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최고의 ‘사랑의 화가’ 신윤복. 그가 그린 ‘월하정인’과 ‘미인도’를 보고 있으면 세련된 붓맛과 함께 애간장을 녹이는 묘한 매력에 빨려 들어간다.
정지원 시인의 교과서 미술기행 / 신윤복의 ‘월하정인’ ‘미인도’
이제 곧 거짓말처럼 고개 돌릴 때마다 잎이 물드는 황홀한 색색의 시간이 당신에게 깃들 것이다. 그 때 깊숙이 감춰둔 당신 마음의 현들이 나처럼 떨렸다면 달빛이 새하얀 꽃잎으로 흩날리는 밤, 천천히 옛 기억을 찾아 걸어나와도 좋다. 우리에게 허락된 가을이 얼마나 남아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으므로. 한 번쯤 그냥 이렇게 달빛이 이끄는 대로 가슴 속에 담아둔 석류 같은 사연 하나 열어 보아도 좋지 않을까.
신윤복의 그림을 볼 때마다 나는 늘 이렇게 홀린다. 내 심장을 정신없이 달뜨게 하는 이 뜨겁고 강렬한 흡인력은 세련된 붓맛과 함께 묘한 매력을 뿜어낸다. 날렵하고 섬세하며 애간장을 녹이는 그림 한 장 한 장의 재미가 곧장 한 편의 사랑 노래가 된다. 그 사랑 노래에는 무궁무진한 이야기들이 숨어있다. 이 솔직하고 자유로운 풍속화가 없었다면 얼마나 우리 미술은 심심했을까.
신윤복은 태생적으로 유난히 예민한 성정을 지닌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의 자유로운 기질이 풍류를 빙자한 양반 사회의 허위를 그대로 보아 넘겼을 리 없다. 겉으로는 가장 도덕군자인 척하면서 실상은 그 침이 바닥에 채 떨어지기도 전에 기방으로 향하는 이중성을 보기 좋게 풍자하고 있다. 결국, 그런 그의 시대비판적인 정신이 빌미가 되어 그는 도화서에서 쫓겨난다.
신윤복은 조선 시대 최고의 사랑의 화가다. 나는 ‘월하정인’보다 가슴이 터질 것 같고 짜릿짜릿한 장면의 연가는 아직까지 들어본 적이 없다. 그래서일까. 이 그림을 볼 때마다 마음이 잇꽃처럼 붉게 타들어가고 손끝도 파르르 떨린다. 밤은 깊어가고 방 안을 서성이다 고양이 걸음으로 대문을 몰래 나서니 간이 떨어질 것만 같다. 누가 볼 새라 뒤도 돌아보지 않고 쓰개치마 뒤집어쓰고 님에게로 간다. 조금만 더 가면, 저 모퉁이만 지나면, 님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몇 걸음만 더 가면.
드디어 그토록 사모하던 두 사람이 만났다. 님은 등불을 들고 성큼성큼 다가오는데 나는 얼어붙었는지 걸음을 뗄 수가 없다. 길에는 지나가는 사람 하나 없는데, 님은 나를 못 알아 보셨나, 휙 그냥 지나치신다. ‘저 여기 있어요.’ 말도 못 하고 서럽고 무안해서 눈물나려는데 큰 걸음으로 오시더니 “밤길에 꽃이 하도 곱길래 그림자도 고운가 보려 한 것을, 이런 눈물까지 흘리시다니요.” 하며 웃으신다. 부끄러워 눈도 못 맞추는 여인과 그 여인을 사랑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는 한 사내. 뻐근하게 아름다운 달밤의 밀회. 이 그림이 바로 ‘월하정인’이다.
월하정인은 그림도 그림이지만 그 옆의 시가 압권이다. ‘달은 침침하고 밤은 깊은데/ 두 사람 마음은 둘만 아는 것을.’ 이 그림의 모퉁이를 지나면 파격적으로 초생 달과 수풀이 담벼락 속에 그려져 있고 집도 맞붙어 있다. 이 두 사람은 어쩌면 이렇게 몰래 만날 수밖에 없는 슬픈 운명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같이 살 집도 도망갈 숲도 없다. 두 사람의 차림새를 보니 둘 다 양반이고 어쩌면 이 밤이 마지막 만남일 수도 있다. 남은 그리움들은 아프고 무정한 세월을 따라 천천히 부식될 것이다. 그러다 달빛이 창가에 쏟아지는 가을밤이면 그 목소리 떠올라 서글퍼지기도 하겠지.
‘미인도’는 한 마디로 참 자랑스럽다. 이 그림이 아니었다면 어디다가 우리나라 여자들이 이렇게 예쁘다고 자랑하고 다닐 수 있었을까. 갓 피어난 금강초롱처럼 싱그럽고 어여쁜 조선미인은 신윤복이 아니었다면 절대로 그려낼 수 없었을 것이다. 반듯한 이맛전과 단정하고 참한 눈매, 보글보글한 얼굴, 가는 목선과 한 품에 쏘옥 안길 것만 같은 여린 어깨선. 수줍은 듯한 입술과 보송보송한 솜털까지 어디 하나 미운 구석이 없다. 이 그림은 사랑의 눈동자에 담긴 여인의 표정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렇게 보는 사람의 마음까지 화사하게 물들일 수는 없다. 그런데 이 이 고운 여인의 손가락이 지금 막 옷고름을 사르르 풀려고 하고 있다. 옷고름보다 마음이 먼저 당신을 향해 풀려버린 것이겠지만….
나는 이 그림을 볼 때면 대학시절 은사님 박두진 선생님의 시 ‘꽃에게’가 떠오른다. 특히 마지막 두 행. ‘왜 꽃이냐, 어떻게 하라고 꽃이냐, 어떻게 할 수도 없게 꽃이냐/ 왜 하필이면 내 앞에서 꽃이냐.’ 신윤복은 이 그림 속 여인의 표정 하나, 숨소리, 말투, 웃음까지 가슴 가득 품고 그린 것은 아니었을까? 하필이면 내 앞에 꽃인 사람, 겹겹이 내 안에서 피어나는 사람을 당신은 차마 떨쳐내지 못하고 품어본 적 있는가. 신윤복의 그림들이 새삼 가슴 속으로 파고든다면 당신은 이미 가을을 타는 중이다.
‘미인도’
정지원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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