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12.08 23:02
수정 : 2019.12.09 02:34
|
2005년 11월29일 서울 신라호텔에서 김영주(가운데) 토지문화재단 이사장이 모친 박경리(맨 오른쪽·2008년 작고) 선생의 팔순 잔치를 열어 남편 김지하(맨 왼쪽) 시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기념 케익을 자르고 있다. 사진 토지문화재단 제공
|
[가신이의 발자취] 김영주 토지문화재단 이사장을 기리며
|
2005년 11월29일 서울 신라호텔에서 김영주(가운데) 토지문화재단 이사장이 모친 박경리(맨 오른쪽·2008년 작고) 선생의 팔순 잔치를 열어 남편 김지하(맨 왼쪽) 시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기념 케익을 자르고 있다. 사진 토지문화재단 제공
|
지난달 25일 김영주 토지문화재단 이사장님의 소식을 듣고 서둘러 빈소로 달려갔지만 믿기지가 않았다. 1993년께 서울에서 문막 산골로 들어와 정착한 이래 같은 원주 사람으로 인연을 맺어왔다. 한때는 토지문화관 자문위원을 맡기도 했다. 향년 73. 투병 중인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서둘러 떠나실 줄 몰랐기에 내내 먹먹했다.
연세대에서 사학과 한국미술사를 전공한 고인을 나는 ‘김영주 선생님’으로 모셨다. 1980년대 도서관에서 만난 한권의 책 <조선시대 불화연구>(1986년)을 읽고부터 미술사 배움의 스승이었다. ‘신기론으로 본 한국미술사’ ‘한국불교미술사’ 등을 책으로 나오기 훨씬 이전 1970년대 후반 논문으로 읽으며 공부했다. 대학시절 탈춤을 배우며 우리의 원형문화에서 신성한 힘을 재발견하고 신명을 미의식으로 추구했던 내게 선생님은 깊은 공감과 깨우침을 준 ‘우리 미학 사상가’이다.
1970년대 ‘신기론’으로 불화 연구로 석사
‘조선미학 원류는 샤머니즘·신선사상’
논문 읽으며 한국 미의식 ‘신명’ 깨우쳐
한국미술의 거대한 산맥 앞에서 수십년 숙제를 풀지 못했던 내게 선생님은 샤만이즘과 신선사상까지, 최한기의 기학과 그리고 동학사상에서 조선의 미학사상의 원류가 있음을 밝혀 주었다. 서구미학이나 미술사 양식론으로 한국미술사를 해석하기를 거부하고 조선의 미학사상이라 할 ‘신기론’으로 풀어내셨다. 선생님에 의해 조선의 미학사상의 핵심이 드러난 것이다. 요즘들어 한국 현대미술의 키워드로 ‘샤만리얼리즘’ 같은 신조어도 나오고 있지만, 선생님은 서구 미학에 의존하지 않고 한 세대를 앞서 조선 불화를 직시했다. ‘신기론’에서는 비로소 한국 미학의 뿌리를 찾아냈다. 예술 미학과 미술 실기의 부적응성으로 늘 답답했던 내게 이 책들은 고맙고 반가운 선물이었다. 특히 ‘신기론’은 남북한이 함께 연구해야 할 과제이자, 세계로 뻗어가는 한류가 더 공부해야 할 자산이다.
‘조선 민중예술의 뿌리에는 더욱 선명하면서도 원초적인 강한 생명의 사상이 있으며 우리 예술에서 강한 힘이 되고 있다’, ‘동양에서는 예술이라고 부르지 않고 예도(藝道)라 불렀다’, ‘신기(神氣)라 하면 단순한 생명 활동이 아닌 생명 안에서 나타나는 신령함이고 신명(神明)함이다’, ‘우리 고대 문화예술의 뿌리는 샤머니즘에 있고, 풍류도·신선 사상이 미적 사유의 바탕이다’, ‘삶의 도로써 예도를 추구함은 결코 머물지 않는 부단히 떠남·버림·비움의 자세이다. 여기에 한국예술의 위대한 예술성이, 빼어나고 신묘함의 세계를 창조하는 힘의 원천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박경리·김영주·김지하. 나는 우리 문화의 뿌리와 민예 사상에 밝은 창조적 예술인이 세 분이나 있는 것은 ‘원주의 복’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해왔다. 하지만 워낙 거인들이어서 감히 함께 언급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다만, 김영주 선생님의 부재가 한국미술사학과 지역문화의 큰 손실임을 새삼 깨닫는다.
|
1970년대 서울 정릉 자택에서 함께 한 박경리 선생, 김영주 이사장, 김지하 시인. 사진 토지문화재단 제공
|
1998년 토지문화관이 문을 열면서 더불어 행복했던 추억도 새삼 밀려온다. 자타공인하듯 토지문화관은 한국 문화계에서 보기 드문 곳이다. 박경리 선생님은 감옥에 간 사위와 10여년 옥바리지에 힘겨운 외동딸을 대신해 손주들을 보살피고자 1980년 원주로 아예 이주했다. 단구동의 집에서 대하소설 <토지>(5부 16권) 대장정을 마쳤다. 그 수익을 쾌척해 토지문학공원, 토지문화관을 만들었고, 지금껏 마르지 않는 샘처럼 문화의 향기를 풍기고 있다. 그러나 20여년 이런 기반을 다져온 김영주 선생님의 노고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어머니는 딸이 전공인 미술사 연구를 미뤄두고 토지문화관에 헌신한 것을 못내 안타까워했다. 박경리 문학의 힘을 바탕으로 토지문화관과 원주를 한국문화의 명소로 가꿔온 선생님의 공로를 기억하고 싶다.
|
2018년 5월 경남 통영에서 열린 박경리 선생 추모제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는 김영주 토지문화재단 이사장. 사진 토지문화재단 제공
|
언젠가 박경리 선생님의 초대로 토지문화관에 머물렀던 박완서 선생님의 말씀이 떠오른다. 서울로 돌아가는 터미널까지 내 차로 모셨을 때였다. “원주에는 한국에서 제일 센 문인 두 분이 계신다.” 김영주 선생님의 삶은 그 두 분을 모시고, 현대사의 신산고초를 온몸으로 견디면서 자존 높은 문화 가계를 지켜온 대모의 일생이었다. 굽이굽이 역경을 견뎌온 선생님의 한 살림을 그 누가 온전히 이해하고 뉘라서 짐작이나 하리오.
김영주 선생님, 이젠 장성한 두 아들이 유지를 받들어 토지문화관을 잘 운영할 겁니다. 누구보다 상심한 김지하 시인도 잘 모실 겁니다. 부디 편히 쉬소소. 고난의 초인이신 어머니, 김영주 선생님의 명복을 빕니다.
김봉준/화가·신화미술관장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