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당산초등학교 도서실은 밤 10시까지 문을 연다. 도서실 개방 시간을 늘리면서 축구부 학생들도 많이 찾게 됐고, 책 대출량도 두 배쯤 늘었다.
특기적성? 보충학습?
‘골라먹는’ 재미가 있다
‘골라먹는’ 재미가 있다
앞서가는 방과후 학교들
“안전하게 아이를 맡아줄 데 없나?” “좀 더 싸게 공부를 도와 줄 데는 없을까?” 초등학교 땐 보육 부담, 중·고등학교 땐 사교육 부담으로 좀처럼 허리 펼 날 없는 학부모들이 늘 하는 고민이다. 이런 고민을 조금이나마 덜어주겠다며 정부가 의욕적으로 추진하는 것이 ‘방과후 학교’다. 저학년 어린 아이들에겐 ‘또 하나의 집’으로, 고학년 아이들에겐 사교육비 부담을 더는 ‘학교 안 학교’로 자리잡아가는 서울과 지방의 ‘방과후 학교’를 들여다 봤다. 서울 당산초교
바이올린·원어민영어…44개 수업 밤 10시까지 집에 갈 땐 꼭 부모가
서울 영등포구 당산초등학교 2학년 정하영(8)양은 저녁 8시가 다 돼서야 집에 간다. 밤 10시까지 문을 여는 학교의 ‘방과후 보육교실’에 머물기 때문이다. 지난 23일엔 고모부 김진상(50)씨가 하영이를 데리러 왔다. 김씨는 “하영이 엄마·아빠가 늦게 퇴근하는 날에 종종 내가 대신 데리러 온다”며 “내 자식들 키울 때도 이런 제도가 있었으면 참 좋았을텐데…”라고 말했다.
하영이는 학교에서 날마다 피아노와 영어를 배우고, 일주일에 두 차례씩 컴퓨터를 배운다. 저녁은 학교에서 함께 친구들과 함께 먹고, 남는 시간엔 보육교실 선생님과 줄넘기를 하거나, 밤 10시까지 문을 여는 도서관에서 책을 본다. 하영이는 “친구들과 함께 이것저것 배우고 놀 수 있다”며 “일찍 집에 가 혼자 노는 것보다 훨씬 좋다”고 말했다. 하영이는 선생님과 헤어지면서 엊그제 배운 중국말인 “짜이~찌앤(안녕)”을 외치며 밝게 웃었다.
당산초등학교는 밤 10시까지 아이들을 돌봐주는 ‘맞춤식 방과후 학교’를 올해 4월 초 열었다. 근처에 새 학교가 문을 열면서 빈 교실이 7개나 생겨난 것이 계기였다. 빈 교실 세 곳을 ‘방과후 보육교실’과 ‘피아노 교실’로 재단장했다. 바이올린, 클레이 아트, 원어민 영어, 영재과학 교실 등 44개 수업이 밤 8시까지 이뤄지고, 연인원 672명이 참가한다. 사랑샘터와 어울샘터 등 두 개 반으로 나뉘어 밤 10시까지 머물 수 있는 보육교실엔 1~4학년 학생 42명이 있다. 최근 재단장한 도서실도 밤 10시까지 개방한다. 한 곳에 오래 머물길 힘들어하는 학생들을 위해 학교 곳곳을 밤늦게까지 열었다. 이 학교 신미정 방과후 학교 부장교사는 “학생들은 이 교실 저 교실 돌아다니며 2~3개씩 과목을 듣고, 도서관도 가고, 체육관에서 운동도 한다”며 “부모님이 데리러 올 때까지 아이들을 보살피는 보육교실은 일종의 베이스캠프 구실을 한다”고 말했다.
특기적성 교실은 바둑, 로봇 제작 등이 가장 싸 석 달에 6만원이고, 날마다 하는 ‘원어민 영어교실’이 가장 비싸 석 달에 30만원이다. 밤늦게까지 보살펴주는 보육교실은 저녁 식사를 포함해 6만원인데, 이중 2만원은 학교가 지원한다. ‘학교 안 가정’인 보육교실에 들어가려면 딱 한 가지 조건이 있다. ‘집에 갈 때 부모나 가족이 반드시 데리러 와야 한다’는 것이다. 아이들의 안전한 귀가를 위한 고육책인 셈인데, 부모들은 “손을 잡고 함께 집에 가다보면 새록새록 정이 솟아난다”고 입을 모은다.
단양 대곡분교 가야금·서예 등 취미팀과 영·수·언어 학습팀 나눠…재미는 물론 성적도 ‘쑥쑥’
충북 단양군 가곡면 대곡분교 5학년 서한울(11)군은 학교에 가려고 아침 일찍 집을 나선다. 하루를 일찍 여는 시골 습관 탓이기도 하지만, 얼른 학교에 가 친구들과 어울려 놀고 싶어서다. 학교에 도착해 배드민턴을 치고, 책도 보고, 젓가락으로 콩을 짚는 연습을 하다보면 어느덧 수업이 시작된다. 여기까진 예전과 별로 다르지 않지만, 지난해 9월 단양군 방과후 학교 프로그램인 ‘파이룸(Play in English room)’이 열리면서 오후 생활이 확 바뀌었다. ‘논술 및 수리탐구’ 프로그램과 ‘생활 영어’ 수업이 도입되고, 컴퓨터 수업도 이뤄진다. 이 학교 정천택 교사는 “교사 재량으로 이뤄지던 오후 활동이 오후 5시까지 체계적으로 이뤄지게 됐다”고 말했다.
전체 인구 3만 남짓에 유치원, 초·중·고교생을 통틀어 4천명 가량인 단양군은 지난해 9월부터 방과후 학교 프로그램에 주력해 왔다. 주변 도시로 인재 유출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지역을 살리려면 교육을 살려야 한다’는 인식에 교육장과 군수 등이 같이했다. 마침 정부가 농·산·어촌 방과후 학교를 지원해 주는 사업에 응모해 선정됐고, 군에서도 조례를 바꿔 전체 예산의 5%를 교육 쪽에 지원하기로 해 탄력이 붙었다. 정부 지원과 군 예산을 합쳐 올해 확보한 예산만 13억원을 약간 넘는다.
단양군의 방과후 학교 강화는 단위학교 강화 사업인 ‘파이룸’과 ‘중심 학교’ 신설, ‘주말반’ 운영 등 세 방향으로 나뉜다. 우선 ‘파이룸’은 단위 학교의 방과후 학교로 생활 영어와 독서, 가야금, 서예, 사물놀이, 과제 지도, 보육 등으로 이뤄진다. 파이룸에는 초·중학교 220명의 학생이 저녁 8시40분까지 참여하고 있다. 중심 학교는 군내 학생들을 한 곳(단양초와 단양중)에 모아 생활 영어와 수리 탐구, 언어 탐구를 가르치는 식으로 진행된다. 여건상 성적 상위 15% 안에 드는 학생을 중심으로 하고 저소득층 학생이 추가됐다. 학생들은 오후 5시40분부터 8시40분까지 세 가지 수업을 듣고, 1만원을 낸다. 수업이 끝나면 학생들은 차량 네 대에 나눠타고 귀가한다. 토·일요일 오전 3시간 동안 무료로 운영되는 주말반엔 초·중학교 학생 90명이 단양중에 모여 진행된다. 학생들은 여기서 관광영어와 수리탐구를 배우고, 체험학습 등이 진행된다.
단양군은 특히 중심 학교 운영에 많은 힘을 쏟는다. 인재 유출을 막으려면 지역적 차원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판단에서다. 김종근 단양교육장은 “특히 중심 학교를 시작할 때 어떤 학생을 대상으로 할지 많이 고민했다”며 “신청자 모두를 수용할 수 없어, 일단 성적을 중심으로 뽑되, 작은 학교 학생들과 저소득층 학생들의 신청은 수용하는 식으로 했다”고 말했다. 장재성 방과후 학교 운영부장(대강초 교사)은 “특히 중심 학교에 다니는 저소득층 학생들의 성과가 정말 놀랍다”며 “교육 혜택을 많이 못받아 당장은 빛이 안나지만 학습 태도가 좋고 의지가 대단해, 사교육을 많이 받은 학생들을 금방 따라간다”고 말했다.
방과후 학교,활성화하려면… 수업할 교실 충분히,우수한 강사 넉넉히 오후 5시면 문을 닫는 여느 초등학교와 달리 서울 당산초등학교는 밤 10시까지 환하게 불을 밝힌다. 정원 마흔 명인 보육교실에 참여하지 않더라도 밤 8시까지 진행되는 특기적성교실이나, 10시까지 문을 여는 도서실에 갈 수 있다.
문제는 당산초가 시범학교이듯 이런 시설을 가진 학교가 매우 드물다는 점이다. 신옥주 교감은 “무엇보다 남는 교실이 없다는 것이 문제”라며 “특히 대도시에 이런 현상이 심해 하고 싶어도 못하는 형편”이라고 말했다. 서울 천동초등학교는 기존에 있던 예절실을 강당으로 옮긴 뒤 보육 교실로 재단장해서 쓰고 있다. 또 다른 문제는 밤늦게까지 아이들을 맡을 인력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당산초 보육교실 유경혜(43) 교사는 “늦게 출근하긴 해도 퇴근 시간이 늦다는 점이 단점”이라고 말했다. 신 교감은 “오후 5시에 문 닫는 것과 밤 10시에 닫는 것은 비용 차이도 크다”며 “인력 문제를 해결하려고 자원봉사자와 아르바이트 직원을 쓰고 있다”고 말했다.
지역 살리기 차원에서 방과후 학교를 적극 추진하는 단양군은 ‘재원 확보’와 ‘강사 모집’을 최우선적으로 풀어야 할 과제로 꼽았다. 김종근 단양교육장은 “교육 인프라가 턱없이 부족한 상황에서 지역의 우수 교사들이 지도하는 방과후 학교는 굉장한 인기를 얻는다”며 “원하는 학생을 전부 수용하기엔 예산이 많이 부족하다”고 말했다. 단양교육청은 이 때문에 ‘중심 학교’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을 성적 상위 15% 이상으로 제한해, 우수 학생에 대한 선별적 혜택이라는 지적을 받고 있다. 김 교육장은 또 “학부모들이 굉장히 반기지만 아직 긴가민가 하는 분들도 적지 않다”며 “학부모들에게 믿음을 줄 수 있도록 꾸준히 진행돼야 한다”고 말했다. 농촌이라는 지역적 특성으로 우수 강사 확보가 쉽지 않다는 점도 문제다. 특히 학생 90명이 참여하는 주말반은 다양한 강사들이 활동할 여지가 많지만 이마저도 전부 현직 교사가 맡고 있다. 김 교육장은 “대학생이나, 임용고사 준비생 등 참신한 인력을 찾아봤지만 쉽지 않더라”며 “특히 농·산·어촌의 경우 우수 강사 확보가 방과후 학교 확대의 걸림돌”이라고 말했다.
최현준 기자 haojune@hani.co.kr
“안전하게 아이를 맡아줄 데 없나?” “좀 더 싸게 공부를 도와 줄 데는 없을까?” 초등학교 땐 보육 부담, 중·고등학교 땐 사교육 부담으로 좀처럼 허리 펼 날 없는 학부모들이 늘 하는 고민이다. 이런 고민을 조금이나마 덜어주겠다며 정부가 의욕적으로 추진하는 것이 ‘방과후 학교’다. 저학년 어린 아이들에겐 ‘또 하나의 집’으로, 고학년 아이들에겐 사교육비 부담을 더는 ‘학교 안 학교’로 자리잡아가는 서울과 지방의 ‘방과후 학교’를 들여다 봤다. 서울 당산초교
바이올린·원어민영어…44개 수업 밤 10시까지 집에 갈 땐 꼭 부모가
저녁 8시가 다 된 늦은 시간, 서울 당산초 방과후 학교 학생들이 친구와 놀거나(위) 피아노를 배우고 있다.
단양 대곡분교 가야금·서예 등 취미팀과 영·수·언어 학습팀 나눠…재미는 물론 성적도 ‘쑥쑥’
충북 단양초등학교 대곡분교 학생들이 선생님과 함께 논술 수업(위)을 하거나, 원어민 교사가 단양초등학교 방과후 교실에서 생활영어 수업을 하고 있다.
방과후 학교,활성화하려면… 수업할 교실 충분히,우수한 강사 넉넉히 오후 5시면 문을 닫는 여느 초등학교와 달리 서울 당산초등학교는 밤 10시까지 환하게 불을 밝힌다. 정원 마흔 명인 보육교실에 참여하지 않더라도 밤 8시까지 진행되는 특기적성교실이나, 10시까지 문을 여는 도서실에 갈 수 있다.
학부모들의 방과후 학교 반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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