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초구 서원초등학교 2학년 학생들이 ‘스스로 배식’을 하고 있다. 박종식 기자
선생님·언니·오빠가 1~2학년 ‘배식 도우미’로
지난달 19일 서울 반포동 서원초등학교. 정오가 다가오자 학교가 부산해진다. 구수한 냄새를 풍기는 밥수레 서른 대가 본관 1층에 자리한 급식실에서 2~6학년 교실 앞으로 배달된다. 1학년은 학교 적응 기간인 3월 한 달 동안 급식을 하지 않는다. 학교엔 급식을 거드는 학부모가 한 명도 보이지 않는다. 3~6학년 학생들은 물론, 자원봉사 형식을 빌어 학부모의 도움을 받곤 하던 2학년 교실에도 아이들과 담임 선생님 뿐이다.
밥수레 키높이 맞추고 아동용 집게·자갑 갖추니
배식 당번 인기 만점 5~6학년 선배와 ‘정도 듬뿍’
12시10분, 수업이 끝나자 2학년3반 김옥희 선생님이 앞치마를 두르고 교실 안으로 밥수레를 들인다. 이번 주 배식 담당인 다섯 학생들도 따라 나와 급식 준비를 서둔다. 민정이는 친구들에게 식판을 나눠주고, 승희와 수아는 비닐 장갑을 낀 채 김치와 오이 생채를 덜어준다. 밥은 씩씩한 승민이가 퍼 담고, 뜨거운 콩나물국은 선생님 몫이다. 알감자 몇 개와 김치 쪼가리를 흘리기도 하지만, 병아리 같은 2학년 학생들은 친구들에게 정성스레 밥과 반찬을 담아준다. 선생님과 당번 학생들까지 제 몫을 챙겨 식사에 들어가고, 간혹 부족한 친구들이 앞으로 나와 밥이나 반찬을 덜어간다.
지난해부터 서원초 1·2학년 학생들은 학부모나 5·6학년 학생들의 도움을 받지 않고, 담임 교사의 지도 아래 ‘스스로 배식’을 하고 있다. 김옥희 교사는 “1학년 때부터 스스로 배식을 해 온 아이들이라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일주일 마다 차례가 바뀌는 배식 당번은 학생들에게도 인기 만점이다. 이날 친구들에게 알감자를 덜어준 건우(8)는 “배식을 하면 재밌고, 기분이 좋다”며 “밥도 더 맛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2006년 이 학교에 부임하면서 1·2학년 학생들도 ‘스스로 배식’을 하도록 한 백순애 교장은 “예전 학교에서 부설 유치원을 운영했는데, 유치원 아이들도 제 할 일을 잘 하더라”며 “초등 1·2학년 학생들이 못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아이들에게 맞게 몇 가지 조건만 갖춰 주면 된다”며 비결을 공개했다.
우선 배식과 관련된 모든 기구를 학생의 신체 조건에 맞춰야 한다. 커다란 성인용 집게는 작은 아동용 집게로, 음식용 비닐 장갑은 아이들 손에 맞는 작은 것으로 구비한다. 음식을 담아오는 밥수레도 아이들 키높이에 딱 맞게 제작됐다. 국물은 흘려도 문제가 안될 정도인 70~80도 정도로 식혀 배달된다. 물론 가장 중요한 조건은 담임 교사의 적극적 지도다. 백 교장은 “담임 선생님이 얼마나 의지를 갖고 학생들을 지도하느냐가 ‘스스로 배식’의 관건”이라며 “지난해 경험을 통해, 처음엔 피곤하고 어렵지만 아이들을 믿고 하다보면 어렵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고 말했다.
서울 마포구 중동 신북초등학교는 또 다른 방식으로 학부모 도움 없이 1·2학년 배식을 해결하고 있었다. 5·6학년 언니·오빠들이 저학년 동생들의 배식을 돕는 방식이 10년 넘게 이어지면서, 어느 새 이 학교의 전통처럼 자리잡았다.
지난달 20일 학교를 찾았다. 점심시간이 되자 5학년1반 학생들 모두가 2학년 교실로 향한다. 마흔 명의 학생들이 5~6명씩 짝을 지어 자기가 맡은 교실로 들어간다. 학생들은 익숙한 손놀림으로 앞치마를 걸치고 밥과 반찬을 교실로 들인 뒤 배식을 한다. 이 학교는 5학년1반이 2학년1반, 2반은 2반 하는 식으로 진행돼던 방식을, 지난 해부턴 한 반 학생 전체가 한 학년 전부를 돕는 식으로 바꿨다. 정민표 교장은 “반끼리 연결짓고 반 학생 일부가 당번을 맡다 보니, 수업 분위기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게 되더라”며 “반 학생 전체에게 한꺼번에 맡기니 수업에 지장도 없고, 담임들도 좋아한다”고 말했다.
배식을 마친 5학년 학생들은 배식했던 반에서 식사를 한다. 자기 교실로 돌아가는 게 번거롭기도 하지만 동생들과 함께 식사하면서 조금이라도 더 친해질 기회를 갖기 위해서다. 이날 2학년3반에서 배식을 한 5학년 이나연(12)양은 “어렸을 때 오빠, 언니들이 도와줬던 기억에 더 열심히 하게 된다”며 “동생들이 잘 먹는 모습을 보면 뿌듯하다”고 말했다. 이 학교 김희순 교감은 “점심시간에 놀 시간이 줄어드는 게 왜 아깝지 않겠느냐”며 “하지만 어렸을 때 똑같이 받았고, 스스로 봉사활동이라고 생각하며 다들 열심히 한다”고 말했다. 모두가 함께 하다보니 배식 당번에 빠지는 것을 싫어하는 분위기도 생겼다. 교사들은 5·6학년 학생들이 잘못을 저지르면 “배식 당번 빼버린다”고 ‘겁’을 준다.
고학년이 저학년 배식을 돕는 것은 시작이 절반이다. 신북초처럼 10년 넘게 이 방식을 진행해 오면 서로 불만이 없지만, 처음 시작하려면 고학년 학부모들이 동의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남학생을 뺀 채 여학생만 당번에 참여시키는 것도 금물이다. 정 교장은 “여학생이 더 차분할 것 같다는 편견 때문인 것 같다”며 “차분함은 남녀 차이가 아니라 사람 차이인 것 같다”고 말했다.
‘급식당번 폐지모임’ 임나혜숙 공동대표 한부모 가정 아이 배려 없이 학부모 동원 관행 뿌리 깊어
초등학교의 학부모 동원은 비단 저학년 학부모의 당번 배식에 그치지 않는다. 청소나 교통지도 등 단순 잡무부터 시험 감독 등 학사 관련 업무까지 폭 넓게 이뤄진다.
교실 청소나 환경 미화를 하는 데 학부모를 동원하는 것은 꽤 오래 지속돼 온 학부모 동원 사례다. 소풍 등 야외 활동을 할 때도 학부모들은 학생들을 보호·관리한다는 명목 아래 동원된다. 등교 시간에 맞춰 건널목 등에서 교통 지도를 하는 ‘녹색 학부모회’는 정형화된 틀을 갖췄다. 시험 칠 때 학부모가 교사와 함께 감독으로 들어가는 경우도 있는데, 교육청에서도 ‘명예 시험감독’이라는 이름으로 권장한다.
앞선 사례들이 단순 잡무를 학부모들에게 떠넘긴 것이라면, 조금 생산적이고 발전적인 형태로 볼 수 있는 것들도 있다. 학교 도서관에서 책을 관리하는 사서 업무를 맡는다거나, 특기를 살려 방과후 학교의 교사를 하는 경우, 급식 식재료를 검수하는 것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간혹 학생들과 전혀 관련 없는 분야에 학부모가 동원되기도 한다. 학교 재단 행사나 이사회 등에 손님 접대를 위해 동원되는 경우다. 박범이 참교육학부모회 서울지부장은 “이런 경우는 학부모로서가 아니라 여성으로서, 그야말로 꽃으로 여겨지는 경우로, 가장 잘못된 학부모 동원 형태”라고 말했다.
학교의 학부모 동원을 나무랄 수만은 없는 것은 그만큼 학교 재정이 충분치 않기 때문이다. 박 지부장은 “먼저 학교가 원활하게 돌아갈 만큼 교육 재정이 확보됐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최현준 기자 haojune@hani.co.kr
우선 배식과 관련된 모든 기구를 학생의 신체 조건에 맞춰야 한다. 커다란 성인용 집게는 작은 아동용 집게로, 음식용 비닐 장갑은 아이들 손에 맞는 작은 것으로 구비한다. 음식을 담아오는 밥수레도 아이들 키높이에 딱 맞게 제작됐다. 국물은 흘려도 문제가 안될 정도인 70~80도 정도로 식혀 배달된다. 물론 가장 중요한 조건은 담임 교사의 적극적 지도다. 백 교장은 “담임 선생님이 얼마나 의지를 갖고 학생들을 지도하느냐가 ‘스스로 배식’의 관건”이라며 “지난해 경험을 통해, 처음엔 피곤하고 어렵지만 아이들을 믿고 하다보면 어렵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고 말했다.
‘고학년 도우미 배식’을 하는 신북초등학교 2·5학년 학생들과 ‘스스로 배식’을 하는 서원초등학교 2학년 학생들이 배식하고 점심을 먹고 있다. 박종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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