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판 위에 서 있는 파우스트(오른쪽)와 메피스토텔레스(왼쪽).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파우스트>에 실린 아우구스트 폰 크렐링의 삽화.
문학 속 철학산책
<파우스트>를 통해서 본 구원의 의미(2) 괴테(1749~1832)는 25살 때 최초 형태의 <파우스트>를 완성했으나, 그 뒤 오랜 수정과 보충을 거쳐 1808년에 <파우스트> 1부를 발표했다. 그런데 2부는 76살이나 되어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해 죽음을 불과 반년가량 앞둔 1831년 8월 중순에야 마쳤다. 그래서인지 1부와 2부는 여러 면에서 상당히 다르다. 우선 작품의 성격부터 그렇다. 1부에서 보여준 파우스트와 그레트헨의 사랑이야기는 “질풍노도”를 일으켰던 당시 낭만주의 작가들이 좋아할 만한 종류의 사실적 ‘가정극’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2부는 시간적으로 약 3000년을 망라하고 공간적으로 현실세계뿐만 아니라 환상의 세계, 지하세계, 천상세계까지를 아우르며 전개되는 일종의 ‘환상극’이다. 2부에서, 파우스트는 메피스토펠레스의 도움을 받아 트로이 전쟁의 불씨가 되었던 그리스의 미녀 헬레나를 지하세계에서 불러내어 결혼하고 아들도 낳는다. 전쟁에 참가하여 승리하고, 황제로부터 거대한 땅을 하사받아 간척사업도 벌인다. 그런 가운데 그리스·로마신화에 등장하는 각종 여신들과 요정들, 예언자들, 마녀들, 그리고 괴물들이 나오고, 탈레스와 아낙사고라스와 같은 그리스 자연철학자들과 성서에 나오는 히브리 여인들까지 등장한다. 한마디로, 괴테는 서양문명을 상징하는 주요 캐릭터들을 시간과 공간의 구애 없이 총동원하여 한편의 흥미롭고 광대한 판타지를 구성한 것이다. 변하지 않은 것은 오직 주인공의 성격뿐이다! 파우스트는 여전히 자신의 욕망에만 충실하며 한 가닥의 도덕의식조차 갖고 있지 않다. 1부에서와 마찬가지로 여인을 탐하고 살인도 저지른다. 신은 그를 “나의 종”이라고 불렀지만 그는 단 한번도 신을 섬기지 않았다. 때문에 극의 마지막에서 그의 영혼을 천국으로 데려가려는 천사들의 합창이-물론 감격스럽긴 하지만- 왠지 어색하고 황당하게 들린다. 차라리 메피스토펠레스가 내기에서 이기고 파우스트가 지옥으로 끌려간다면 이야기는 더 설득력이 있었을 성싶다. 그렇다면 괴테는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악마의 손아귀에서 파우스트를 구해낼 수 있었을까? 해답은 괴테 자신에 의해 이미 주어져 있다. 엑커만이 쓴 <괴테와의 대화> 1831년 6월6일자에 보면, 괴테는 “누구든 줄곧 노력하며 애쓰는 이를 / 우리는 구원할 수 있습니다.”라는 천사들의 합창 속에 “파우스트의 구원에 대한 열쇠가 숨겨져 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파우스트가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는 노력하거나 애쓴 일이 전혀 없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이 말이 진정 뜻하는 바가 무엇일까? 아무 것을 위해서나 그저 노력하고 애쓰기만 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일까? 아니면 다른 어떤 뜻이 담겨 있을까? 이에 대한 대답은 오직 파우스트가 노력하고 애썼던 일이 무엇인가를 살펴봄으로써만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살펴보자! 파우스트는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었지만 이성보다는 욕망, 도덕보다는 쾌락을 좇아 그야말로 “폭풍같이” 살았다. 죽음을 앞두고 “자유로운 땅에서 자유로운 백성과 더불어 살고 싶다.”라고 외치기 때문에, 그가 자유와 평등이 넘치는 계몽주의적 민주사회를 꿈꾼 것같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오해다. 이러한 구절들에서 괴테가 당시 이웃나라 프랑스에서 일어난 ‘대혁명’의 영향을 받은 냄새를 잠시 맡을 수는 있지만, 어쨌든 그것은 파우스트라는 인물의 성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파우스트는 도덕을 초월한 개인주의자이며 반사회적 인물이기 때문이다.
파우스트가 애초에 메피스토펠레스와 계약을 한 것도 어떤 사회적 이상을 이루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단지 개인적 욕망과 쾌락을 성취하기 위해서였다. 실제로 그는 민중을 경멸하고 독재적이며 이기적이다. 예를 들어 “나는 몇 백만 명의 백성을 위해 토지를 개척”하였다고 외치지만, 토지는 여전히 그의 소유이고 일꾼들은 강제로 징발되었다. 간척사업에는 “제물의 피도 틀림없이 흘렸을 것”이고 “밤중에는 고통스러운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지만 파우스트는 마치 봉건군주나 자본주의 엘리트 기업가처럼 자기만족에 차서 “쟁기와 괭이를 써라. / 지시한 것을 곧 해치워라. / (…) / 최대의 사업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 수천의 손을 부리는 하나의 정신으로 충분하리라.”라고 외친다. 그는 계몽주의적 민주사회를 위해 노력하거나 애썼던 인물은 결코 아니다. 그렇다면 파우스트가 진정 노력하고 애썼던 일이란 과연 무엇일까? 결론만 말하자면, 그것은 낭만주의적 ‘자기실현’이었다. 파우스트는 오직 이 목표 하나만을 바라보고 숱한 죄악과 슬픔 그리고 절망을 견디면서 “다시 희망을 품고 폭풍같이” 살았다. 돌이켜 보자! 그는 학문을 위해 평생을 다 보낸 어느 날에서야, 자기 안에서 외치는 진정한 내면의 소리를 들었다. 그 다음에는 오직 그것의 실현을 위해 무슨 짓이든 다 했다. 악마에게 영혼을 파는 일도 주저하지 않고 살인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 누구도, 그 무엇도 그를 말릴 수 없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무엇 때문에 영원 속에서 헤맬 필요가 있을까! / 자기가 인식하는 모든 것은 다 이룰 수 있다. / 그런 식으로 지상의 날들을 보내라.”라고 외치며 자기실현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자신의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소리를 듣고 그것을 실현하는 일! 바로 이것이 독일 낭만주의의 이상이자 목표였다. 낭만주의자들에 있어 자기실현이란 단순한 자아의 완성이 아니라 진리의 구현이자 구원의 길이기도 했다. 신학자 틸리히가 “자기 자신으로서 존재하려는 용기”라고 표현한 이 무분별한 열정, 이 무참한 용기에 의해 파우스트는 구원받았다. 1부에서 그레트헨이 “무한한 자기체념”을 통해 받은 ‘종교적’ 구원에 비해 ‘세속적’이라고 비난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적어도 괴테의 <파우스트>에서는 그렇다!
김용규/자유저술가, <도덕을 위한 철학 통조림> 저자
<파우스트>를 통해서 본 구원의 의미(2) 괴테(1749~1832)는 25살 때 최초 형태의 <파우스트>를 완성했으나, 그 뒤 오랜 수정과 보충을 거쳐 1808년에 <파우스트> 1부를 발표했다. 그런데 2부는 76살이나 되어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해 죽음을 불과 반년가량 앞둔 1831년 8월 중순에야 마쳤다. 그래서인지 1부와 2부는 여러 면에서 상당히 다르다. 우선 작품의 성격부터 그렇다. 1부에서 보여준 파우스트와 그레트헨의 사랑이야기는 “질풍노도”를 일으켰던 당시 낭만주의 작가들이 좋아할 만한 종류의 사실적 ‘가정극’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2부는 시간적으로 약 3000년을 망라하고 공간적으로 현실세계뿐만 아니라 환상의 세계, 지하세계, 천상세계까지를 아우르며 전개되는 일종의 ‘환상극’이다. 2부에서, 파우스트는 메피스토펠레스의 도움을 받아 트로이 전쟁의 불씨가 되었던 그리스의 미녀 헬레나를 지하세계에서 불러내어 결혼하고 아들도 낳는다. 전쟁에 참가하여 승리하고, 황제로부터 거대한 땅을 하사받아 간척사업도 벌인다. 그런 가운데 그리스·로마신화에 등장하는 각종 여신들과 요정들, 예언자들, 마녀들, 그리고 괴물들이 나오고, 탈레스와 아낙사고라스와 같은 그리스 자연철학자들과 성서에 나오는 히브리 여인들까지 등장한다. 한마디로, 괴테는 서양문명을 상징하는 주요 캐릭터들을 시간과 공간의 구애 없이 총동원하여 한편의 흥미롭고 광대한 판타지를 구성한 것이다. 변하지 않은 것은 오직 주인공의 성격뿐이다! 파우스트는 여전히 자신의 욕망에만 충실하며 한 가닥의 도덕의식조차 갖고 있지 않다. 1부에서와 마찬가지로 여인을 탐하고 살인도 저지른다. 신은 그를 “나의 종”이라고 불렀지만 그는 단 한번도 신을 섬기지 않았다. 때문에 극의 마지막에서 그의 영혼을 천국으로 데려가려는 천사들의 합창이-물론 감격스럽긴 하지만- 왠지 어색하고 황당하게 들린다. 차라리 메피스토펠레스가 내기에서 이기고 파우스트가 지옥으로 끌려간다면 이야기는 더 설득력이 있었을 성싶다. 그렇다면 괴테는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악마의 손아귀에서 파우스트를 구해낼 수 있었을까? 해답은 괴테 자신에 의해 이미 주어져 있다. 엑커만이 쓴 <괴테와의 대화> 1831년 6월6일자에 보면, 괴테는 “누구든 줄곧 노력하며 애쓰는 이를 / 우리는 구원할 수 있습니다.”라는 천사들의 합창 속에 “파우스트의 구원에 대한 열쇠가 숨겨져 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파우스트가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는 노력하거나 애쓴 일이 전혀 없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이 말이 진정 뜻하는 바가 무엇일까? 아무 것을 위해서나 그저 노력하고 애쓰기만 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일까? 아니면 다른 어떤 뜻이 담겨 있을까? 이에 대한 대답은 오직 파우스트가 노력하고 애썼던 일이 무엇인가를 살펴봄으로써만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살펴보자! 파우스트는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었지만 이성보다는 욕망, 도덕보다는 쾌락을 좇아 그야말로 “폭풍같이” 살았다. 죽음을 앞두고 “자유로운 땅에서 자유로운 백성과 더불어 살고 싶다.”라고 외치기 때문에, 그가 자유와 평등이 넘치는 계몽주의적 민주사회를 꿈꾼 것같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오해다. 이러한 구절들에서 괴테가 당시 이웃나라 프랑스에서 일어난 ‘대혁명’의 영향을 받은 냄새를 잠시 맡을 수는 있지만, 어쨌든 그것은 파우스트라는 인물의 성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파우스트는 도덕을 초월한 개인주의자이며 반사회적 인물이기 때문이다.
파우스트가 애초에 메피스토펠레스와 계약을 한 것도 어떤 사회적 이상을 이루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단지 개인적 욕망과 쾌락을 성취하기 위해서였다. 실제로 그는 민중을 경멸하고 독재적이며 이기적이다. 예를 들어 “나는 몇 백만 명의 백성을 위해 토지를 개척”하였다고 외치지만, 토지는 여전히 그의 소유이고 일꾼들은 강제로 징발되었다. 간척사업에는 “제물의 피도 틀림없이 흘렸을 것”이고 “밤중에는 고통스러운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지만 파우스트는 마치 봉건군주나 자본주의 엘리트 기업가처럼 자기만족에 차서 “쟁기와 괭이를 써라. / 지시한 것을 곧 해치워라. / (…) / 최대의 사업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 수천의 손을 부리는 하나의 정신으로 충분하리라.”라고 외친다. 그는 계몽주의적 민주사회를 위해 노력하거나 애썼던 인물은 결코 아니다. 그렇다면 파우스트가 진정 노력하고 애썼던 일이란 과연 무엇일까? 결론만 말하자면, 그것은 낭만주의적 ‘자기실현’이었다. 파우스트는 오직 이 목표 하나만을 바라보고 숱한 죄악과 슬픔 그리고 절망을 견디면서 “다시 희망을 품고 폭풍같이” 살았다. 돌이켜 보자! 그는 학문을 위해 평생을 다 보낸 어느 날에서야, 자기 안에서 외치는 진정한 내면의 소리를 들었다. 그 다음에는 오직 그것의 실현을 위해 무슨 짓이든 다 했다. 악마에게 영혼을 파는 일도 주저하지 않고 살인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 누구도, 그 무엇도 그를 말릴 수 없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무엇 때문에 영원 속에서 헤맬 필요가 있을까! / 자기가 인식하는 모든 것은 다 이룰 수 있다. / 그런 식으로 지상의 날들을 보내라.”라고 외치며 자기실현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김용규/자유저술가, <도덕을 위한 철학 통조림>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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