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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교육

풍진 세상에 풀어놓은 넉넉함

등록 2007-04-29 17:25수정 2007-04-29 17:50

김호도의 풍속화를 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삶의 고단합을 농담으로 풀어내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낙천적이다. 입이 닳도록 알려준 문장도 하나 외우지 못하는 제자 때문에 답답해하는 훈장님의 모습을 생생히 그려낸 ‘서당’
김호도의 풍속화를 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삶의 고단합을 농담으로 풀어내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낙천적이다. 입이 닳도록 알려준 문장도 하나 외우지 못하는 제자 때문에 답답해하는 훈장님의 모습을 생생히 그려낸 ‘서당’
교과서 미술 기행 /

김홍도의 ‘서당’과 ‘주상관매도’

따뜻함과 아름다움의 깊이

모든 예술은 그 사람을 닮는다. 그래서일까, 김홍도의 그림을 볼 때마다 따뜻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려 깊고 어진 화가의 얼굴이 떠오른다. 김홍도의 풍속화는 소박하지만 푸진 두레밥상을 닮았다. 그림 속 옛사람들도 우리처럼 함께 일하고 함께 기쁨과 슬픔을 나누며 험하고 가파른 한 세상을 건너갔을 것이다. 김홍도는 건강한 민중의 삶을 오월의 햇살 같은 손길로 노래하듯 그려나갔다. 이 신명나는 노동요에서는 넉넉한 사람 냄새가 난다. 당대 최고의 화가인 그의 풍속화첩에는 둥글넓적한 우리의 얼굴을 닮은 사람들이 살아 숨쉰다.

봄 산이 어린 나무들에게 연하고 부드러운 나이테를 감아 주듯이 김홍도의 풍속화를 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삶의 고단함을 농담으로 풀며 어깨를 맞대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낙천적이다. 그들의 삶 속에서 희망의 잎들이 햇빛을 받아 찰랑거린다.

김홍도의 <서당>은 너무나 친근한 그림이다. 이 그림 속 훈장님과 서당 풍경은 그림을 바라보는 우리를 향해 열려 있다. 그래서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린다.

평범해 보이는 것들이 사실은 삶의 정수라는 것을 위대한 화가 김홍도는 이미 알고 있었으리라. 그의 풍속화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살맛을 주었는지 생각해 보면 이 그림이 뿜어내는 꾸밈없고 담백한 매력에 푹 빠질 수밖에 없다.

김홍도가 생생히 그려낸 ‘서당’의 풍경은 우리가 잊고 산 유년의 기억으로 이끈다. 그 기억의 오솔길에는 널찍한 너럭바위 같은 선생님들이 어린 우리를 가르치고 계신다. 세월이 아무리 많이 흘렀어도 학교와 선생님, 그리고 아이들의 모습은 여전하다.

숙제를 안 해 왔는지, 아니면 시험을 못 봤는지 한 아이가 눈물을 훔치며 종아리 맞을 채비를 하고 있다. 깜박 잊고 숙제를 집에 두고 왔다는 뻔한 거짓말도 할 줄 모르는 착한 아이.

어쩌면 이 아이는 바쁜 농사일을 거두느라 공부할 시간도 없이 책을 펴자마자 골아 떨어졌는지도 모른다. 그런 아이의 사정을 잘 아는 친구들이 녀석을 도우려고 답도 알려주고 슬그머니 책도 디밀어 주지만 아이는 안다. 훈장님은 거짓말을 하는 아이를 제일 싫어하신다는 사실을. 비록 공부는 뒤떨어지지만 마음 자리는 순하고 밝은 아이. 하지만 공부를 안 하면 생각이 깊고 바른 사람이 될 수 없기에 훈장님은 화난 척 찡그리신다. 그래도 한 번 봐 주려고 회초리를 드는 대신 다 아는 아주 쉬운 문제를 내지만 아이는 엉뚱한 대답을 한다. 철없는 개구쟁이들은 어깨를 들썩이며 키득거린다. 아이고, 이를 어쩌나. 입이 닳도록 알려준 문장도 하나 외우지 못하는 맹한 제자 때문에 훈장님의 가슴엔 답답한 먹장구름이 몰려온다. 그렇게 아이들은 오늘도 선생님과 함께 공부하고 마음을 나누며 자라난다. 이 아이들도 부모가 되어 저와 꼭 닮은 아이를 기르다 보면 그 옛날 선생님의 애타는 심정을 충분히 헤아리게 되겠지.

빼어난 여백의 미학을 보여주는 ‘주상관 매도’
빼어난 여백의 미학을 보여주는 ‘주상관 매도’
지난해 스승의 날에는 학교들이 일제히 문을 닫았다. 이유는 ‘뇌물 사절’이다. 스승의 날 꽃 한 송이 받지 못하는 선생님들을 떠올리니 마음이 무거웠다. 사랑은 표현하라고 있는 것이다. 아이들과 선생님 사이를 무지막지하게 단절시킨 우울한 스승의 날이 올해도 계속 될까? 정성껏 쓴 편지와 꽃은 선물이지 결코 뇌물이 아니다. 선물은 하는 사람이 더 설레는 법이다. 마음을 전하는 기쁨마저 차단시켜 버리는 것은 비인간적이고 비교육적이다. 다른 날도 아니고 적어도 스승의 날 하루쯤은 선생님들이 꽃다발 속에서 행복하게 활짝 웃어도 좋지 않을까? 그런 선생님의 얼굴을 보며 아이들은 제가 더 뿌듯하고 신날 것이다.

내게도 고마운 은사님들이 있다. 다른 때는 잘 찾아뵙지 못하지만 스승의 날이면 찾아뵙곤 한다. 낯익은 교정을 천천히 걸어 들어가면 반갑게 맞아주시는 은사님들. 이 삭막한 세상에 나를 진심으로 걱정해 주시는 분들.

이번 스승의 날 나는 은사님들께 김홍도의 향기로운 <주상관매도>를 선물하고 싶다. 이 그림은 절제와 침묵이 그려낸 완벽하게 아름다운 한 편의 시다. 여백은 침묵이 평화로 이어질 때 깊어진다. 이 무한한 공간감과 깊이 속에 우아한 음악이 흐른다. 끝없는 자기 부정과 확신을 겪고 마침내 절대 경지에 이른 초탈한 예술가가 그려낸 아름다움의 풍경. 그것은 지나온 삶을 돌아보는 겸허함과 담담함이 피워낸 아스라이 높은 치유의 손길이다.

나비의 날개처럼 꽃잎들이 바람 따라 강물 위로 내려앉고 강물은 가벼운 꽃잎마저 머물 수 없게 조용히 흐른다. 저 아뜩한 벼랑 끝에 뿌리내리며 살아온 시간들. 신산스런 날들을 함께 겪어낸 붓아, 고맙다. 네가 있어서 사는 일이 덜 외로웠다.

이 빼어난 여백의 미학은 들끓는 욕망과 상처, 낭떠러지 같은 시간들 속에서도 꽃 피우기를 포기하지 않은 위대한 화가의 격조 높은 예술세계다. 여백은 단호히 버릴 때만 가능하다. 채우는 것보다 버리는 것이 훨씬 어렵고 아프다.


정지원 / 시인
정지원 / 시인
벼랑 끝에 아스라이 핀 꽃가지를 뻗으며 열망한 것들도 시간과 함께 흘러갈 것이다. 흐르지 않는 물은 탁하고 어둡다. 지나온 삶을 관조하며 봄물에 배를 띄우면 하늘도, 땅도 빗장을 풀고 고요한 평화로 한없이 넓어진다. 영원의 눈동자에 맺힌 가없이 고즈넉한 정경은 여전히 원고지에 만년필로 시를 쓰시는 은사님의 등을 닮았다. 선생님들의 자애로운 사랑을 받아 마시며 물처럼 나도 어른이 된 것이다.

정지원/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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