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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1.09 20:03 수정 : 2005.01.09 20:03

방학하기 전날 아이들과 그동안 쓴 일기장을 묶었다. 많이 쓴 아이는 공책 8권, 적게 쓴 아이는 한 권도 있다. 잃어버려서 그렇지만, 짧게 쓰기도 했다. 뭐 그러면 어떠랴, 제가 쓴 만큼 묶으면 된다. 책처럼 쪽수도 달고, 차례도 만들고, 표지도 만들었다. 표지는 그림도 그려서 꾸미고 ‘2004년도 ○○의 일기’라는 제목도 달았다. 책꽂이에 꽂아 두면 잘 보이도록 책등에는 제목을 썼다.

일기장을 묶는 일은 오랜만에 교실에 활기와 생동감을 주었다. 한 해 동안 그렇게 일기 쓰기 싫어했던 녀석도 제가 쓴 일기에 빠져 헤어 나올 줄 모른다. 묶는 일은 제쳐 두고, 한참을 제가 쓴 일기를 이리저리 뒤적이며 깔깔댄다. 짝꿍과 서로 견줘 보며 이러쿵저러쿵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아이도 행복해 보이지만 바라보는 내가 더 즐겁다.

표지 뒤쪽에는 친한 동무들에게 추천 글을 한두 줄씩 받자고 했다. 서로에 대한 기억을 짧게 적자는 뜻인데, 대체로 ‘같은 반이 되면 좋겠다’, ‘내년에는 욕 좀 그만 하자’는 정도의 글을 적었다. 제가 깜냥대로 그렇게 적었으니 그만하면 되었다. 내게도 써 달라고 몰려왔는데 분위기가 유명한 작가의 팬 사인회 같이 들썩거려 조금은 우쭐거렸지만(?), 아이마다 하고 싶은 말을 쓴 뒤 ‘너를 만나 즐거웠다’거나 ‘오랫동안 잊지 못할 것’이라는 진심을 담았다.

이 아이들이 어른이 되었을 때, 해마다 묶은 ‘유년의 기억’을 서가에 쭉 꽂아 두고 한번씩 생각날 때마다 꺼내 보는 상상을 한다. 괴발개발 썼더라도, 창피한 내용이 담겨 있더라도, 선생님한테 야단 맞는 걸 피하기 위해서 글자 크게 쓰고, 띄어쓰기 많이 해서 쪽수만 채웠을지라도, 제 손으로 쓴 제 삶의 기록을 그렇게 오랫동안 간직하고 기억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나. 간혹 아이들 일기장을 다른 공책들과 함께 버리는 학부모님이 있다. 일기장을 묶는다고 그동안 쓴 것 다 가져오라고 하면 그렇게 없어진 일기장이 의외로 많아 놀라곤 한다. 어른이 되어서 기억할 과거가 없는 것처럼 불행한 일은 없다. 당장 어른의 눈에는 창피하고 가치가 없어 보일지는 모르지만 아이에게는 귀중한 추억의 매개물이다. 한 개인의 역사로 일기장만한 게 또 무엇이 있을까. 중국의 역사 왜곡을 탓하기에 앞서 못난 역사일지라도 한 개인의 역사를 가치 있게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자세부터 가다듬을 일이다.

그러니 새삼스레 마음을 다진다. 여러 어려움이 있지만 일기 지도를 포기할 수 없는 것은 무슨 논술 능력을 키우거나, 도덕 교과서처럼 제 잘못을 억지로 되돌아보고 거짓 반성을 하게 만들기 위해서거나, 무엇보다 무슨 무슨 학습능력을 키워 주기 위해서가 절대로 아니다. 그저 제 생긴 대로 제 사는 모습을 소중히 여기고 기록하며 살기를 바랄 뿐이며, 그런 기록이야말로 매우 소중한 것임을 가르치고 싶을 뿐이다. 너무 거창해졌다. 어쨌거나 그런 마음으로 올해도 아이들 일기장을 묶는다.

김권호/서울 일신초등학교 교사 kimbechu@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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