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케로는 우정을 인간관계의 이상형으로 봤다. 기원전 63년 고대 로마의 원로원에서 키케로가 연설을 하고 있는 장면.
<김용석의 고전으로 철학하기>
키케로의 <우정론>
어느 날, 절친한 친구가 중한 범죄를 저지르고 경찰에 쫓기다가 내게 찾아와 숨겨달라고 부탁한다. 어떻게 할 것인가? 또 다른 친구는 내게 국가 반란 음모에 가담할 것을 간청한다. 나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정치적 동지였으나 어떤 계기로 각기 다른 정치 세력으로 나누어 섰을 때, 친구와의 관계를 어떻게 정리해야 하는가? 나 자신을 위해서라면 결코 명예롭지 못한 일이지만, 친구를 위해서라면 그럴 가치도 없는 자에게 간청하고 애원하는 것이 옳은 일인가?
로마 공화정 때 정치인이자 뛰어난 문필가였던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가 기원 전 44년에 쓴 <우정론>에는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이 있다. 물론 우정의 문제들에 대해 답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키케로도 우정에 관한 담론을 시작하면서, 호민관 술피키우스와 집정관 폼페이우스가 서로 가장 아끼던 친구였지만 어느 날 불구대천의 원수가 된 것을 보고 모두들 놀라고 안타까워했다는 일화를 먼저 예로 든다. 그만큼 진정한 우정은 어렵다는 것이다. 이는 “전 역사를 통해 우정의 범례로서 지속적으로 기억되는 친구들은 기껏해야 서너 쌍밖에 안 되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키케로는 “먼저 우정은 선한 사람들 사이에서만 가능하다”고 전제한다. 그가 여기서 ‘선한 사람’이라고 정의하는 것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일상 생활의 경험에서 알 수 있는 것이다. 일상의 행동에서 “성실과 정직 그리고 공정성과 아량을 보여주는 사람들, 탐욕과 방종 그리고 파렴치한 행위와는 거리가 먼 사람들, 굳건하게 소신을 지킬 줄 아는 사람들”을 주로 의미한다. 이런 미덕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 우정이 싹트는 것이다. “미덕이 우정을 낳고 지켜주니, 미덕 없이 우정은 어떤 경우에도 존속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해관계 때문에 맺어진 인간관계는 우정이라고 할 수 없다. 물론 우정은 친구 사이에서 서로 많은 이익을 가져다 주지만, 그렇다고 우의가 이익을 바라는 마음에서 시작되는 것은 아니다. 미덕을 갖춘 사람은 그만큼 다른 사람의 미덕을 볼 줄 알고 그것에 끌리는 법이다. <우정론>에 화자로 등장하는 라일리우스와 그의 평생지기 스키피오의 우정도 서로 필요해서 시작된 게 아니다. 서로의 미덕을 찬탄한 까닭에 서로 좋아했고 서로를 더 잘 알게 될수록 우의도 깊어갔다. 이익은 그에 따라온 것이다.
그러면 미덕과 선행을 전제로 할 때, 친구를 위하여 어느 정도까지 해주어야 하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키케로는 우정의 제1법칙으로서 “도의에 어긋나는 것은 요구해서도 안 되고, 요구받더라도 들어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한다. 다시 말해, 친구에게 옳지 못한 것은 요구하지 말아야 하며, 친구에게는 옳은 것만 행해야 하고 이 때에는 굳이 친구가 간청하지 않더라도 먼저 나서서 해야 한다. 그러므로 친구를 위해서 죄를 범했다는 것은 변명이 될 수 없다. “불한당들 사이의 의리와 협력은 우정이란 미명으로 비호돼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키케로도 설명하듯이, 라틴어로 우정(amicitia)과 사랑(amor)은 모두 사랑하다(amare)라는 말에서 유래한다. 그것은 매우 감성적인 것이다. 우정이라는 말도 ‘정(情)’의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런데 키케로는 친구를 선택하고 우정을 유지하는 데 있어서 지혜로운 판단을 중요시한다. 다시 말해, 높은 수준의 이성적 능력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래서 친구 사이에서는 “사랑하고 나서 판단하지 말고, 판단하고 나서 사랑하라”고 가르친다. 이 말은 사랑과 우정을 구분하는 핵심이다. 여기서 우리는 ‘우정은 사랑의 윤리적 형태’라는 정의를 끌어낼 수 있다. 다시 말해, 우정은 감성과 이성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윤리적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감성과 이성의 완벽한 조화, 그것은 인간관계의 이상형이다. 키케로는 우정에서 인간관계의 최고 이상형을 본 것이다. 그래서 진정한 우정을 이룬 사람들은 역사에서 몇 쌍 되지 않는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우정이야말로 더불어 사는 공동체의 선하고 복된 삶을 위해서 지향해야 할 인간의 과제라는 것이다. 키케로는 우정을 논하면서, 사실 그의 인생관과 세계관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영산대 교수 anemos@ysu.ac.kr
키케로도 설명하듯이, 라틴어로 우정(amicitia)과 사랑(amor)은 모두 사랑하다(amare)라는 말에서 유래한다. 그것은 매우 감성적인 것이다. 우정이라는 말도 ‘정(情)’의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런데 키케로는 친구를 선택하고 우정을 유지하는 데 있어서 지혜로운 판단을 중요시한다. 다시 말해, 높은 수준의 이성적 능력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래서 친구 사이에서는 “사랑하고 나서 판단하지 말고, 판단하고 나서 사랑하라”고 가르친다. 이 말은 사랑과 우정을 구분하는 핵심이다. 여기서 우리는 ‘우정은 사랑의 윤리적 형태’라는 정의를 끌어낼 수 있다. 다시 말해, 우정은 감성과 이성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윤리적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감성과 이성의 완벽한 조화, 그것은 인간관계의 이상형이다. 키케로는 우정에서 인간관계의 최고 이상형을 본 것이다. 그래서 진정한 우정을 이룬 사람들은 역사에서 몇 쌍 되지 않는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우정이야말로 더불어 사는 공동체의 선하고 복된 삶을 위해서 지향해야 할 인간의 과제라는 것이다. 키케로는 우정을 논하면서, 사실 그의 인생관과 세계관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영산대 교수 anemos@ys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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