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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교육

제 친구 소개할께요, 강아지풀·풍뎅이…

등록 2006-04-30 19:29수정 2006-05-01 17:57

자연이 키운 ‘꼬마시인’
시집 낸 9살 초등학생 김아현양

지난 23일 제주 애월읍 수산리의 한 펜션 정원. 천방지축이다.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토끼가 따로 없다. 그러더니 소나무 옆에 우두커니 서서 꽃을 피우는 부분을 만지작거린다. 한 5분 동안 그러고 있더니 어느새 옆에 있는 강아지풀에 정신을 팔고 있다. 줄기를 당겼다가 깔깔한 부분을 쓰다듬었다가 하더니 이내 줄기를 뽑아든다. 무슨 곤충이 날아가는지 갑자기 허공에 대고 손을 휘휘 젓는다.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니고 그저 초등 3학년 9살 아이답다. 대뜸 말을 던졌다. “뭘 그렇게 열심히 보고 있니?” “음~, 그냥 재미있어요. 신기하잖아요.” “뭐가 신기한데?” “잘 보세요. 꽃이 피는 거, 열매 맺는 거, 곤충이 날아다니는 거 다 신기하지 않나요.” 할 말이 없다.


물고기

무슨 말을 하려는지
뻐끔 뻐끔 뻐끔
입만 오물조물
부끄러운 말을 하려나?
아니야, 입에 물이 들어가서일 거야.
무슨 말을 하려는지 난 알고 싶어.
그 이야기를 몰래 들려 주면 안 되니?
그래도 물고기는 입만 뻐끔뻐끔.

가을나무

가을이 되면 밤송이가
이빨을 빼지
밤 이빨
나무 아저씨들은
염색을 해.
왜일까?
약속이겠지
약속

자신의 시적 감수성을 키웠다고 생각하는 애월읍 수산리의 펜션 앞 들판에서 꽃들을 관찰하고 있는 아현.
자신의 시적 감수성을 키웠다고 생각하는 애월읍 수산리의 펜션 앞 들판에서 꽃들을 관찰하고 있는 아현.

김아현(제주 한라초등학교 3학년)양은 최근 동시집 <눈을 떠 잠꾸러기야>(삼성당)를 낸 꼬마 시인이다. 하지만 ‘꼬마 시인’이라는 이름으로 울타리를 치기엔 아현이의 세상은 참 넓다. 아빠(김의근·탐라대 관광산업학과 교수)는 “하루 종일 쏘다니며 봉선화 꽃을 따서 손가락, 발가락에 물들이고, 노란색, 주황색 금잔화 꽃잎을 따서 모자이크 그림을 그리는 촌아이”라고 소개했다.

■ 자연속에서 키운 감수성
아빠 말대로 시인이라기보다는 호기심 많은 개구장이인 아현이의 동시적 감수성은 고향인 모슬포 할아버지댁과 애월읍에 있는 펜션에서 길러졌다. 모슬포에 살면서 아현이는 날마다 근처 용천수에 가서 놀았다. 치어들과 작은 게들을 잡아서 관찰하는 게 하루 일상이었다. 꽃게 수십마리를 한꺼번에 잡아 그릇에 넣고 밥풀을 주어가며 키운 적도 있다. 할아버지가 기르던 개 ‘폴’과도 엄청나게 가깝게 지냈다. “개 젖을 잡아당기고 빨아먹기까지 했으니 말 다했죠. 그래서인지 요즘 가도 폴은 아현이를 알아봐요.”(아빠)

5살 때 아현이는 애월읍에 있는 펜션으로 거처를 옮겼다. 아현이가 생각하기에 이 곳에서 지내던 4년여의 기간이 인생의 황금기(?). 할아버지가 경작하던 500평 감귤 밭에 아빠가 직접 지은 펜션에 살면서 아현이는 천혜의 제주 자연을 온 몸으로 받아들이며 즐겼다. 달아나는 도마뱀 보면 달려가서 발로 밟아 꼬리 자르고, 개미집 보면 나무로 쑤셔대 구경하고, 개똥벌레를 병에 집어넣고 며칠간이나 빛을 내는지 관찰했다. 사슴벌레, 장수풍뎅이, 하늘소, 금파리 등과도 친구 맺어 원없이 놀았다. 너무나 곤충을 좋아하자 아빠가 곤충도감을 사줬는데 얼마나 뒤적거렸는지 지금은 너덜너덜해져 있다.

아현이가 다니던 근처 물매초등학교는 그를 키운 또 하나의 요람. 교정에 있는 야자나무, 도토리나무, 감귤나무 등 온갖 나무와 이름 모를 풀과 꽃들과 날마다 대화하며 시간을 보냈다. 학년당 열댓명 안팎의 작은 학교였는데, 아현이는 지금도 수시로 이 학교로 돌아오자고 아빠, 엄마를 졸라 곤혹스럽게 만든다.

단란한 아현이네 가족. 아빠와 엄마는 “책과 자연을 스승담아 꿈을 키워가는 아현이가 대견할 뿐”이라고 말했다.
단란한 아현이네 가족. 아빠와 엄마는 “책과 자연을 스승담아 꿈을 키워가는 아현이가 대견할 뿐”이라고 말했다.

■ 책은 내 친구
아현이가 태어났을 때부터 엄마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책을 읽어줬다. 엄마는 “처음에는 별 생각없이 읽어주기만 했는데, 어느 때부터인가 책을 읽어 주기만 눈망울이 말똥말똥해지며 책에 푹 빠지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4살 무렵 엄마가 직장을 갖게 되자 아현이는 할아버지 댁에 맡겨졌다. 아빠, 엄마는 아현이가 보던 책들을 모조리 할아버지 댁에 갔다줬고 아현이는 이제 스스로 책을 보기 시작했다. “모르는 글자가 많았죠. 그런데 그냥 그림 따라 읽었어요. 가끔은 할머니한테 글자를 물어보기도 하고요.”

5살이 되면서 펜션으로 이사와 엄마, 아빠와 같이 살게 된 아현이는 본격적으로 책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밖에서 하루 종일 놀다 들어와서도 20~30권의 책을 거뜬히 읽어냈다. 밤에 잠도 안자고 책을 읽는 아현이를 보고 한편으로 걱정되기도 했지만 말릴 수는 없었다.

아현이의 다독 습관은 지금도 여전해 매일 열댓권의 책을 읽는다고 했다. 그 많은 책을 어떻게 다 사줄까 싶은데, 아빠가 “본 책을 몇번씩 반복해서 봐요. 그러다보니 겉장이 제대로 남아 있는 책이 별로 없을 정도죠.”라고 답했다.

■ 시를 쓰다
아현이가 시를 처음 쓴 것은 7살 때. 그해 가을 어느날 펜션 근처에서 밤송이가 떨어지는 것을 본 아현이는 저녁에 집에 돌아와 방바닥에 굴러다니는 종이쪽지에 뭔가를 끄적거렸다. ‘가을이 되면 밤송이가/ 이빨을 빼지/ 밤 이빨/ 나무 아저씨들은/ 염색을 해./ 왜일까?/ 약속이겠지/ 약속.’이라고 된 ‘가을 나무’였다. 시를 본 아빠, 엄마가 깜짝 놀랐음은 물론이다.

이후 아현이의 시작은 계속됐다. 물매초등학교 운동장에 널려 있던 도토리를 보고 ‘때굴때굴 도토리 삼형제’로 시작하는 ‘도토리’라는 시를 지었고, 김장 때 동네 사람들과 엄마, 아빠가 김치를 담그는 것을 보고 ‘무’라는 시를 썼다. 생각날 때마다 아무 종이에나 끄적거린 아현이의 시는 차곡차곡 쌓여가더니(아빠가 아현이 몰래 모아서 컴퓨터에 입력해 놓음) 언제부터인가는 시에 덧붙여 그림까지 그리기 시작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 아현이의 시는 소재가 다양해지고 내용이 깊어졌다. 주변의 자연에서 얻은 아이디어를 쓴 시가 여전히 많기는 했지만 우정이나 사랑, 아픔, 슬픔, 인생 등에 대해서도 시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특히 결혼 이후 좀체 다툰 적이 없던 아빠, 엄마가 어느날 소리를 지르며 싸우는 걸 보고 아현이는 일기에 ‘인생’이란 시를 써놓았다. ‘하늘도 사람이 걸어선 못 올라가지./ 인생도 완전한 끝까지는 못 가는 거야.’로 시작되는 이 시를 나중에 본 아빠와 엄마는 이후론 절대로 절대로 싸우지 않았다고 했다.

그런데 아현이가 시라는 것을 알고 썼던 걸까? 대답이 걸작이다. “생각이 있어야 시를 쓰죠.” 그럼 평소에 시집을 많이 보고 거기서 배우는 걸까? “아뇨. 잘 안봐요. 가끔 어린이시집을 보기는 하지만 잘쓴 시를 보면 내가 베껴쓸까봐 걱정돼요.”

시를 쓰면 마음이 뿌듯해진다는 아현이, 옛날에 본 기억이나 최근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면 제목이 떠오르고 그러면 금방 시가 써진다고 하는 아현이가 요즘엔 시 말고 동화도 쓰고 있다. 처음엔 구성이 엉성했는데 요즘은 읽을만하다는 게 엄마, 아빠의 전언. 그러나 아현이의 꿈은 시인도 소설가도 아닌 곤충학자나 만화가란다. 박창섭 기자 coo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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