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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5.19 17:44 수정 : 2019.05.20 20:15

[가신이의 발자취] 김홍일 요한 형제를 기리며

지난 4월23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서 함세웅 신부가 고 김홍일 전 민주당 의원 장례미사를 집전하고 있다. 연합뉴스
1973년 ‘김대중 도쿄 납치사건’ 직후
초임 사제-청년 신도로 처음 만나
지난달 장례미사까지 ‘46년 인연’

‘80년 5월’ 고문 후유증으로 고통
망월동 ‘5·18’ 구묘역에 잠들어
“2000년 6·15 가장 행복” 생전 고백

올해 ‘5·18’은 여러가지로 감회가 깊습니다. 새로운 증언과 사실이 속속 드러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39년이 지나도록 진상규명도 책임자 처벌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는 현실은 엄연합니다. 무엇보다 지난 4월23일 광주 망월동 묘역에 또 한 사람의 민주 영령이자 형제를 모셔 두고 온 까닭인 듯 합니다.

1973년 6월, 로마 유학을 마치고 8년 만에 귀국하던 날이었습니다. 김포공항에서부터 검문소에 서 있던 무장한 군인들을 보면서 너무 낯설었고 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다. 유럽에서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장면이었으니까요. 이제 막 드리우기 시작한 유신독재의 형상을 보면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내내 침울한 마음이었습니다.

그런데 눈에 비친 그 야만스러운 풍경이 불과 두어달 뒤, ‘김대중 도쿄 납치사건’을 계기로, 내게는 바로 사목 현장과 구체적 삶의 현실이 되었습니다. 곧바로 서울 연희동성당 보좌 신부를 맡았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때 청년 김홍일이 성당을 찾아왔습니다. 31살의 젊은 사제와 25살의 청년 요한 형제로 처음 만난 우리는 손잡고 함께 기도했습니다. 군복무를 막 마친 그는 아름다운 미래를 꿈꾸는 과묵한 청년이었습니다. 장 글라라 수녀님 등 집안 어른들 얘기도 나누며 신앙을 확인했습니다.

하지만 독재자 박정희의 ‘정적’이 된 이래, 끊임없이 가택연금과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어야 했던 아버지 옆에서, 맏아들인 그는 희생과 헌신의 시대적 증언자가 되었습니다. 이미 대선 직후인 1971년 11월 경희대 재학생이던 그는 이른바 ‘서울대 내란예비음모 사건'의 배후로 몰려 심한 고문을 당했습니다. 특히나 1980년 ‘5·17쿠데타’를 일으킨 전두환 신군부의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사건’으로 요한 형제가 당한 고통은 말도 다 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그는 훗날 털어놓았습니다. “전기고문, 물고문, 잠 안재우기 고문 같은 육체적 고통이 아니라, 아버지를 공산주의자, ‘간첩’이라고 고백하고 배신하라는 독재 하수인들의 강요와 압박이 가장 견디기 힘들었어요.” 천륜을 짓밟는 비인간적 독재자들에 맞서 그는 죽을 결심으로 책상에서 뛰어내려 척추를 다치면서까지 버텼습니다. 순교적 결단으로 온갖 불의와 고통을 다 이겨낸 것입니다. 그뒤 사형선고를 받은 아버지의 구명을 위해, 아픈 몸을 이끌고 불철주야 혼신을 다해 전국을 순회하던 그의 삶은 그 자체가 기도요 웅변이요, 십자가와 순례였습니다.

그러나 1990년 초부터 고문 후유증으로 파킨슨병 징후가 발견되면서 그는 수십년 병과 함께 지내야 했습니다. 1997년 마침내 아버지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감격도, 그 자신 국회의원으로 당당히 정치 무대에서 활약한 시간도 잠시였습니다. 병세가 점점 심해졌기 때문입니다. 휠체어에 의지해 아버지에게 마지막 배웅을 했던 2009년 이후 말년 10여년간은 병상에서 누워지내야 했습니다. 그 오랜 세월 동안 부인은 물론 세 딸과 그 사위들, 두 형제와 옛 보좌관들 그리고 간호사까지 가족과 지인들의 정성어린 보살핌도 감동적이었습니다. ‘연청’(민주연합청년동지회)의 동료, 후배 그리고 사제와 수도자들도 그의 치유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지난 2년간 나는 가까운 분들과 함께 정기적으로 김홍일 형제의 집을 방문해왔습니다. 말은 하지 못하지만 형제의 맑은 눈빛을 보면서 성가를 부르고 성체를 올렸습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엄혹했던 시절을 함께 회상했고 그의 치유를 위해 하느님께 정성껏 기도 드렸습니다. 우리는 그가 바로 우리 시대를 고발하는 예언자였고 또한 더 아름다운 미래를 위한 희생과 봉헌의 실천자임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김홍일 형제가 선종한 날은 예수님 부활축일 바로 전 날이었습니다. 부활을 앞당긴 상징의 날이다. 장례미사를 집전하면서 나는 형제의 이 아픔과 고통이 우리 시대, 우리 공동체의 자화상이라고 고백하며 바로 십자가 예수님의 희생을 가시적으로 보여준 시대적 징표이며 길잡이라고 해석했습니다.

고 김홍일 의원이 2004년 5월17일 민주당 의원들과 함께 ‘5·18국립묘지’를 참배하고 있다. 연합뉴스
고 김홍일 의원은 지난 4월23일 광주 망월동 ‘5·18’ 구묘역에 잠들었다. 사진 김홍걸 민화협 대표상임의장 트위터.
민주정부의 지난 15여년을 되돌아보면서 독재자들의 잔인했던 그 폭력의 시대, 야만의 시기를 제대로 잘 청산했는지 진지하게 성찰해봅니다. 물리적 폭력을 넘어 더 교묘해진 거짓과 언어의 부패를 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꾸짖으신 철부지들과 같았던 무지한 언행의 주역들(루카 7장 31절 이하)이 지금도 여전히 우리를 괴롭히며 우리 모두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지난 46년간 김홍일 형제를 지켜봐 왔기에, 나는 그의 초지일관의 삶을 확인하며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제는 그가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고 우리 민족을 위한 천상의 전달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또한 그를 아끼고 사랑했던 모든 이들 특히 사랑하는 동지들을 기억하며 기도합니다. 그를 기리며 민주주의의 실현과 남북의 화해와 평화공존을 위해서도 기도합니다. 2000년 6월15일을 생애 가장 행복한 날이라고 고백했던 김홍일 형제처럼, 남북 8천만 겨레 모두 함께 그 기쁨을 더 빨리 맞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느님, 김홍일 형제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그리고 남북의 평화 공존을 실현해주소서. 김홍일 형제와 동지들의 간절한 염원과 기도를 들어 허락하소서. 아멘.

함세웅 신부/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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