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시내 한 고교에서 학생회장 선출을 앞두고 후보자가 이색 선거운동을 펼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삶, 사유, 논술 /
콩닥콩닥. 35명의 학생들이 숨죽이고 긴장한다. 학급 회장을 선출하는 시간이다. 숨죽이고 오가는 목소리들, 사소한 말에도 크게 웃어대는 긴장감, 개표하는 마디마다 새어나는 탄성은 구경꾼인 교사에게도 색다른 교실의 추억을 준다. 자신들의 대표를 뽑는 것이 그토록 특별한 일이었나 보다. 학생들의 얼굴이 화사하게 피어 오른다.
학교에서 회장을 선출하는 과정은 민주주의를 학습한다는 교육적 명분과 동행한다. 후보로 출마한 학생들은 소견을 발표하고, 다른 학생들은 한 표의 향방을 결정하기 위해 유심히 살핀다. 민주주의적으로 후보는 유권자의 마음을 얻으려 하고, 유권자는 대표를 뽑는 과정을 익힌다. 초등학생도 대답할 수 있는 선거 체험의 기본 룰이다.
그러나 비극적 진단이지만 현실에서 학생들의 민주주의는 거기까지다. 보이지는 않지만 학생 자치의 제도적 한계선이 꽤 두텁다는 것을 학생들도 알고 있다. 선출된 회장이 학생들을 위해 ‘대표’할 일은 그다지 많지 않다. 학생들의 인사 구령을 대표하고 과제물을 걷는 등의 교사 업무를 보조하는 때가 더 많다. 학급회의에서도 ‘반 단합대회를 하자’, ‘시험 준비 모둠을 만들자’ 정도만 논의된다. 대부분 받아들여질 법한 안건이 토론되고, 회장은 단지 사회자의 역할에 그친다.
그래서 후보들은 주로 ‘무엇을’ 하겠다가 아니라 ‘어떤 자세를’ 갖겠다고 말한다. 공약(空約)일 게 뻔한 것을 피해가려는 마음이지 않을까. 후보자들은 “신발 바닥이 다 닳도록 뛰겠다”, “학생들의 의사를 반영하는 거울이 되겠다”는 문장 표현에 골몰한다. 유권자는 얼마나 화끈한 유세를 하는지에 더 관심을 쏟는다. ‘이미지 정치’는 어른들의 선거판보다 학생들의 유세장에서 더 뿌리가 깊다. 어차피 자유롭게 발휘되는 개인의 권력은 그 순간에만 머무는 탓이다.
“영국의 인민들은 스스로를 자유롭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큰 착각이다. 그들이 자유로운 것은 오직 의회의 의원을 선거하는 기간뿐이다. 선거가 끝나는 순간부터 그들은 다시 노예가 되어 버리고, 아무런 가치도 없는 존재가 되어 버린다.” 루소가 <사회계약론>에서 대의제 민주주의를 비판한 대목은 너무나 유명하다. 그는 18세기 영국 정부를 가리켜 선거 때만 일시 중단되는 노예제로 묘사했다.
현실 정치를 떠올려 보면 이것은 비단 18세기 영국의 모습만은 아니다. 대한민국에서도 현재진행형이다. 선거할 때와 당선된 후의 모습이 달라지는 후보자를 하루 이틀 보아왔던가. 실현되지 않을 공약에 귀기울이기 보다 한 시간을 즐겁게 보내는 쪽이 더 현명할 것이다. 정치사건마다 인터넷 댓글은 넘쳐나지만 정작 투표일에 유권자들은 놀러간다. 실질적인 자치활동의 영역이 좁은 학생들에게 학교의 민주주의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들이 회장 선거를 통해 배우는 것은 민주주의 자체가 아니라 관람하는 자의 처세는 아닐지 자꾸만 마음이 쓰인다.
그런데, 자치의 미흡이 꼭 학교의 제도나 회장 역할의 한계에서만 기인하는 것은 아니다. 버나드 마넹은 <선거는 민주적인가>에서 대의제 민주주의의 비민주성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민주주의란 정치적으로 평등한 인민과 인민에게서 나오는 권력을 핵심으로 하는 제도다. 그는 선거를 통해 특별한 사람(대표)들을 만들어서 그들에게 ‘발언하고 결정할 권력’을 위임하는 것은 평등에 기초한 민주주의가 아니라 엘리트주의(귀족정 또는 과두정)라 말한다. 마넹의 탐색을 따라 민주정치와의 대립각을 세워온 과두정을 함께 비교해 보자. “과두정에서는 누구든지 원하는 사람이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권위를 가진 사람만 말을 합니다. 반면 민주정에서는 누구든지 원하는 사람이, 원하는 때에 말할 수 있는 것이라오.” 고대 그리스의 정치가인 아이스키네스의 말은 민주주의의 원칙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직접민주주의의 고향, 아테네에서는 뜻 밖에도 민회에 참가하고픈 희망자 가운데 추첨을 통해 관리를 선출했다. 누구나 접근 가능한 권력을 보장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핵심이라 여긴 때문이다. ‘선거’가 아니라 ‘추첨’에 기반한 그리스의 민주주의가 ‘평등’의 원칙을 얼마나 소중히 여겼는지를 드러내 준다. 통치권력에 대해 인민의 대표냐 아니냐로 민주주의를 따지기 보다, ‘누구나’ 통치자와 피통치자를 번갈아 할 수 있는 교체의 여부에 관심을 두었던 점이 흥미롭다. “자유의 한 형태는 다스리고 또 다스림을 받는 것을 번갈아 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좀더 밀고 나가보면, 우리가 선출한 대표에게 ‘지도자’로서의 우월성을 부여하는 것은 민주적인 자세가 아니다. 아무리 투표로 선출됐다 하더라도 보통 사람이 아닌 우월한 ‘지도자’가 되는 순간 유권자는 ‘발언할 권리’가 아닌 ‘동의할 권리’만을 누리는 객체가 되는 탓이다.
다시 교실이다. 회장이 되고 싶은 학생도 있고 출마하고 싶지 않은 학생도 있다. 그리고 그저 남의 일이기만 한 학생들이 있다. 소견 발표때 후보자에게 질문을 하고 견해를 검토하는 학생들은 거의 없다. 판단 기준은 주로 어느 중학교 출신인지(학연), 공부를 얼마나 잘 하는지(성적), 얼마나 말을 잘하는지(이미지)에 따른다. 결국 뽑아 준 사람은 평범해지고 ‘누가 되었는지’만 남는다. 그런데도 참 야릇한 일이다. 단지 그 경험만으로도 발갛게 상기된 얼굴들을 볼 때마다 소리 없이 뭉클해지는 이 마음은 또 무슨 까닭일까.
권희정/상명대부속여고 철학·논술 교사
그런데, 자치의 미흡이 꼭 학교의 제도나 회장 역할의 한계에서만 기인하는 것은 아니다. 버나드 마넹은 <선거는 민주적인가>에서 대의제 민주주의의 비민주성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민주주의란 정치적으로 평등한 인민과 인민에게서 나오는 권력을 핵심으로 하는 제도다. 그는 선거를 통해 특별한 사람(대표)들을 만들어서 그들에게 ‘발언하고 결정할 권력’을 위임하는 것은 평등에 기초한 민주주의가 아니라 엘리트주의(귀족정 또는 과두정)라 말한다. 마넹의 탐색을 따라 민주정치와의 대립각을 세워온 과두정을 함께 비교해 보자. “과두정에서는 누구든지 원하는 사람이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권위를 가진 사람만 말을 합니다. 반면 민주정에서는 누구든지 원하는 사람이, 원하는 때에 말할 수 있는 것이라오.” 고대 그리스의 정치가인 아이스키네스의 말은 민주주의의 원칙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직접민주주의의 고향, 아테네에서는 뜻 밖에도 민회에 참가하고픈 희망자 가운데 추첨을 통해 관리를 선출했다. 누구나 접근 가능한 권력을 보장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핵심이라 여긴 때문이다. ‘선거’가 아니라 ‘추첨’에 기반한 그리스의 민주주의가 ‘평등’의 원칙을 얼마나 소중히 여겼는지를 드러내 준다. 통치권력에 대해 인민의 대표냐 아니냐로 민주주의를 따지기 보다, ‘누구나’ 통치자와 피통치자를 번갈아 할 수 있는 교체의 여부에 관심을 두었던 점이 흥미롭다. “자유의 한 형태는 다스리고 또 다스림을 받는 것을 번갈아 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좀더 밀고 나가보면, 우리가 선출한 대표에게 ‘지도자’로서의 우월성을 부여하는 것은 민주적인 자세가 아니다. 아무리 투표로 선출됐다 하더라도 보통 사람이 아닌 우월한 ‘지도자’가 되는 순간 유권자는 ‘발언할 권리’가 아닌 ‘동의할 권리’만을 누리는 객체가 되는 탓이다.
권희정/상명대부속여고 철학·논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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