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옛적에 벌레가 한 마리 살았다. 벌레는 매일 멋진 옷을 차려입어서 주변의 부러움을 샀다. 온종일 자신의 옷매무새를 칭찬하는 목소리에 둘러싸인 나머지, 벌레는 어느덧 자신이 벌레라는 사실조차 잊어버렸다. 뭔가 자기가 특별한 존재라고 여기게 되었다는 뜻이다. 그래도 벌레는 어쩔 수 없이 하루에도 몇 번씩 자신의 보잘 것 없음을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자기가 아무리 위대하게 보인다 해도, 여전히 똥오줌은 싸야했기 때문이다.
철학자 마크 롤랜즈가 <철학자와 달리기>라는 책에서 들려주는 이야기다. 제아무리 잘났다 해도, 우리 모두에게는 추하고 약하며 어리석은 모습이 있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는 여기서 한발 더 나가 이렇게 말한다. “잡아먹는 자의 즐거움과 잡아 먹히는 자의 고통을 견주어 보라. 세상에는 즐거움보다 고통이 훨씬 더 크고 많다.” 세상에는 어려움과 슬픔이 즐거움과 기쁨보다 훨씬 많다. 나아가 우리는 약점 많고 어리석으며 결국은 병들어 죽을 운명이다. 적지 않은 철학자들이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일깨워주려 애를 썼다. 왜 그럴까?
‘파테이 마토스(pathei mathos)’란 ‘고통에서 배운다’라는 뜻이다. 쇼펜하우어는 사람들을 ‘고통의 동지들’이라고 부른다. 잘나고 멋진 사람들은 질투와 시기에 시달리곤 한다. 하지만 그들에게도 슬픔과 극복 못할 상처가 있다. 이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는 어떨까? 미움이 연민과 공감으로 바뀌게 될 테다. 나아가 모든 게 잘 풀리며 항상 앞서갈 때, 내 마음은 자만심과 교만으로 가득 차기 쉽다. 이럴 때 인생은 우리에게 별 깨달음을 안겨 주지 않는다.
반면, 경쟁에서 밀려나 나락으로 떨어졌을 때는 어떨까? 비로소 나와 똑같은 아픔을 겪는 다른 사람의 마음이 헤아려질 터다. 사실, 우리는 모두 제각각 겪어야 할 어려움을 넘으며 나름의 인생길을 헤쳐나간다. 인생살이가 나에게만 힘든 것이 아니며, 나만 나약하고 별 볼 일 없는 존재가 아님을 깨달았을 때, 경쟁자이며 적으로 여겨졌던 이들 모두는 ‘고통의 동지들’로 거듭난다.
그런데도 세상은 언제나 잘나고 멋진 이들로 가득한 듯싶다. SNS에서는 언제나 자랑거리들로 넘쳐나지 않던가. 그들을 바라보는 내 마음은 부러움과 경쟁심으로 초조해진다. 이런 감정에 휘둘리다 보면 내 정신은 못나고 추해진다. 하지만 세상에 널린, 외롭고 약하며 병든 모습들을 애써 찾아 바라볼 때는 내 영혼에서 공감과 연민, 따뜻함이 피어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교실에서 아이들에게 세상의 어떤 모습을 보게 해야 할까? 어느 시대나 승자는 적고 패자는 많다. 고통은 세상 곳곳에서 널려 있다. 보려 하지 않아서 보이지 않을 뿐이다. 학생들에게 세상의 고통을 섬세하게 짚어내며 공감하는 능력을 키워줘야 하지 않을까? 화려한 볼거리들이 점점 늘어나는 요즘이다. 이럴수록 파테이 마토스, ‘고통에서 배운다’라는 말의 의미를 곱씹어보아야 한다.
안광복 중동고 철학교사·인문철학재단 타우마제인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