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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3.13 16:43 수정 : 2019.03.13 16:48

지난 9일 별세한 고 문동환 목사는 지난 12일 경기도 남양주시 마석 모란공원 민주열사묘역에 잠들었다. 사진 연합뉴스

[가신 이의 발자취] ‘아듀, 문동환 목사님’

지난 9일 별세한 고 문동환 목사는 지난 12일 경기도 남양주시 마석 모란공원 민주열사묘역에 잠들었다. 사진 연합뉴스
문동환 목사님이 (신에게) 돌아가셨다. 그래서 ‘아-듀’(a-Dieu·신에게로) 인사부터 드리고 싶다. 10여년 전쯤 필자가 미국 시카고에서 유학하던 시절, 뉴욕에 계시는 문 목사님이 시국 강연차 시카고에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이명박정권 시절이었고, 시카고 보수인사들이 태극기와 성조기를 들고 강연장을 둘러싸서 분위기가 험악했다. 나의 임무는 문 목사님을 가까이에서 경호하는 것이었다. 옆에서 부축하면서 거동이 불편한 목사님을 모시는 것, 목사님 얼굴을 살피면서 뭘 원하시는지를 파악하고 적절히 상황에 대처를 했어야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나는 유능한 보디가드는 아니었다.

강연이 끝난 뒤 버버리에 이상한 모자를 쓴 (심지어 선글라스까지 낀) 일군의 ‘보수 노인’들이 문 목사님을 에워쌌고, ‘6·15 선언 백지화’, ‘용공세력’ 어쩌구 하면서 ‘맞짱 대화’를 요구했다. 나는 그들과 충돌을 피하고자 황급히 문 목사님을 모시고 자리를 피하려 했다. 그런데 문 목사님이 “그럽시다. 우리 대화합시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닌가. 그뒤 한 시간 가량 토론이 이어졌다. 나중에는 상대 쪽에서 ‘서서 말씀하시기 힘드니까 앉아서 하시라’며 문 목사님에게 의자까지 대령하고 물도 떠다주고 했던 기억이 선명하다. 거인의 풍모와 존엄을 느낄 수 있는 장면이었다.

그때 나는 문 목사님이 보여준, 다른 상대를 향한 진정어린 설득과 애정에 홀렸던 것 같다.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지금은 잘 떠오르지 않는다. 다만 미동도 하지 않고 목사님을 주시하던 버버리맨들의 정지된 모자와 간혹 삐걱대던 문 목사님 금속의자의 파열음, 그리고 문 목사님 말씀 사이 사이 멈춰섰던 적막, 그때 들렸던 누군가의 마른 기침소리…. 문 목사님의 부음에 내 안에서 잠자고 있던 그 기억들이 좀비처럼 되살아났다.

시카고에서 학위를 마치고 돌아온 뒤에 얼마나 지났을까. 문 목사님을 뵈러 간 적이 있었다. 그런데 사모님이 문 목사님을 보며 “너무 잘 생기지 않았어요. 저 사람 너무 잘 생겼어요. 결혼은 했나 모르겠네”라고 감탄사를 연발했다. 문 목사님은 “와이프가 요즘 좀 정신이 오락가락 해. 허허. 내가 잘 생겼대”라며 웃으셨다. 사모님이 아직도 자기 남편이 잘 생겼고 저 남자를 보면 떨린다, 라고 했던 것은 진심이고 진실이었음을 나는 안다. 문 목사님은 그 나이에도 사람들을 떨리게 하고 수줍게 만드는 그런 분이셨다.

지난 20세기 말 서울은 신촌이나 종로통을 거닐다 보면 전경과 백골단들이 젊은이들의 가방을 불시에 그냥 뒤져도 되는 암흑의 시절이었다. 안병무, 문익환, 문동환, 서남동, 김재준…. 이제는 신화 속 인물이 되어버린 분들의 무용담과 발언, 글들은 우리로 하여금 그러한 늑대들의 시간을 견디게 했던 유일한 해방구였다. 정권의 야만에 맞서 그 당시 많은 기독청년들이 거리에서 싸웠지만, 그것만으로 해결되지 않았던 외로움과 무력감이 우리에게는 있었다. 뿌리도 깊지 않았고 줄기도 가늘었던 우리는 위대한 스승들을 둘러싼 소문과 소식과 어록을 통해 바깥에서 받았던 상처를 잠시나마 잊고 성스러운 시간과 공간을 마련할 수 있었다. 적들을 향한 비판과 저항의 칼날을 우리 자신에게도 돌릴 줄 아는 기도와 성찰의 시간을 겨우 담보할 수 있었다.

신학과 삶, 교회와 세계, 하늘과 땅이 서로 다른 그 무엇이 아니라 하나라는 사실을 그때 처음으로 어렴풋이 깨달았던 것 같다. 나를 향한 엄정한 신앙(학)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도, 우리를 유혹하는 사이비 우상들로부터 빠져나와 성서가 지닌 진리와 정의를 비로소 믿게 되었던 것도 모두 그 무렵부터이다. 우리세대는 어쩌면 문동환 목사님 세대의 선생님들이 만들어 놓은 틈으로부터 새어나오는 빛과 소리에 취한 자들이라 해도 과언 아니다. 그 빛이 한신대와 기독교장로회를, 그 소리가 우리를, 나를 이곳까지 이르게 하였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밝게 빛나던 별이 우리에게서 사라졌다.

‘아이 모운 데어포 아이 엠’(I mourn therefore I am·나는 애도한다. 고로 존재한다.) 자크 데리다의 말이다. 데카르트의 ‘생각하는 주체’로 인해 근대가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데리다는 ‘애도하는 주체’를 말하면서 의식의 주체보다 더 높은 차원인 애도의 주체를 우리에게 주문한다. 국어사전에서 ‘애도’를 찾으면 이렇다. ‘사람의 죽음을 슬퍼함’, 그러므로 ‘애도를 성공했다’함은 그 슬픔이 극복되었음을 말한다. 만약 그렇다면, 성공한 애도는 필연적으로 실패한 애도가 되는 것 아닌가. 본래 애도란 망자에 대한 기억을 유지하고, 망자의 상실로 인한 아픔을 지속시키는 행위여야 되는 것 아닌가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애도란 애도의 사전적 의미, 즉 사람의 죽음을 슬퍼하는 행위를 현재진행의 사건으로 계속 작동시키는 행위다. 이것이 데리다가 말하는 애도의 정치학이다.

우리는 문 목사님을 어떻게 애도해야 할까. 언론에서는 이 시대 마지막 거인이 사라졌다고들 한다. 기독교가 ‘개독교’가 되어버린 이 땅에서, 교회가 사회를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오히려 교회를 염려하는 세상에서, 이 시대 마지막 어른이 사라져 슬퍼하고 망연자실하고 있는 우리에게 문 목사님은 뭐라 답하실까. “나에 대한 애도를 멈추지 마라. 이렇게 한번 슬퍼하고 안타까와 하는 것으로 나에 대한 애도를 다 했다 생각하지 마라. 그 마음을 계속 멈추지 말고 추락한 현실을 직시하고 다짐하고 변화하고 혁명하는 일을 멈추지 않는 것, 그것이 나에 대한 애도의 완성이다”라고 말씀하지 않을까.

이제 우리시대 마지막 선생을 보낸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이제 보고파 했던 형님이신 문익환 목사님도 만나고, 존경하는 스승 김재준 목사님, 그리운 벗 안병무, 서남동, 박형규 목사님도 뵙겠네요. 목사님이 우리를 대신해 모든 분들께 안부 전해주세요. 그리고 부디 편안히 잠드소서.

이상철/한백교회 담임목사·<죽은 신의 인문학>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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