. 특히, 후자에 주목하면, 사실 올랭피아의 구성은 특별할 것이 없었는데, 모티프의 대부분을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에 빚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참조’에 그치지 않고, 동시대 여인을 등장시킨 결정적 ‘차이’가 올랭피아를 위대하게 만들었다. 사소한 한부분의 변주를 통해 전혀 다른 결과를 이끌어낸 마네. 그러나 동시대 화가들과 다른 작품세계를 고집했던 마네의 예술활동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누구보다 살롱에 입선하길 원했지만 낙선은 계속됐다. 그럼에도 미술에서의 신념과 고집을 버리지 않았다. 2015년 한국사회에는 뚝심의 ‘마네정신’이 부족한 것이 아닐까. 인생의 정도를 정해두고 모두가 같은 길을 걸어야 한다고 말하는 사회에서, 또한 취업을 위한 ‘5종 명세’의 단어에서 엿보이는 것처럼 목표를 향해 단 하나의 길만이 제시되는 지금, 마네가 그랬듯 사소한 발상의 전환이 정상에 오르는 새로운 길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한 번 뒤처지면 낙오하는 무한경쟁의 사회에서, 개인에게만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올곧게 하늘을 향해 나아가는 대나무의 모습을 강요할 순 없다. 무엇보다 다양한 가능성을 발견하고 인정할 사회적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관심을 기울여보는 것은 어떨까.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처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고 말하는 인도 고대 경전의 가르침이 오늘날 우리에게 여전히 깊은 울림을 주는 이유는 스스로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려 애쓰는 무소들을 그냥 두고 보지 못하는 오만한 태도가 사회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지원자는 화가 마네의 삶과 <올랭피아>라는 그림을 사례로 제시하면서 글을 풀어나갔습니다. 띄어쓰기도 잘되어 있지 않아(여기선 수정해서 올립니다) 읽기 불편합니다. 표현이 너무 거창하고, 부정확한 수사도 군데군데 보입니다. 하지만 많은 지원자들과 달리 보편적인 사례를 제시했습니다. 신변잡기적 경험보다 좀 더 많은 이들의 눈길을 끌 수 있는 사례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제시한 사례와 하고자 한 이야기가 어떤 연관성을 가지는지 파악하기가 어렵다는 점입니다. 이 지원자가 글에서 하고자 한 이야기는 ‘사소한 발상의 전환으로 정상에 오르는 새로운 길을 발견하자’는 문장이라고 축약할 수 있습니다. 주제가 그다지 선명하지 않아서 글이 산만하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게다가 사례와 이 주제의 연관성을 정밀하게 서술해내지 못했습니다. 점수를 제대로 받을 수 없는 까닭입니다.

이 글의 또 다른 문제점은 문단이 정교하게 나뉘어 있지 않은 점입니다. 인용 문구 한 문장으로 된 첫 문단을 하나의 문단으로 보기 어렵다고 본다면, 전체 글이 두 개의 문단으로 구성돼 있는 셈입니다. 짧은 글일수록 문단은 글의 구성에 중요한 역할을 가집니다. 문단이 여러 개로 나뉘어 있지 않으니 글이 말하려는 바가 너무 단순하고 평면적으로 전달됩니다. 문단의 구성에 대한 이야기는 뒤에서 다시 자세하게 설명하겠습니다.

게다가 문장의 밀도가 떨어집니다. 저널리즘 문장은 압축적이고 효율적인 문장을 써주는 게 좋습니다. 군더더기는 최소화하고, 하고자 하는 말만 간결하게 쓰는 게 좋습니다. 이 글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지원자들 문장이 그랬습니다. 초점없이 장황하게 중언부언하는 문장이 많았습니다. 간결한 문장으로도 충분히 유려한 문장을 쓸 수 있습니다.

이 글은 어떤가요.

<경제성장이 안 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라는 책에는 이러한 일화가 나온다. 이 책의 저자인 G.더글라스는 한 일본인 학자를 데리고 길을 나섰다. 택시를 타고 센트럴파크를 지나가는데 일본인 학자가 굉장히 놀라워했다. 저자는 이렇게 빌딩이 가득한 도시에 엄청난 규모의 공원이 있으니 놀랄 만도 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일본인 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우와~미국은 좋겠군요. 여전히 개발할 수 있는 땅이 도시 한복판에 있으니 말입니다.”

 센트럴파크는 미국인들의 쉼터였다. 지친 삶을 달래고 여유로운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그러나 그 학자 눈엔 그냥 갈아엎고 더 높은 빌딩을 지을 수 있는 공터에 불과했다.

 비단 그 학자만의 이야기일까. 얼마 전 IOC에선 평창동계올림픽의 분산개최를 권고했다. 과도한 비용이 든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비용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바로 가리왕산이다. 활주로가 지어질 예정인 그곳엔 500년된 나무가 가득하다. 가리왕산은 우리나라가 보호해야 할 최대습지이기도 하다. 하지만 자연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500년이 무색하게 이곳 가리왕산은 단 보름의 축제를 위해 갈아엎어질 운명에 처했다. 사람들은 말한다. 평창올림픽이 그 지역 사람들의 살림살이에 도움이 된다면 충분히 열 가치가 있다고 말이다. 현실은 다르다. 메가 이벤트의 최대 수혜자가 지역주민이 아니라 기업인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기업의 돈놀이 앞에 오백년의 역사는 톱질 한 번으로 사라졌다.

 물화, 모든 것을 숫자로 환원시키는 것에 익숙한 나라다. 경제성장을 이유로 돈이 되는 것만 살아남고 돈으로 환산되지 않는 것들은 사라졌다. 그들 눈엔 오백년된 나무 한 그루가 가치있을 리 없다. 명품가구를 만들 수 있지 않는 한 말이다. 물론 숫자만큼 빠르고 쉬운 것 또한 없다. 사람들에게 느티나무 가질래 소나무 가질래라고 물으면 우물쭈물하지만 백만원짜리 느티나무 가질래 천만원짜리 소나무를 가질래라고 물으면 대답은 쉽고 명료해진다. 그러나 쉽고 빠를수록 놓치는 것이 많은 법이다. 같은 숲에서 같은 인고를 겪어냈을 두 나무의 삶은 인간들이 정해놓은 숫자놀이에 과감히 생략되고 만다.

 영화 <춤추는 숲>에서 성미산마을 사람들은 성미산에 들어설 한 사립초등학교를 상대로 투쟁을 시작한다. 영화는 그들이 살고 있는 터전을 잃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새벽에 주민들 몰래 밀고 들어오는 중장비 앞에서 마을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거라곤 두 팔 벌려 나무 한 그루씩 안고 있는 것밖에 없었다. 우리네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귀중한 무언가를 지켜내기란 쉽지 않다. 그냥 뺏기지 않기 위해 꼭 끌어안는 것 외엔 방도가 없다.

 경관을 이유로 플라타너스 나무가 뭉툭뭉툭 잘려나가던 날이었다. 누군가에겐 지저분해 보였을지 모르나 내겐 소중한 존재였다. 여름이면 그늘이 돼주었고 가을이면 바스락 소리를 내며 내 발밑을 맴돌았다. 너무 속상한 나머지 환경단체에서 일하는 친구와 함께 소주를 기울였다. 저 나무가 너무 불쌍하지 않냐며 볼멘소리를 덜어냈다. 그러자 옆 테이블에 앉아있던 아저씨들이 수군거린다. 요즘 젊은 것들이 헛소리나 하면서 시간을 축낸다고 말이다. 이제 우리에겐 나무 한 그루를 잃고 슬퍼할 권리조차 사라졌다.

사례가 풍부한 글입니다.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라는 책에서 발췌한 사례 △현재 이슈가 되고 있는 평창동계올림픽과 가리왕산 사례 △영화 <춤추는 숲>에서 묘사된 성미산마을 사람들의 사례에 더해 최근의 개인적 경험까지 보탰습니다. 짧은 글에 이 정도로 많은 사례를 넣기가 쉽지 않습니다. 보편적인 사례와 개인적 경험을 적절하게 섞은 점도 괜찮았습니다.

하지만 이 글 역시 높은 점수를 받진 못했습니다. 우선 나열된 사례를 한 쾌에 꿸 수 있는 분석과 주장을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나열된 사례 가운데 분석을 가미한 부분이 ‘물화’로 시작하는 문단입니다. 하고자 하는 말이 ‘물화’ 한 단어로 귀결됩니다. 다소 진부한 일반론이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게다가 이 문단에 따라오는 글은 전체 사례와 연관되어 있는 분석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장황하고 중언부언하는 설명이 이어져 있습니다. 삭제하고 읽어도 무방할 정도입니다.

작문 글은 대략 1000자에서 1400자 사이 분량을 제시합니다. 200자 원고지 5매에서 7매 사이입니다. 이 정도 분량에서 설득력 있는 글쓰기를 하려면, 좀 더 구체적이고 미시적인 주제를 잡는 게 좋습니다. 그런 주제가 좀 더 선명한 문제의식을 드러낼 수 있지요. 그러지 못한 상태에서 사례를 기계적으로 나열하다 보니, 겉핥기만 하고 넘어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런 글은 인상을 남기지 못합니다.

3) 평면적인 전개와 구성을 피하자.

이런 지원자의 글이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 거센 비바람이 부는 날에는 늘 잠을 설쳤다. 또래처럼 천둥, 번개가 무섭다는 이유는 아니었다. 내 고민은 좀 더 현실적이었다. 바로 ‘뒷산의 나무들이 벼락을 맞고 쓰러지면 어쩌나’ 하는 것이었다. 이는 시집와서부터 시작된 엄마의 고민이기도 했다. 개조를 하긴 했지만 집이 토대는 본래 서까래와 황토로 지어진 정말 옛집이었기 때문이다. 태풍이 지나간 다음날에는 늘 할아버지께 “저 나무 좀 기울어진 것 같아요”라며 베어버리자는 떼를 부리기도 했다. 집을 짓기 전까지, 뒷산의 나무는 위협이자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러던 나무가 몇년 전 유례없던 태풍을 견디지 못하고 쓰러졌다. 집에는 피해가 없었지만, 그 광경은 처참했다. 뿌리가 살짝 들리거나 서로서로에게 기댄 채 간신히 서 있는 나무부터 아예 누워버린 나무까지. 동네에서 50년을 넘게 살아온 아버지에게도 이는 처음 겪는 일이었다. 포크레인과 덤프트럭을 불러 뒷산을 정리하자 산은 금방 민둥산이 되었다. 어찌보면 앓던 이가 빠진 격이었다. 그러나 얼마 안 가 금세 문제가 생겨났다. 비만 오면 동네는 어느새 산에서 내려온 흙으로 진창이 되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그해 이후로 동네는 매우 습해졌다. 그제야 깨달았다. 나무가 외려 우릴 보호하고 있던 것이라고 말이다.

 우리 사회 속에서도 위협적인 존재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면 최전선에서 사회를 보호하고 있는 ’나무‘들이 존재한다. TV에서 무섭고 폭력적으로만 비춰진 시위는 우리 사회 노동의 최저선을 지키는 몸부림이었다. 망루에 올라 시위를 벌였던 여러 노동자들 역시 인권의 최저선을 지키려 싸워온 이들이다. 대학 내 강사들의 지위와 권리를 지키기 위해 투쟁하는 김영곤 강사 역시 학생의 교육권과 비정규직 강사의 노동권을 위해 3년 넘게 텐트 투쟁을 벌이고 있다.

 그러나 우리 사회 속 나무들은 너무나 위태로운 모습이다. 과거의 내가 뒷산의 나무를 위협의 대상으로 여겨 잘라지길 바랐던 것처럼, 투쟁하는 이들을 단지 사회를 어지럽히는 사람들이라 여기는 시선이 다분하다. 세월호 천막을 이제는 거두라는 사람들의 목소리 역시 여기에 속한다.

 사회 속 홀로 비바람을 버티고 있는 나무들을 지켜줘야 한다. 그들의 목소리가 결국 사라진다면, 우리 사회는 크나큰 부작용을 겪게 된다. 누구도 ’나‘의 권리에 대해 관심 갖지 않을 것이며 ’나‘의 인권에 대해 함께 목소리 높여주지 않을 것이다. 지금 비탈에 위태로이 서 있는 나무들이 쓰러지지 않도록 손을 내밀어야 할 때다.

하나 더 보겠습니다.

삶에 의미가 있는가라는 질문은 물론 진부하다. 그럼에도 이 질문이 계속 던져지고 있다면 그건 현대인들이 무의미에 노출된 채 부유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배격해야 할 것은 진부한 질문이 아니라 진부한 답이다. 삶의 의미를 묻는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고 근본적이다.

 우리 현대인들이 삶의 권태를 버티지 못하고 붕괴해버리는 이유. 그래서 끝내는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내던지는 사례가 많은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시간은 가차없이 흐르는데 삶의 의미는 드물게만 찾아진다는 데 있을지 모른다. 의미를 담지하지 못한 시간은 중력을 잃고 어디론가 날아가 버린다. 때문에 간단치 않은 내 삶의 굴곡들이 개연성 없는 진부한 서사로 채색돼 버리는 것이다. 대지로부터 붕 떠버린 개인의 실존은 자신의 삶의 상투성에 도리질치며 허무주의로 투신해버리고 만다. 여기에 해법은 없는가.

 답은 제시할 능력은 내게 없으나 당신과 같은 고민을 늘 붙들고 사는 나에게 이 질문을 풀어낼 실마리를 던져준 순간이 있었다.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 사원 내 자리한 바이욘이란 곳을 여행했을 때의 이야기다. 그곳은 엄청난 무게의 돌무더기를 부조한 뒤 축조해 만든 거대한 석상들이 즐비한 사원이었다. 그 돌무더기를 아래로부터 부수고 일어선 나무들이 바이욘 사원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나무 둘레는 내가 양손을 쭉 뻗어 감아 돌아도 5번은 충분한 너비였다. 이 거대한 나무의 징글징글한 생명력에 순간 아연해졌다. 이 나무는 저 자신의 생명력을 주체할 수 없었던지 족히 10m가 넘는 여러 갈개의 뿌리들을 지상 위에 드러내놓고 바이욘 사원의 석상들을 휘감고 있었다. 시간이 존재를 삼켜버린다는 말이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겠구나 싶었다. 여기서 받은 충격은 나에게만 해당된 것은 아니었던지 김영하 작가도 이 바이욘 사원의 나무를 모티프로 ‘당신의 나무’라는 단편소설을 발표하기도 했다.

 요컨대, 천년전 하나의 씨앗이 바이욘 사원으로 날아들었고 그 씨앗은 자신이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천년동안 한 시도 빼놓지 않고 던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지상으로 뻗어나오려할 때마다 이를 누르는 돌무더기 앞에서 자신의 시원에 대한 궁구, 즉 내가 여기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를 물었고 이를 통해 자신을 키운 토양과 단절하지 않고 굳건히 역사의 승리자가 될 수 있었다. 천년 전의 일이다.

 우리의 서사가 맥락도 없이 휘발돼버리는 이유는 어쩌면 바이욘 사원의 나무들이 끈덕지게 붙들고 있는 가장 근원적인 질문, 즉 나는 누구이고 나는 왜 존재하는가와 같은 물음을 너무나 쉽게 놓치고 살아서일지도 모른다. 결국 이 나무도 시간의 힘 앞에 수평으로 스러지겠지만 존재의 토양을 잃지는 않았다. 우리도 장구한 시간 앞에 엎드릴 수밖에 없는 존재이지만 살아가는 날 동안 무의미를 견디며 하나의 아름다운 나만의 서사를 창조하기 위해서는 나를 있게 해준 근본적인 물음을 늘 붙들고 살아야 할 것이다.

두 글은 어떠신가요. 첫 번째 글은 자연의 변화에 따라 사람들이 그 자연을 바라보는 눈길이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지 차분하게 묘사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런 눈길의 변화가 자연만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닿아야 한다는 당위를 설명하는 주제로 연결했습니다.

두 번째 글은 사유의 깊이가 엿보입니다. 인간의 생명력으로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자연현상을 관찰하면서 든 사유를 철학적 어휘를 동원해 잔잔하게 풀어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두 글 모두 뭔가 밋밋하다는 느낌을 줍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바로 두 글 모두 구성이 매우 일차원적이고 평면적이기 때문입니다.

일차원적이고 평면적인 글은 두 가지 정도의 이유에서 기인합니다.

첫째, 무턱대고 당위만 강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면서 글이 말하려는 메시지가 단순해집니다. 첫 번째 글은 언제나 집을 덮칠 것 같이 위협적이던 뒷산의 나무가 사라진 뒤에야 그 나무의 소중함을 알 수 있는 현상들이 생겼다는 점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경험적 사례를 통해 한국 사회에도 최전선에서 사회를 보호하고 있는 ’나무‘같은 존재들이 있으니, 이들의 소중함을 느끼고 손을 내밀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라지고 난 뒤에야 소중함을 느낀 뒷산의 나무와 망루에 오른 노동자, 김영곤 강사 등을 단순하게 비교해놓고 둘을 동급으로 이해하라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어떤 당위의 강조에만 신경을 쓰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런 사례들을 보면서 이들이 지키려고 하는 가치를 내가 왜 함께 고민하고 있는지, 이들을 묶을 수 있는 근원적인 문제의식은 무엇인지가 글에 담겨 있지 않습니다. 이런 윤리적 고민 없이 옳고 그름만 당위적으로 강조하면, 읽는 이를 설득할 수 없습니다. 글 쓰는 이가 나의 윤리를 어떻게 구성했는지조차 독자에게 설명하지 못하는 글이 읽는 이에게 어떤 울림을 줄 수 있을까요. 큰 고민 없이 즉자적인 비교에만 천착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둘째, 단락 구성이 유기적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알고 있다시피, 글은 문장과 단락으로 구성됩니다. 매 단락은 단락마다 개별적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야 합니다. 이 단락들이 글이 하고 싶은 큰 주제와 유기적으로 묶여서 하나의 글을 구성합니다. 두 번째 글은 처음부터 끝까지 아무런 굴곡 없이 쭉 한 호흡으로 읽힙니다. 물론 한 호흡으로 읽히는 글이 가진 장점도 있습니다. 다만 그러기 위해선 글이 압도적으로 깊이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지 못한 글은 단락마다 구성에 신경을 써서, 독자들이 끝까지 흥미를 잃지 않고 읽을 수 있도록 유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두 번째 글은 그러지 못했습니다. 압도적인 깊이보다는 삶의 의미와 권태에 대한 다소 진부한 질문에 대해 어휘력만 앞세워 글을 쓰고 있습니다. 바이욘 사원에서 압도적인 자연을 보고 느낀 점도, 주제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첫 번째 글도 대체로 모든 단락이 하나의 이야기만 하고 있습니다.

단락 구성을 유기적으로 하려면, 사례부터 분석과 주장까지 전체 글의 구성에서 적절한 위치를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단락별 유기적 구성을 하는 연습에 대해서는 뒤에 따로 설명하겠습니다.

4) 구체적인 문장을 쓰세요.

지원자들의 글 중에서 몇 가지를 발췌해보겠습니다.

’더 강하고 정교한 도구를 사용하게 되면서 인간은 계속해서 더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 좋은 성과에 익숙해지자 좀 전에 보다 더 나은 것이 아니면 만족할 수 없어졌다. 자극적인 것을 탐닉하게 되고 강하고 아름다운 것을 위해 달려나갔다. 삶의 재미는 점차 극단의 재미를 향해 치달았다. 그러는 동안 작은 자극에는 무뎌졌다. 기쁨도 슬픔도 그 크기가 크지 않으면 관심을 끌지 못하게 되었다.‘

이 문장 어떠신가요? 문장력이 나쁘진 않습니다. 표현이 간결하지요. 그런데 이 글은 저널리즘 글쓰기 문장으로선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습니다. 구체성이 전혀 없는 문장이기 때문입니다. ‘더 강하고 정교한 도구’는 무엇인지, ‘좋은 성과’는 무엇인지, ‘좋은 성과에 익숙해지면서’ 만족하기 위해 필요한 ‘보다 더 나은 것’은 무엇인지 설명되어 있지 않지요. ‘자극적인 것’은 어떤 게 있는지, ‘강하고 아름다운 것’은 또 무엇인지 설명되어 있지 않습니다. ‘삶의 재미’ 역시 추상적인 표현이고, ‘극단의 재미’ 역시 무엇인지 떠오르지 않습니다. 무엇을 얘기하려는지 다가오지 않고 붕 떠있는 느낌입니다.

‘전라도 어느 지역에 가면 고목이 한 그루 있다. 언제 뿌리 내려는지 아는 사람은 없지만 여하튼 크고 좋은 나무다.’

이 문장의 문제점은 무엇일까요. 정보값이 전혀 없습니다. 나무가 있는 지역도 모르고, 언제 뿌리 내렸지도 모릅니다. 게다가 ‘여하튼 크고 좋은 나무’라고 썼습니다. ‘여하튼’이란 단어는 앞에 나오는 내용이 뒤에 나오는 내용의 근거가 되지 못함을 일컫습니다. 즉, 설득력이 없는 근거를 썼다는 말이 되겠지요. 지양해야 할 표현입니다. ‘크고 좋은’이라는 형용사 역시 추상적입니다. 이 지원자는 이어지는 문장에서 ‘나무는 몇 명의 사람이 손을 잡아야 둘레를 잴 수 있을 만큼 넓고 고개를 한참 들어야 가장 윗가지를 볼 수 있는 정도로 높다’고 썼습니다. 이 묘사도 좀 더 구체적으로 써주면 좋습니다. 예를 들면, ‘어른 키의 세 배 정도의 키’라든지 ‘성인 남성 허리의 세 배 정도 둘레’라든지 말이죠. ‘좋은 나무’의 기준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은’은 주관적 감정입니다. 감정을 표현해 다른 사람과 공유하려면 객관적 근거를 제시해주면 좋겠지요. 이런 표현은 저널리즘 글쓰기에서 피해야 합니다.

‘여하튼’과 비슷한 표현으로 ‘어쨌든’이 있습니다. 한 지원자는 1문단과 2문단에서 ‘사주팔자’ 이야기를 하다가, 3문단 도입에서 ‘어쨌든 나는 나무라는데, 다른 속성(?)들과는 조금 다른 것 같다’고 썼습니다.

‘여하튼’과 ‘어쨌든’은 한순간 글의 신뢰를 추락시키는 접속사입니다. 물론 모든 문제의 인과관계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명확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기자적 태도로 그리 적합한 건 아닙니다. 명확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도 한번쯤 의구심을 가져봐야 객관화 작업이 완료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접속사 ‘여하튼’과 ‘어쨌든’은 그런 객관화 작업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접속사입니다. ‘어찌됐든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는 말처럼 성의없이 보이는 말이 있을까요. 저널리즘 글쓰기에서 피해야 하는 단어입니다.

3. 인상을 남긴 작문

’나무‘는 작문으로 쉬운 주제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많은 지원자들이 주제어를 보고 혼란에 빠졌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앞서 얘기했듯, 많은 지원자들이 ’나무=부모‘라는 프레임으로 글을 썼습니다. 작문은 창의적인 글쓰기가 배점이 가장 높습니다. 그리고 평가 위원들은 짧은 기간 동안 수백 개의 글을 읽습니다. 비슷한 주제를 쓴 글은 다른 글보다 인상을 남길 확률이 떨어지겠죠. 그러니 주제어가 주어졌을 때, 일단 주제어와 관련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개념어나 단어들을 메모지에 적고 난 뒤 과감하게 그 개념과 단어를 버려야 합니다. 그 이후에 다시 떠올리거나 한 단계 더 생각을 진행한 개념이나 단어를 가지고 글을 쓰면 좋습니다. 짧은 시간 동안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겠지만 말이죠.

글을 하나 보겠습니다.

서울역 10번 출구를 나와 5분 정도 걸으면 그곳이 보인다. 집없고 돈 없는 이들이 인문학을 공부하는 신기한 학교. 천대받는 노숙인들이 서로를 ‘선생님’이라 부르는 그곳에서 1년을 보냈다. 교실에 모여 함께 문학, 철학, 글쓰기 공부를 하는 것 외에 ‘선생님’들에게 주어진 규칙이 몇가지 더 있었다. 꼭 인사하기, 함께 저녁먹기, 각자 ‘당번’ 지키기, 설거지, 칠판 청소, 불끄기 등 한 명씩 학교 생활에 필요한 소임을 맡아 책임지고 수행하는 거다. 선생님들의 책임감과 참여의지를 위한 일종의 장치였는데, 덕분에 나같은 활동가들이 자잘한 데 손쓸 필요없이 학교는 원활히 굴러갔다.

 권 선생님은 ‘나무에 물 주기’ 당번이었다. 교실에 있는 작은 꽃 화분부터 키큰 나무 화분에 때맞춰 물을 주고 이따금 가지를 솎아주는 일이었다. 학기 초 어둡고 분노에 차 있던 그는 화분이 쑥쑥 자라는 동시에 잘 자란 나무처럼 생기를 되찾아갔다. 봄이 지나 여름이 됐을 땐 자전거 수리 기능을 익히기 시작했고, 물주기 외에 학교의 실무를 솔선수범 도와주는 모범생이 되었다. 글쓰기 소모임에서 부족한 리더인 나를 도와 분위기를 이끌어, 오히려 내가 권 선생님에게 의지하기도 했다. ‘앞으로는 정말 열심히 살겠다’고 다짐하는 그의 일기를 보며 그 의지에 힘을 보태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어느 가을날 나무들은 제 주인을 잃었다. 갑작스러운 죽음이었다. 아버지의 기일에 생의 의지를 잃은 권 선생님은 골방에서 연거푸 술을 마시다 쇼크로 사망했다. 상처를 지닌 채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노숙인은 언제든지 몸과 마음의 질병에 쉽게 노출될 수 있음에도, 그의 아픔을 빨리 발견하고 돌보지 못한 나를 원망했다. 어떤 삶은 미처 피어보지도 못하고 허망하게 진다. 쓸쓸한 그의 빈소를 지키며 밀려드는 자책과 죽음의 공포가 괴로웠다. 며칠 서울역에 갈 수 없었다. 다시 마음을 추스려 교실을 찾았을 때 주인 잃은 화분들이 눈에 들어왔다.

 얼마간 방치되어 잎의 끝이 누렇게 변한 나무들에 그 대신 물을 줬다. 이제 연두색 물주전자는 내 차지가 됐다. 권 선생님의 죽음 이후 일주일, 한달, 두달이 지나며 교실은 다시 활기를 찾고 나의 고통도 점차 희미해져갔다. 하지만 일주일에 한두번씩, 화분 앞에 설 때마다 가슴 언저리가 따끔거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마 이 따끔거림은 그처럼 허무하게 죽는 이가 계속 나온다면, 희미해질지언정 아예 사라지지 못할 것이다. 나는 주인 잃은 나무 앞에서 다짐했다. 그가 살뜰히 너희를 보살폈듯, 나도 누군가 말라 죽지 않도록 노력하게 살겠다고. 이 따끔거림을 긍정해보겠다고.

이 글은 개인적 경험담을 담담하게 서술한 글이지만, 사회적 체험이 함께 담겨 있습니다. 특히 자신의 체험과 그 체험 과정에서 만난 사람, 그리고 관계에 대해 면밀하게 관찰하고 묘사했습니다. 관찰력이 돋보인 글이었습니다. 기자는 관찰력이 뛰어나야 합니다. 눈으로 보는 것만큼 확실한 팩트가 없는데, 같은 현장에 있어도 남들 이상으로 장면을 포착해낼 수 없다면 팩트가 성긴 기사를 쓸 가능성이 큽니다. 이 글은 마무리가 개인적인 다짐으로 끝나서 살짝 아쉽긴 했습니다. 개인적인 다짐은 사회적 메시지로 환원하기가 쉽지 않지요. 하지만 잔잔하게 자신의 생각을 서술하고 있다는 점에서, 개인적 경험담을 다룬 글 중에 돋보이는 글이었습니다.

하나 더 볼까요.

대한민국에서 일어나는 재개발 과정에서 가장 “큰” 문제로 지적되는 것은 바로 ‘집단적 목표’가 ‘개별적 기억’을 압도한 채로 철거와 개발이 진행된다는 사실이다. 25년 간 가난한 철거민들의 삶의 궤적을 추적했던 ‘사당동 더하기 25’의 저자는 위와 같이 말하며 집단적 욕망의 속성을 낱낱이 폭로한다. 아이들이 뛰놀던 공터, 저녁마다 주민들이 함께 모여 이야기를 나누던 마을회관, 푼돈이라도 벌기 위해 거리에서 생선을 팔던 아낙네들의 기억들은 ’잘 살아보세‘라는 집단적 구호에 제압당한다. 개인들의 기억은 잘려나가고, 그 자리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오른 마천루에 비견되는 인간의 욕망이 차지한다.

 밑둥이 잘려진 채 이리저리 쓰러져 있는 나무의 모습은, 철거를 앞둔 주민들의 모습과 매우 닮아있다. 단 5분 동안 진행되는 스키 활강 경기를 위해, 500년 동안 그 자리를 지켜온 나무들을 잘라내는 모습, 바리깡이 지나간 머리처럼 누런 황토빛 흙을 드러내고 있는 산중턱의 모습, 흙 위에 수백년된 고목들이 엉켜져 있는 모습을 보며 철거민들을 내몰았던 인간의 욕망에 대해 생각해본다.

 근대 이래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먹고 자란 휴머니즘은 그야말로 강력한 세계관이자 인식의 틀이었다. 인간의 욕망이라면 무엇이든 긍정되었고, 인간의 지성은 그 무엇보다 빼어난 것으로 간주되었다. 휴머니즘의 본질은 다음과 같았다. “단, 인간에게만 허용할 것!”

 평창 동계올림픽을 위해 잘려진 나무들의 모습은 ’인간‘의 영역에 포함되지 않는 것들이 인간의 욕망을 위해 희생될 수 있다는, ’휴머니즘‘의 근본 가치를 천명한 완벽한 선언처럼 보인다. 단 며칠 ’잘 놀아보기‘ 위해, 그리하여 국위를 선양하고 애국심을 고취시킬 수만 있다면 잘려진 나무들 쯤은 무슨 대수란 말인가. 하지만 문제는 이러한 잘려진 나무의 모습들이 공사 중인 산등성이에서만 발견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인간의 범주에는 포함되지 않는 인간, 그리하여 인간 욕망의 희생자로 전락한 인간은 잘려진 나무처럼 현실 곳곳에 숨어있다. 우리는 생존권을 사수하기 위해 만들어진 옥상의 망루 위에서, 해고자 복직을 위해 올라간 철탑 위에서, 들이닥치는 공권력에 대항하는 송전탑과 해군기지 아래에서 잘려진 나무들의 모습을 목도한다. 인간들의 무자비한 욕망들을 정당화하는 과정은 법이라는, 행정대집행이라는 매우 합리적인 방법으로 자행된다.

 인간의 범위에서 제외된 모든 인간들은 모두 잘려진 나무의 모습을 하고 있다. 삶의 공간에서 뿌리뽑히고, 어딘지도 모르는 공간으로 밀려나는 나무의 모습이 바로 지금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이다. 잘려진 나무들의 사진에서 인간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 그리하여 그 인간적 고통들을 다시금 느끼는 것은 풍요로움의 기호만을 소비하고 있는 우리에게 남겨진 마지막 과제가 될 것이다.

이 글의 장점은 두 가지 사례를 깊게 들여다봤다는 점에 있습니다. ‘사당동 더하기 25’의 사례를 나름의 언어로 분석해서 제시했고, 평창 동계올림픽과 가리왕산 사례에서도 인간의 욕망에 의해 어떤 것이 배제되고 있는지 서술했습니다. 보편적인 사례로 공감을 끌어내려 애썼다는 생각이 듭니다. 상대적으로 선명한 주제 의식을 드러낸 점도 돋보였습니다. 사회적인 모순을 다루면서도 조금 감정이 격앙된 측면이 있지만, 그래도 끝까지 분석적인 설명을 잊지 않고 담아냈다는 점도 좋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단, 이 글의 단점은 앞의 사례와 뒤의 사례가 어떤 점에서 공통적인지 좀 더 구체적으로 서술하지 못한 점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욕망’과 ‘개별적 기억’이 어떻게 구분되고, 법을 통해 욕망을 구현하는 자와 그들의 욕망 구현에 의해 배제되는 자들이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저 ‘인간’으로 뭉뚱그려져 있지요. 좀 더 구체적인 표현으로 명확하게 구분지었으면 더 훌륭한 글이 될 수 있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글도 있었습니다.

우리 할머니 살던 곳은 강경. 젓갈이 짠내를 품고 마을까지 휘돌아나가는 그곳인데, 유일하게 짠내 없던 곳이 있었단다. 그 아래를 지나가면 풀내음이 나고 웃음내음이 나고 땀내음도 났는데, 그 푸르름이 곱고 예뻐서 무서움도 모른 채 주변을 맴돌았다는 거야. 그래, 맞아. 서낭당. 마을 오래된 나무에 색색으로 천을 달아놓고 기쁜 일, 궂은 일 다 이야기하던 그곳.

 할머니의 어릴 적 동무는 서낭당 아래서 만나는 걸 좋아했어. 없는 살림에 모시개떡을 하는 날이 오면 할머니를 불러 반씩 나눠 먹곤 했대. 얘, 희순아. 모시개떡은 왜 이리 서낭당 나뭇잎을 닮았니. 쫄깃한 것이 저 나뭇잎도 맛날 것 같다. 그러면 할머니는 나뭇잎을 따주는 시늉을 했단다.

 아직도 모시개떡을 보면 우는 우리 할머니는 그 동무가 한국전쟁 때 죽은 이야기를 해. 북새통에 뿔뿔이 흩어져서는 꼭 저 서낭당 아래서 다시 만나자, 고 이야기했다는 말을 얼마나 많이 들었는지 몰라. 전쟁이 끝나고 고향으로 돌아온 우리 희순씨는 매일 그 나무 밑에서 동무를 기다렸는데 결국 아흔이 다 될 때까지 보지 못했다는 거지.

 사실 그런 추억은 나도 하나 있어. 서낭당에 모시개떡에, 한국전쟁 이야기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아주 친했던 학창시절 단짝에 관한 그리움이야. 초등학교마다 미끄럼틀 밑에 큰 아름드리 나무가 있잖니? 운동장을 쓸고 지나가는 모래바람이 침범하지 못하는 그곳. 풀내음까지는 아니라도 매미소리가 나던 그 나무 아래서 나는 단짝과 불량식품을 나눠 먹었지. 우리 스물에 여기서 다시 만나자, 라는 약속이 갑작스런 친구의 이민으로 물거품이 될지는 모른 채.

 나는 그 나무를 찾아갈 때마다 할머니와 할머니의 동무와 그를 생각한단다. 장소도 시간도 다르지만 같은 냄새가 나는 그 밑에서. 손을 가만 대고 있으면 말소리가 들릴 것만 같은 그곳에서. 태어난 너를 품에 안고 처음으로 푸른 그늘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었던 그 포근함 속에서.

 나는 걱정이 된단다. 네가 컸을 때 과연 이같은 추억을 혹은 아픔을 가질 공간이 있을지. 그곳이 나무 밑이 아니어도 된단다. 어디든 푸르름과 조곤거림을 느낄 수 있는 곳이면 좋으련만. 할머니의 서낭당은 마을 사람들이 모여 밥도 먹고 경사도 나누던 곳이었고, 나의 미끄럼틀 나무는 땀을 뻘뻘 흘리던 사내애들이 숨을 함께 고르던 곳이었는데 말이다. 굳이 약속하지 않아도 같은 공간에서 눈을 마주칠 수 있던 놀이터가 네게도 있길 간절히 바란다. 그리고 네가 품에 안을 아이에게도 이 기억의 바통을 넘겨주었으면 좋겠어. 그것이 시대고 사랑히고 사람을 향한 연대란다.

조곤조곤 설명하는 듯한 문체가 매력적입니다. 할머니로부터 들은 경험담과 자신의 경험담을 설명하는 데 마치 눈앞에 그 장면이 펼쳐지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문학적 소양이 뛰어난 지원자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자들은 아무래도 건조한 글쓰기를 하는 사람들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요즘은 취재한 팩트를 어떻게 훌륭한 문체로 담아내느냐도 중요한 시대가 됐습니다. 내러티브 저널리즘 등이 기사 작성의 중요한 기법으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으니까요.

무엇보다 이 글은 할머니와 자신의 경험담을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와 잘 연결해냈습니다. 어린이집이라는 공간을 제외하면, 더 이상 같은 놀이 공간에서 뛰놀며 공감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볼 수 없는 시대를 세대적 경험을 녹여가며 주제 의식으로 승화시킨 글이었습니다. 무엇보다 그 메시지를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고, 읽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습득할 수 있게 배치한 점도 돋보였습니다.

하나 더 보지요.

4절기가 없어지면 어떻게 될까. 봄과 가을이 가장 먼저 짧아질 테다. 특유의 봄냄새도, 흐드러지는 가을단풍도 여유롭게 즐기긴 어렵겠다. 기실 과실, 꽃을 품은 나무들에겐 봄과 가을이 일년의 골든타임이다. 그 시간이 지나가면 누구도 더 이상 꽃나무를 올려다보지 않는다. 잠깐의 지극한 화려함과 긴 침울함. 꽃나무는 조울증 걸린 현대인과 닮았다.

 잠깐이나마 눈에 띄게 화려하고 싶은 열망. 끝이 보이지 않는 자기계발이란 정언명령에도 이런 열망이 내재한다. 누구보다 화려하고, 남에 비해 더 빛나야 한다는 주문을 들으며 성장해 온 지금 청년세대가 그렇다. 기실 독보적으로 빛날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고, 그 화려함 역시 일시적인 경우가 많지만 누구나 그렇게 될 수 있다고 믿어온 것. 바우만은 이런 ’자아실현 욕구야말로 정신질환적‘이라고 일갈한다. 자아실현이 가능한 소위 ’성공한 삶‘은 하나라는 인식이 기저에 있기 때문이다. 안팎에서 추동하는 자아실현, 성취욕구가 우울의 근원인 셈이다.

 욕구과잉은 쓰레기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청년세대의 ’잉여문화‘가 그렇다. 상상과 현실이 마찰을 빚을 때 청년들은 무기력하게 내면으로 침잠하며 스스로를 잉여, 곧 쓰레기라 칭하며 자조한다. 잠깐 빛나다가 이내 초라해지는 단풍나무, 꽃나무와 닮았다. 그나마 지금 청년세대에겐 잠깐의 화려함도 주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잉여의 시기가 청소년기부터 장년까지 끝없이 확장된다.

 이 때문에 역설적으로 빛나는 건 꽃 없는 소나무다. 기실 소나무는 특색이 없고 밋밋하다. 늘 같은 색과 모양새다. 헌데 이 때문에 오래간다. 묵직하지 않은 작은 소나무도 마찬가지다. 소나무의 생은 버티는 삶이다. 하나의 이유로 돋보이는 게 아니라 늘 평범하게 견뎌내는 데서 존재 의미를 찾는 삶. 일반 회사원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미생>이 이례적으로 공감을 이끌어낸 것도 대부분의 일상을 정확하게 그려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 청년세대는 생각해본 적 없는 삶이다. 성공 아니면 루저로 단정짓는 분위기 속에서 장삼이사로 머무는 것은 상상해보지 못했다. 하지만 실제론 대부분의 현실이 될 모습이다.

 “영감을 찾는 자는 아마추어이고 우린 그냥 일어나서 일하러 간다.” 소설 <에브리맨>에서 필립 로스의 말처럼 우리는 생각하고, 후세대에게 가르쳐야 한다. 누구도 특별해질 수 없단 뜻에서가 아니다. 누구나 평범하므로 그 평범한 삶을 하찮게 여겨서도 안 되며, 외려 그 보통 삶의 짐을 끌어올리는 것이 더 현실적인 대안일 것이기 때문이다. 보통의 삶을 인정하는 게 더 나은 보통 사람들의 미래를 기획하는 힘이 된다. 공감대 있는 변화는 그렇게 만들어진다.

이 글은 메시지가 뚜렷하진 않습니다. 다만 ’나무‘라는 주제어를 바탕으로, 현실 사회의 여러 군상을 다양하게 접목시켜서 서술했습니다. 독서를 많이 해서 사회를 보는 시선의 깊이를 키운 지원자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어떤 학자나 소설가를 잘 인용한다고 해서 꼭 좋은 글이 되진 않습니다. 어떤 지원자는 유명 학자의 아포리즘을 따와서 인용하고, 그 문장 자체를 근거로 삼아 자신의 주장이 옳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역사적으로나 학술적으로 권위가 있는 인물이 어떤 이야기를 했으니, 우리도 당연히 따라야한다는 식의 전개였지요. 인용을 하고도 인상을 남기지 못한 까닭입니다. 인용을 할 때는 그 아포리즘이 어떤 배경에서 어떤 문제의식을 가지고 나왔고, 그에 따라 우리가 함께 생각해봐야 할 지점은 어떤 것들이 있으며. 그래서 결론적으로 나의 주장은 이렇다는 식으로 이어가는 방식이 되면 좋습니다. 이 글은 우선 다양한 인용을 하고, 다양한 군상을 나무들과 접목시키면서 그런 무리수를 두지 않아서 신선했습니다. 문장도 간결하고, 분석적이었습니다. 당위를 강요하지 않고, 담담하게 자신의 생각을 풀어간 점에서 좋은 점수를 받았습니다.

마지막 글입니다.

’나무‘가 크게 한 건 올린 사건이 있었다. 백제의 미소라 불리우던 금동여래좌상의 모습과 일본 국보 1호인 목조여래상의 형태는 똑같다고 할 정도로 닮아있다. 때문에 한·일 역사학계에서는 서로의 문화적 영향을 받은 것이며 더 나아가 지배의 근거라 주장해왔다. 그러나 일본 목조여래상의 유전자 분석 결과, 한반도, 특히 경북과 강원지역에서만 자생하는 소나무로 만들어졌다는 것이 밝혀졌던 것이다. 이 일로 한국은 일본에 대한 문화적 우월감을, 일본은 굴욕감을 공공연히 드러냈다. 물론 일각에선 아직도 백제가 일본에 바친 진상품이라는 주장도 심심찮게 나온다.

 그러나 고대의 유물, 더 나아가 역사에 대해 양국이 서로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이 정당한 일일까. 고대 일본과 백제는 현대 일본과 한국과는 전혀 다른 나라다. 백제와 현대 한국을 비교하면 정치체제나 인구구성, 언어나 문화도 확연히 다를 것이다. 문화의 흔적을 살피자면 현대 한국은 민주주의나 헌법을 서양에서 이어받았다. 그러나 서양역사를 우리 것이라고 하는 사람은 없다. 같은 피를 물려받은 후손이라는 점은 근거가 부족하다. 심지어 최근 한 다큐멘터리에서는 남쪽 지방 인구의 일부는 코카시안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영토를 기준으로 역사를 소유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면 고구려나 발해의 영토를 가진 중국의 동북아공정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 일본의 국보 1호가 우리나라 땅에서 자생하는 나무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에 우월감이나 굴욕감을 느낄 근거가 없다. 불상들은 우리 것, 남의 것이라기 보단 백제의 것, 그리고 백제 장인의 것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이 더 옳다. 현재 한·중·일의 외교적 문제가 되고있는 역사문제는 역사를 배타적 소유의 관점에서 바라보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오히려 중요한 역사적 사실에는 왜곡이 생긴다. 현재의 주체인 국가의 관점에서 과거를 유리하게 해석하려하기 때문이다. 얼마 전 위안부문제를 연구하는 학자들 모임에서 한·일 역사가가 배제된 것도 그 때문이다. 우리는 공정하다고 생각하나, 어느새 왜곡된 시각을 취한 것이다.

 나무는 대체로 인간 수명보다 오래 산다. 우리가 고목을 신성시하고 그 앞에서 치성을 드려왔던 것도 우리 삶을 뛰어넘는 나무의 역사성 때문이다. 고목 앞에서처럼 우리는 역사 앞에서 겸손해져야 한다. 역사가 어느 국가에 귀속될 수 없는 것임을 깨닫고 인류보편적 시각을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그러한 시각을 통해 서로의 입장만을 고수하느라 닫힌 동북아관계의 새로운 포문을 열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은 어떠신가요. 우선 역사적인 지식을 다양한 관점에서 풍부하게 서술했습니다. 읽는 이로 하여금 정보값을 충분히 취할 수 있도록 해 흥미를 끌게 만들었습니다.

지식을 나열하는 데 그치지 않았습니다. 지식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관점을 통해 ’영토를 기준으로 역사를 소유할 수 없다‘는 주장을 조리있게 펼치고 있습니다.

관점이 신선했습니다. 게다가 이 관점에 대해 사실을 바탕으로 한 객관적 근거도 충실하게 들고 있지요. 그런 면에서 이 글은 앞의 글들보다 좀 더 보편적으로 독자들에게 다가갈 수 있고, 좀 더 구체적으로 주장과 근거를 서술하고 있으며, 뚜렷한 사회적 메시지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마무리 문단에서 다시 한 번 논지를 강조하기보다, 논지를 정리하는 쪽으로 갔으면 어땠을까 싶은 아쉬움이 살짝 있지만, 큰 흠결은 아닙니다.

4. 창의력이 돋보인 글

창의력이 돋보인 글은 읽는 이를 즐겁게 합니다. 창의력은 감각적인 면도 중요하고, 평소 많은 글을 읽고 특이한 방법이나 소재를 찾아낼 수 있어야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무엇보다 창의력이 돋보이는 글은, 평소에 읽는 이의 눈길을 어떻게 사로잡을 것인지 많은 고민을 했다는 걸 증빙합니다. 지원자들 글에서 4~5편 정도 창의력이 돋보인 글이 있었는데, 여기선 이 가운데 게재를 허락한 지원자의 글을 한 편 소개합니다.

희봉씨는 최근 고민이 생겼다. 정수리에서 나무가 자라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어느 날엔가 아침에 눈을 떠 보니 머리카락 사이로 손바닥만한 묘목이 올라와 있었다. 희봉씨는 처음엔 잠이 덜 깬 줄 알았다. 그런데 이 묘목이 저도 나무라고 가지를 쭉쭉 뻗어 올리더니 순식간에 희봉씨 머리통을 셋 정도 더한 것 같은 높이로 자랐다. 그러더니 이제는 꽃도 피우는 것이 아닌가! 이 모든 일이 너무 빠르게 일어나 희봉씨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병원에서도 이와 같은 증상은 처음이라며 별다른 조치를 취해주지 못했다. 마흔이 넘은 아저씨이지만 희봉씨는 쪼그려 앉아 울음을 터뜨렸다. 아직 손바닥만할 때 뽑았어야 했는데.

 게다가 봉오리였던 꽃이 활짝 피어나자 주위 사람들이 이상증세를 호소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희봉씨를 진료했던 의사의 손가락에 티눈이 생겼다. 손톱깍이로 잘라도 다시 생겨나던 티눈에 공포감이 생길 무렵, 티눈의 가운데에서 싹이 올라왔다. 의사는 진료를 하다 말고 자신의 손가락을 내려다 보며 비명을 질렀다. 이상한 티눈은 이내 간호사, 희봉씨의 이웃인 할머니에게서도 나타났다. 티눈이 전염된다는 걸 공식적으로 확인했을 때 이미 병원 사람들과 희봉씨네 동네 주민들이 저마다 몸의 한두 군데에 싹을 틔우고 다닌지 오래였다. 희봉씨는 곧 ‘슈퍼 전파자’라는 이름으로 병실에 격리됐으나 티눈은 무섭게 퍼지기 시작했다. 불안을 호소하던 어느 시민은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대한민국이 나무공화국이 될 것 같다니까요?”

 결국 이 사태가 벌어지고 보름만에 대통령이 현장을 방문했다. 우스꽝스러운 방역복으로 무장한 대통령과 장관 등등이 희봉씨의 병실에 들어섰을 때 발견한 건 앙상하게 마른 희봉씨와, 그 머리 위에서 탐스럽게 자란 나무였다. 대통령은 수첩을 꺼내 읽었다. “저것을 베어내세요.” 누군가가 톱을 들고 와 희봉씨의 머리 위에서 슬금슬금 톱질을 시작했다. 그러나 잘라내기가 무섭게 나무는 다시 자라났다. 대통령은 다음 줄을 읽었다. “뽑아내세요.” 다시 누군가가 수술용 메스를 들고 접근했다. 그러나 두피를 갈라보니 이미 뿌리가 너무 깊어 뽑을 수 없었다.

 이제 희봉씨는 바들바들 떨기 시작했다. 대통령은 마지막 줄을 읽었다. “숙주를 제거하세요.” 그러자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망나니가 다가왔다. 얼큰하게 취한 망나니는 칼 위로 술을 뿜어냈다. 그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던 희봉씨가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잠시만요, 설마 제 목을 치시게요? 그럼 전 죽어요.”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대통령은 뺨 위로 한 줄기 눈물을 흘려보냈지만 방역복 때문에 보이지 않았다. 비명을 지르는 희봉씨의 목 위로, ‘국민안전’ 네 글자가 새겨진 칼날이 떨어져 내렸다.

어떠신가요. 신선한 느낌을 줍니다. 계속해서 비슷한 주제와 형식의 글을 보다가 이렇게 색다른 형식과 작법의 글을 보면 우선 눈길이 가는 건 어쩔 수 없습니다. 문장도 좋습니다. 간결하면서도 유려한 문장입니다. 최근 메르스 사태에 대응하는 정부, 그리고 감염자를 과도하게 타자화하는 사회의 시선에 대한 풍자도 탁월했습니다.

5. 좋은 작문을 쓰기 위해 유념해야 할 사안

이미 위에서 글을 사례로 들며 몇 가지 주의해야 할 점을 이야기했습니다. 하지만 몇 가지 더 보충하려 합니다.

1) 자신만의 관점과 시각을 갖춰야 합니다.

뚜렷한 주제가 정해져 있어서 그 주제에 대한 견해를 밝혀가는 과정을 보는 논문과 달리 작문은 주로 주어진 한 단어나 사진 등을 보고 자신이 주제를 찾아내서 써야 합니다. 그래서 주제 선정부터 중요한데, 이 과정의 핵심은 자신만의 새로운 관점이나 시각입니다. 자신만의 고유한 관점이나 참신한 시각은 어떻게 준비할 수 있느냐고요. 늘 사람들의 이야기에 의문을 가져야 합니다. 아무리 유명한 학자나 전문가의 말이라고 해도, 의문을 가지고 그들의 논지를 헤집어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선 그만큼 많은 책과 글을 읽어야겠지요. 그러니 평소에 다독하면서, 자신만의 생각과 관점을 잡아 메모를 해두는 습관을 길러야 합니다. SNS를 통해 자신만의 관점이 어떻게 소화될 수 있는지 미리 점검을 해보는 것도 좋겠지요.

2) 초점이 선명한 주제를 선정해야 합니다.

주제를 선정하는 데 있어서도 막연하고 추상적인 주장보다는 구체적인 주장을 담는 게 좋습니다. 추상적인 주제는 초점이 넓어서 다 말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보통 지원자들이 가장 많이 하는 실수가 추상적인 거대 이론으로 사안을 해석하고 섣불리 봉합하는 겁니다. 예컨대 "사회구조적인 문제를 봐야 한다", "자본의 논리를 경계해야 한다" 등과 같은 주장으로 마무리하는 글입니다. 이런 주장은 사안을 인식하는 자세로선 부족함이 없지만, 글로 표현하는 방식으로는 미흡합니다. 구체적인 현실과 마주해서 설명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공허한 도덕적 당위론도 경계해야 합니다. "학교폭력은 이런 점에서 어떤 경우든 발생해서는 안 된다" 같은 주장이 글의 주제의 전부인 경우가 있습니다. 이번 지원자들의 글도 다수가 공허한 한 두 문장으로 압축해서 설명하면 끝인 글을 썼습니다. 이왕이면 어떻게 학교폭력에 대처해야 하는지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방안을 뒷받침하면서 논지를 풀어가야 합니다.

3) 간결한 문장을 써야 합니다.

저널리즘 글쓰기는 기본적으로 사실 위주의 간결하고 건조한 문장을 권합니다. 화려한 스타일의 문장이 필수는 아닙니다. 물론 최근 다양한 형태의 기사 작성법이 권장되면서, 꼭 사실관계만 건조하게 쓰는 기본 저널리즘 문장보다 더 농밀하고 유려한 문장이 장려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문장도 우선 간결하게 압축적인 문장을 바탕으로 해야 합니다.

주어와 술어, 수식어와 피수식어의 호응에 주의해야 합니다. 접속사와 조사를 최소화합니다. 한 문장에는 가능하면 하나의 사실만 담으면 좋습니다. 문장의 길이는 가능하면 짧게 쓰는 것이 좋고요. 추상적 수치는 경험적 척도로 환산하는 게 좋습니다. 문장을 다 쓴 뒤 읽는 이의 처지에서 다시 한 번 읽어보고, 길을 가르쳐주듯 친절하게 설명하는 글쓰기를 해야 합니다.

4) 단락 구성에 신경을 써야 합니다.

앞서 ’2-3) 평면적인 전개와 구성을 피하자‘에서 단락별 유기적 구성법에 대해 말씀드리겠다고 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글은 문장에서 시작해 문장의 집합체인 단락이 구성되고, 각자의 단락이 유기적으로 묶여 하나의 완결된 글이 됩니다. 작문은 보통 1000자에서 1400자 정도의 짧은 글이기 때문에 단락 구성없이 그냥 쭉 써내려가는 분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런 글은 짜임새가 엉성해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의 단락은 하나의 소주제가 있어야 합니다. 그 소주제를 단락의 첫 번째 문장에서 언급해주면 좋습니다. 그러면 단락별로 구분이 확실하게 되면서, 이 단락에서는 무슨 근거로 이런 이야기를 펼쳐갈지 기대감을 안깁니다.

단락은 5개 정도로 나누는 게 좋습니다. 꼭 그래야한다는 건 아니지만, 글의 짜임새를 높이기 위해 효율적인 방법 중 하나입니다. 평소 글을 쓸 때 이런 식으로 단락 구성을 한 번 연습해보면 어떨까요.

1단락은 사례 예시, 2단락은 개념적 압축, 3단락은 문제 제기, 4단락은 자기주장, 5단락은 논리적 봉합 정도의 역할로 단락의 역할을 나눠보는 겁니다. 이런 구분법이 정답은 아니지만, 단락을 나눠서 글을 써보는 연습을 해보는 계기를 만들어줄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1) 사례 예시

첫 단락은 사례로 시작해봅시다. 일화, 본인의 경험담, 재미있는 백과사전적 지식, 명언이나 예술작품 이야기, 영화 이야기 등 범주는 다양합니다. 사례를 들 때 가장 중요한 건, 글의 주제를 압축적으로 전해 주는 은유의 기능을 할 수 있는 사례를 고르는 것입니다. 제시된 사례는 글 전체와 유기적으로 녹아들어가서, 주제를 설명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2) 개념적 압축

이 단락은 왜 1단락 같은 사례를 들었는지 설명하는 단락입니다. 사례의 함의를 글 주제에 맞게 논리적 개념으로 압축하는 과정입니다. 사례의 의미를 정확하고 선명하게 개념적으로 풀어낼 수 있어야 합니다. 본격적으로 주장에 들어가기 전에 논리적 정지 작업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3) 문제 설정

3단락은 하고자 하는 얘기를 본격적으로 풀어가는 단계입니다. 1단락과 2단락에서 한 얘기들을 바탕으로, 사회적 메시지와 닿는 문제를 제시합니다. 특정한 사회적 현상을 들어서 그 현상이 어떤 문제점을 가지고 있는지 설명하면 좋겠지요.

(4) 자기주장

1~3단락에서 이야기한 내용을 묶어서 주장을 펴는 단계입니다. 이 장에서 가장 중요한 건 주장을 얘기하는 문장보다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입니다. 자료를 제시하거나 전문가의 견해를 인용하는 방법도 있지만, 가장 좋은 건 자신만의 논지를 치밀하게 풀어가는 과정입니다. 1~3단락에서 왜 그런 전제를 깔았는지, 설명하면서 그 설명이 하고자 하는 주장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설명해주면 좋은 주장의 요건이 갖춰집니다.

(5) 논리적 봉합

이 단락은 앞의 주장 내용을 한 번 정리해주고, 자연스럽게 글을 마무리하는 단락입니다. 주장에 걸맞은 대안이 있다면, 대안을 제시해줘도 좋습니다. 대안이 없더라도, 4문단에서 했던 주장을 차분하게 권유하는 식의 문장으로 보충 설명을 해주면 좋습니다. ‘~ 해야 한다’는 식의 마무리보다는 ‘~하는 게 어떨까’는 식의 청유형 문장이 권장됩니다.

6. 작문 리뷰를 마치며

앞서 말씀드렸듯, 일주일 동안 글을 읽고 또 읽었습니다. 이 글을 쓰면서도 다시 한 번 지원자들의 글을 읽고, 솎아내고, 분류하는 과정을 거쳤습니다. 읽을 때마다 좋은 글을 쓴 지원자들을 더 뽑지 못해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한겨레신문사의 작문 시험 시간은 60분이었습니다. 매우 짧은 시간이지요. 이 정도의 시간 동안 갑자기 주어진 주제어를 가지고 200자 원고지 6매 분량의 짜임새 있는 글을 쓰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평소 글쓰기 연습이 충분히 되어 있지 않으면 사실 한 문단을 완결짓기에도 버거운 시간입니다. 제 주변의 한 기자도 “지금 막상 그렇게 닥치면 한 문장이라도 제대로 쓸 수 있을까?”라고 되묻더군요. 하지만 많은 지원자들이 훌륭한 글을 써줬습니다. 기자 생활을 오랫동안 한 평가 위원들도 그 시간 동안 제가 지적한 이 사안들을 다 지키면서 글을 쓰기란 불가능했을 겁니다. 그러니 제가 말씀드린 이 리뷰는 그저 참고사항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글쓰기에는 뚜렷하게 정해진 법칙과 정답이라는 게 없습니다.

많이 읽고, 날카롭게 생각을 벼리고, 다양한 주제로 글을 써보고, 썼던 글을 여러 번 뜯어고치는 경험을 반복적으로 축적해야 좋은 글이 나오겠지요. 결국 그런 방법밖에 없다는 말씀을 드리면서, 긴 글을 마칩니다.

한겨레신문사에 입사한 새 식구들에겐 축하의 말씀을 전하고, 안타깝게 탈락한 수많은 훌륭한 지원자들에겐 위로의 말씀을 전합니다. 어딘가에서 글 쓰는 일을 하면서 만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한겨레 작문 평가위원 이재훈 기자 n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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