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들이 학원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고 있다. 교육전문가들은 과도한 학원 숙제가 성적 향상에 되레 역효과를 낼 수 있다고 지적한다. 김종수 기자 jongsoo@hani.co.kr
숙제하는 데 평균 2~3시간 밤늦게 까지 해대기 일쑤
학교 수업집중도 떨어져 고학년 올라갈수록
“숙제,성적향상 도움안돼”
학교 수업집중도 떨어져 고학년 올라갈수록
“숙제,성적향상 도움안돼”
김정선(가명·12·초등6)양은 올해로 10년째 수학 학원을 다니고 있다. 매일같이 다니는 학원에서는 숙제를 꼬박꼬박 내준다. 숙제는 주로 문제 풀이. 20쪽이 넘는 문제집을 풀어야 한다. 그러다 보면 2시간이 훌쩍 지나간다. 숙제를 마치고 잠자리에 드는 시간은 대략 밤 12시. 김양은 언제부터인가 학원 문제집만 보면 속이 매스껍고 토할 것 같다. 문제를 들여다보는 순간 머리가 멍해지기도 한다.
“잠 한번 실컷 자보는 게 소원” 학교 끝나기가 무섭게 학원 뺑뺑이를 도는 게 대다수 대한민국 청소년들의 일과로 굳어진지 오래다. 적게는 두세 개에서 많게는 네다섯 개까지의 학원을 전전한다. 거기에 과외, 학습지까지 더해진다. 사교육을 받지 않으면 중간·기말고사, 수행평가, 특목고 입학, 대학 입학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할 수 없다는 인식에 대부분의 학생들과 부모들이 암묵적 동의를 하고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런데 사교육에서 내주는 엄청난 양의 숙제가 아이들에게 또 하나의 엄청난 짐을 지우고 있다. 학원 숙제를 하는데 평균 2~3시간을 쓰는 아이들이 많고, 일부 학생들은 4시간 넘게 학원 숙제를 한다. 이 때문에 자신이 하고 싶은 공부를 하거나, 취미활동을 하거나, 책을 읽는 일 등은 엄두도 못낸다.
실제 <한겨레>가 서울 강남과 목동 지역 3개 초등학교 학생 94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해본 결과, 한명도 빠짐없이 학원에 다녔으며, 하루 평균 학원 숙제를 하는데 쓰는 시간이 2~3시간이라고 대답한 학생이 27명(29%)로 가장 많았다. 1~2시간(14명,15%), 3~4시간(10명, 11%) 등이 뒤를 이었다. 4시간 이상이라고 응답한 학생도 10명(11%)이나 됐다.
학원 숙제 내용은 영어와 수학이 가장 많았지만, 논술, 예능, 과학, 체육 등 숙제도 적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영어의 경우 문법, 독해, 단어 외우기는 물론이고, 에세이 작성도 있었다. 논술 열풍에 따라 책 읽고 정리하기 숙제가 많다는 대답도 꽤 있었다.
지난 4월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서울지부가 서울 초등학교 4~6학년 4392명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 학교 수업 뒤 학원에 가거나 과외 공부를 한다는 어린이가 86.9%에 이르렀고, 학원·과외 공부 시간은 하루 2시간(17.8%)~3시간(13.8%)이 가장 많았다. 4시간30분이 넘는다는 아이들도 8.5%(352명)나 됐다.
이렇게 많은 시간을 학원 및 학원 숙제에 투자하다 보니, 학생들은 밤 늦게까지 잠자리에 들지 못하고 숙제하는 일이 잦다. 서울 목동에 있는 한 초등학교에 다니는 이정현(가명·12·초6)양은 “학교 끝나고 3시쯤 학원에 가면 저녁 9시쯤 집에 들어온다. 그리고 나서 씻고 숙제를 하다 보면 금세 자정이 되기 일쑤”라고 말했다. 초등학교 5학년 김재진(11)군은 “아침에 7시30분에 일어나면 곧바로 수학 학습지를 풀고 저녁에는 영어학원에서 내준 단어를 외우거나 문장을 해석하는 숙제를 한다”며 “하루에 학원 숙제 하는 시간이 못해도 2시간은 되는 것 같다”고 했다.
밤새 못 마친 학원 숙제는 학교로까지 이어진다. 쉬는 시간이나 점심 시간 등에 학원 문제집을 내놓고 푸는 것이다. 강남의 한 초등학교 박아무개 교사는 “수업 시간에 학원 교재로 숙제를 꺼내 놓고 몰래 숙제를 하는 아이들이 적지 않게 발견된다”며 “학원 공부에만 매달리다 보니 수업 집중도가 더욱 떨어진다”고 전했다. 학부모 정미연(43)씨는 “○○○수학, ◇◇◇◇영재교실 등 이른바 뜨는 학원일수록 숙제를 아주 어렵게 내기 때문에 많은 시간을 들이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이렇게까지 학원 숙제에 얽매이는 이유는 뭘까. 많은 학원들이 숙제를 안해올 경우 체벌을 주기 때문이다. 박희연(가명·12·초등6)양은 “숙제 안해 오면 시험을 보고 거기서 틀린 문제는 오답노트까지 쓰도록 한 뒤 집에 돌려보낸다. 어떤 강사들은 때리기도 한다”고 말했다. 물론 학원 쪽의 이런 조치에 학부모들은 항의를 하지 않는다. 오히려 공부 잘 시키고 있다며 좋아한다.
이처럼 과중한 학원 숙제는 아이들에게 큰 시간적·정신적 부담을 줄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을 제대로 하는데도 큰 장애요인으로 작용한다. <한겨레> 조사 결과 숙제가 자신의 생활에 장애가 된다는 응답이 72%에 이르렀다. 숙제 때문에 포기하는 일들로는 잠, 취미활동, 독서, 하고 싶은 공부 등을 꼽았다. 목동의 한 초등학교에 다니는 오아무개(8·2학년)양은 “보통 하루 4시간 숙제를 하는데 잠 한번 실컷 자보는 게 소원”이라고 했다.
효과는 있을까? 그렇다면 이렇게 많은 시간을 학원과 학원 숙제에 투입하는 만큼 효과를 거두고 있을까? 곧 성적이 올라갔을까? 설문조사를 해본 결과, 초등학생 대다수는 숙제가 성적 향상에 도움이 된다(83%)고 보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고교생들의 반응은 달랐다. 서울시내 한 고등학교 38명에게 물었더니, 89%(34명)가 숙제가 성적 향상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교사 등 교육전문가들은 대체로 숙제와 성적 사이에는 상관관계가 적다는 의견이었다. 서울 신목초등학교 윤근혁 교사는 “아이들이 자발적으로 원해서 학원에 가는 경우는 드물다. 그러다보니 숙제도 마지 못해 형식적으로 하는 경우가 많다. 성적이 오를 리 없다”고 했다. 한국교육개발원 김양분 연구원은 “학업성취도에 미치는 요인들을 분석할 때 숙제를 빼놓는데, 이는 숙제와 성적 사이에 특별히 상관관계가 있다고 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우리와 교육 여건은 조금 다르지만 외국에서도 ‘숙제의 무용성’을 주장하는 연구보고서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지난 봄 미국 듀크대학 해리스 쿠퍼 교수는 “연구를 해보니 학업 성취도와 숙제 사이엔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었다”고 발표했다. 쿠퍼 교수는 “수십 차례 연구 결과 중·고교에서 약간의 숙제는 시험 성적을 올려 주었다. 하지만 중학생이 매일 60~90분, 고등학생이 2시간 이상 숙제할 경우 성적은 되레 떨어졌다”며 “너무 많은 숙제는 역효과를 낼 수 있다”고 지적했다. <숙제의 허상>이란 책을 펴낸 앨피 콘도 “초등학생들이 숙제를 통해 학습 이득을 얻을 수 있다는 어떤 증거도 없다”며 “아이들이 숙제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몸과 마음을 발전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나라별 사정을 견줘 봐도 숙제와 성적 간에는 긴밀한 관계가 있어 보이지 않는다. 미국을 기준으로 봤을 때 일본과 덴마크, 체코 학생들은 미국보다 공부를 잘 하지만 숙제는 더 적다. 반면 미국보다 공부를 못하는 그리스, 태국, 이란 등의 학생들은 산더미 같은 숙제에 시달리고 있다.
교육학자들은 숙제가 공부 습관과 시간 관리 능력을 길러주는 점은 인정한다. 하지만 자발적이지 않고 양으로만 승부하는 숙제에 집착하는 것이 아이들의 공부에 대한 흥미와 호기심을 아예 없애버릴 수도 있다고 경고한다.
필요한 학원만 선택 학교수업 집중하고 자기주도 학습해야
숙제는 어느 정도가 적당할까? 전문가들은 1시간 이상 걸리는 숙제는 피하라고 조언한다. 그날 배운 부분에 대해 복습하고 다음날 배운 부분을 맛보는 정도에서 그치는 게 좋다고 말한다.
오스트레일리아 퀸즐랜드주는 공립학교 학생들의 숙제 시간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만들어 운용하고 있다. 가이드라인을 보면, 주당 숙제 시간을 초등학교 1~3학년은 1시간, 4~5학년은 2~3시간, 6학년과 7학년은 4시간, 8~9학년은 최대 5시간으로 제한하도록 권고하고 있다. 주정부 교육부는 “어린 학생들에게는 책을 읽어주거나 다양한 활동을 하도록 격려해 주는 것이 중요하고, 고학년 학생들은 숙제, 텔레비전 시청, 스포츠 활동 등을 균형있게 할 필요가 있다”는 입장이다. 서울시내 3개 초등학교를 대상으로 한 <한겨레> 조사에서는 적절한 숙제 시간으로 ‘30분 이하’를 꼽은 아이들이 61%로 가장 많았다.
과다한 학원 숙제를 줄이기 위해서는 아이와 대화를 통해 꼭 필요한 학원을 빼고 정리하는 게 낫다. 대신 학교 공부를 복습하고 집이나 독서실에서 자기 계획에 맞춰 주도적으로 공부를 하는 게 더 효과적이다. 대구 용계초등학교 정여름 교사는 “학원에서 선행학습을 하는 아이들보다 학원을 안 다니지만 수업시간에 딴 짓 안 하고 집중하는 아이들이 성적이 더 좋게 나온다”며 “자기 스스로 공부하는 습관을 들이는 게 학원 숙제 많이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영어학원 하나만 다니면서도 성적은 최상위권을 유지하고 있는 김서로(12·6학년)양도 “학원 공부에 지쳐서 학교 공부까지 놓치는 것보다는, 수업 시간에 열심히 듣고 집에 와서 자기 수준에 맞게 참고서나 문제집 등으로 공부하는 게 더 도움이 된다”고 했다.
박창섭 기자 cool@hani.co.kr
초등학교 4학년인 한 어린이가 1일 밤 늦게 영어학원 숙제를 하고 있다. 학원을 마치고 저녁 7시가 넘어 집에 와 식사하고 잠시 쉰 뒤 숙제를 하자면 밤 12시를 훌쩍 넘기기가 일쑤다.
이정우 기자 woo@hani.co.kr
필요한 학원만 선택 학교수업 집중하고 자기주도 학습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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