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 철원군 근남초등학교 4학년 어린이들이 지난 6월 ‘케냐의 가뭄을 같이 느끼자!’라는 인권수업 시간에 가뭄을 겪는 케냐의 어린이들이 먹는 하루치 식사량인 ‘컵 절반 분량의 시리얼’을 종이컵에 담아 들어보이고 있다. 아이들은 토요일 점심 한 끼 대신 이만큼의 시리얼을 먹고는 저녁밥을 먹기까지 실제로 배고픔을 느껴봤다고 한다. (사진 / 근남초등학교 제공)
장애체험 하니까 무서움 알겠더군요
이제는 욕도 안하고, 별명도 안 불러요
우리들이 만든 인권선언문 지킬 거예요
이제는 욕도 안하고, 별명도 안 불러요
우리들이 만든 인권선언문 지킬 거예요
■ 서울·철원 어린이들의 인권교육 현장 ■
서울 도심에서도
“욕을 하지 말자, 남의 별명을 부르지 말자!!!!, 동생을 때리지 말기….”
서울 양천구 신월4동 서울서부교회에 둥지를 튼 공부방에 다니는 아이들이 스스로 만든 ‘인권선언문’에 담긴 다짐들이다. 마음대로 먹고 자고 놀고만 싶다던 아이들이다. 김푸른샘(16·한국외대부속외고1)양이 지난 여름 2주일 동안 이끈 ‘꼬마샘의 별별 수업’에 참여한 뒤끝이었다.
푸른샘이는 방학이 되자 한 장애인단체에서 자원활동을 하다 동네의 장애인 편의시설 조사를 했다. 한 지하철역 여자 화장실엔 장애인을 배려한 시설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는 국가인권위원회 홈페이지를 드나들었다. 그 때 자료실에 실린 ‘초등학교용 인권교육 프로그램’이 눈길을 당겼다.
중2 때부터 방학이면 이름 없는 공부방(<한겨레> 2월27일치 ‘함께하는 교육’ 1~3면·최근 ‘솔로몬 공부방’이란 이름을 지음)에서 영어나 수학을 가르쳤던 푸른샘이는, 이번 여름방학 땐 ‘인권수업’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어떤 아이가 친구더러 공부도 못한다고 함부로 말하던 일, 얼굴이 까맣다고 놀림받던 아이의 얼굴이 떠올랐던 탓이다. ‘맞벌이 부모가 많아 보살핌이 아쉬운 이 아이들에게 어쩌면 인권교육이 더 중요할지 몰라.’
6살부터 초6까지 30명 남짓이 7월31일~8월11일 열흘 동안 수업에 참가했다. 아이들이 낯설어하는 ‘권리’라는 말을 되풀이하고, 원하는 걸 그리게 하고는 ‘사람마다 원하는 게 다름’을 알려줬다.
절정은 장애 체험이었다. 푸른샘이도 해본 적이 없었다. 친구 조유정(16·목동고1)양과 염창중 학생들이 거들어줬다. 천으로 눈을 가린 채 도우미 친구와 함께 자기 신발을 찾고 계단을 오르고 자전거나 쓰레기통을 피해 교회 건물을 한 바퀴 돌도록 했다. 부딪치고 넘어지던 아이들은 한결같이 “무서웠다”고 했다. 장애인 흉내를 곧잘 내던 6학년 남학생들은 장애놀이를 하지 않겠다고도 했다.
막바지 무렵 아이들은 ‘인권나무 심기’를 했다. 종이를 오려 나무 몸통을 만들어 벽에 붙여놓고, 저마다 지킬 약속을 색한지에 써 넣은 ‘약속의 잎’을 만들어 붙이는 것이었다. 태성이가 물었다. “선생님, 저 나무 잘 자랄까요?” 푸른샘이 말했다. “네가 한 약속을 잘 지켜야만 인권나무가 쑥쑥 자랄거야.” 마지막날 그런 다짐들이 오롯이 담긴 공부방 아이들의 인권선언문이 ‘공포’됐다.
푸른샘은 이번 겨울방학 때도 인권수업을 할 작정이다. ‘휠체어 체험을 해 볼까? 영상 자료를 보여주면 눈을 못 뗄 걸. 인권 타임캡슐을 만들어 보자고 할까? 묻어뒀다가 내년 여름방학 때 꺼내보자고 하면?…’ 기말시험으로 바쁜 푸른샘은 최근 국가인권위원회로부터 ‘꼬마샘의 별별 수업’이 인권교육 실천사례 공모에서 시민단체·개인부문 자유(최우수)상에 선정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강원도 산골에서도
강원 철원군 작은 학교에서도 아이들이 선생님과 함께 ‘인권 여행’을 다니는 중이다. 근남초교 이규열(38) 교사와 4학년 어린이 12명이 그들이다.
올해 이 학교에 온 이 교사는 인권수업을 하기로 결심했다. 전방 지역이어서 아이들마저 군사문화에 젖은 모습을 본데다, 3년 전 초등생 딸이 다니던 수영장에서 일어난 강사의 어떤 아이 추행 사건도 계기가 됐다. 이 교사는 “아이들이 ‘나의 권리를 지키고, 남의 권리를 존중하는’ 마음을 갖추길 바란다”고 했다.
교과 수업과 체험활동 시간을 활용하고 몇 년 동안 준비한 교사가 이끄는 만큼, 근남초 아이들의 ‘인권 여행’은 더욱 다채롭다. 먼저 인권과 대면하기. 인권 관련 기념일을 적은 ‘인권 달력’ 만들기, 애니메이션을 보며 아동의 4대 권리(생존권·보호권·발달권·참여권) 배우기, 모둠지어 차별 사례 적기…. 다음은 인권과 친구하기. 인권 독서 골든벨, 인권 OX 퀴즈, 친구의 장점 적은 쪽지 뽑기, 인권사랑 기록장 쓰기, 인권 축제의 날…. 놀이와 체험으로 인권과 친해지는 것이다. 3단계는 인권의 눈으로 세상 보기. 가뭄이 심한 케냐 어린이, 파키스탄 지진 참상 등을 알아보기, 장애인 재활치료 견학, 인터넷으로 인권 엔지오 알아보기, 수화 배우기….
목발 짚고 걷기, 휠체어 타기 같은 ‘장애 체험’은 전교생 80여명이 함께했다. 김정미(11)양은 장애인과 통합수업 뒤 이렇게 썼다. “처음엔 장애인들이 무서웠지만 여러 활동을 하면서는 괜찮아졌어요.”
아이들의 인권 여행이 마지막 고비에 닿았다. 이 교사는 “남녀를 차별하거나 장애인을 부정적으로 여기던 시각이 많이 좋아졌다”며 “하지만 내년 이후에도 아이들이 그럴지는 모르겠다”고 말했다. 인권수업 하기를 잘했다고 여기지만, 교사 주도로 만들어진 분위기라는 성격이 크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올해처럼 자신만의 인권사랑 기록장을 써 가며 인권 의식을 키워가길 소망한다고 했다.
이 교사의 ‘너나들이의 인간애를 찾아 떠난 인권 여행기’는 이번 국가인권위의 인권교육 실천사례 공모에서 학교 부문 자유(최우수)상에 선정됐다.
이수범 기자 kjlsb@hani.co.kr
막바지 무렵 아이들은 ‘인권나무 심기’를 했다. 종이를 오려 나무 몸통을 만들어 벽에 붙여놓고, 저마다 지킬 약속을 색한지에 써 넣은 ‘약속의 잎’을 만들어 붙이는 것이었다. 태성이가 물었다. “선생님, 저 나무 잘 자랄까요?” 푸른샘이 말했다. “네가 한 약속을 잘 지켜야만 인권나무가 쑥쑥 자랄거야.” 마지막날 그런 다짐들이 오롯이 담긴 공부방 아이들의 인권선언문이 ‘공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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