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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교육

달빛아래 겹겹이 피어나는 사랑

등록 2007-09-16 15:49

조선시대 최고의 ‘사랑의 화가’ 신윤복. 그가 그린 ‘월하정인’과 ‘미인도’를 보고 있으면 세련된 붓맛과 함께 애간장을 녹이는 묘한 매력에 빨려 들어간다.
조선시대 최고의 ‘사랑의 화가’ 신윤복. 그가 그린 ‘월하정인’과 ‘미인도’를 보고 있으면 세련된 붓맛과 함께 애간장을 녹이는 묘한 매력에 빨려 들어간다.

정지원 시인의 교과서 미술기행 / 신윤복의 ‘월하정인’ ‘미인도’

이제 곧 거짓말처럼 고개 돌릴 때마다 잎이 물드는 황홀한 색색의 시간이 당신에게 깃들 것이다. 그 때 깊숙이 감춰둔 당신 마음의 현들이 나처럼 떨렸다면 달빛이 새하얀 꽃잎으로 흩날리는 밤, 천천히 옛 기억을 찾아 걸어나와도 좋다. 우리에게 허락된 가을이 얼마나 남아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으므로. 한 번쯤 그냥 이렇게 달빛이 이끄는 대로 가슴 속에 담아둔 석류 같은 사연 하나 열어 보아도 좋지 않을까.

신윤복의 그림을 볼 때마다 나는 늘 이렇게 홀린다. 내 심장을 정신없이 달뜨게 하는 이 뜨겁고 강렬한 흡인력은 세련된 붓맛과 함께 묘한 매력을 뿜어낸다. 날렵하고 섬세하며 애간장을 녹이는 그림 한 장 한 장의 재미가 곧장 한 편의 사랑 노래가 된다. 그 사랑 노래에는 무궁무진한 이야기들이 숨어있다. 이 솔직하고 자유로운 풍속화가 없었다면 얼마나 우리 미술은 심심했을까.

신윤복은 태생적으로 유난히 예민한 성정을 지닌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의 자유로운 기질이 풍류를 빙자한 양반 사회의 허위를 그대로 보아 넘겼을 리 없다. 겉으로는 가장 도덕군자인 척하면서 실상은 그 침이 바닥에 채 떨어지기도 전에 기방으로 향하는 이중성을 보기 좋게 풍자하고 있다. 결국, 그런 그의 시대비판적인 정신이 빌미가 되어 그는 도화서에서 쫓겨난다.

신윤복은 조선 시대 최고의 사랑의 화가다. 나는 ‘월하정인’보다 가슴이 터질 것 같고 짜릿짜릿한 장면의 연가는 아직까지 들어본 적이 없다. 그래서일까. 이 그림을 볼 때마다 마음이 잇꽃처럼 붉게 타들어가고 손끝도 파르르 떨린다. 밤은 깊어가고 방 안을 서성이다 고양이 걸음으로 대문을 몰래 나서니 간이 떨어질 것만 같다. 누가 볼 새라 뒤도 돌아보지 않고 쓰개치마 뒤집어쓰고 님에게로 간다. 조금만 더 가면, 저 모퉁이만 지나면, 님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몇 걸음만 더 가면.


‘미인도’
‘미인도’
드디어 그토록 사모하던 두 사람이 만났다. 님은 등불을 들고 성큼성큼 다가오는데 나는 얼어붙었는지 걸음을 뗄 수가 없다. 길에는 지나가는 사람 하나 없는데, 님은 나를 못 알아 보셨나, 휙 그냥 지나치신다. ‘저 여기 있어요.’ 말도 못 하고 서럽고 무안해서 눈물나려는데 큰 걸음으로 오시더니 “밤길에 꽃이 하도 곱길래 그림자도 고운가 보려 한 것을, 이런 눈물까지 흘리시다니요.” 하며 웃으신다. 부끄러워 눈도 못 맞추는 여인과 그 여인을 사랑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는 한 사내. 뻐근하게 아름다운 달밤의 밀회. 이 그림이 바로 ‘월하정인’이다.

월하정인은 그림도 그림이지만 그 옆의 시가 압권이다. ‘달은 침침하고 밤은 깊은데/ 두 사람 마음은 둘만 아는 것을.’ 이 그림의 모퉁이를 지나면 파격적으로 초생 달과 수풀이 담벼락 속에 그려져 있고 집도 맞붙어 있다. 이 두 사람은 어쩌면 이렇게 몰래 만날 수밖에 없는 슬픈 운명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같이 살 집도 도망갈 숲도 없다. 두 사람의 차림새를 보니 둘 다 양반이고 어쩌면 이 밤이 마지막 만남일 수도 있다. 남은 그리움들은 아프고 무정한 세월을 따라 천천히 부식될 것이다. 그러다 달빛이 창가에 쏟아지는 가을밤이면 그 목소리 떠올라 서글퍼지기도 하겠지.

‘미인도’는 한 마디로 참 자랑스럽다. 이 그림이 아니었다면 어디다가 우리나라 여자들이 이렇게 예쁘다고 자랑하고 다닐 수 있었을까. 갓 피어난 금강초롱처럼 싱그럽고 어여쁜 조선미인은 신윤복이 아니었다면 절대로 그려낼 수 없었을 것이다. 반듯한 이맛전과 단정하고 참한 눈매, 보글보글한 얼굴, 가는 목선과 한 품에 쏘옥 안길 것만 같은 여린 어깨선. 수줍은 듯한 입술과 보송보송한 솜털까지 어디 하나 미운 구석이 없다. 이 그림은 사랑의 눈동자에 담긴 여인의 표정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렇게 보는 사람의 마음까지 화사하게 물들일 수는 없다. 그런데 이 이 고운 여인의 손가락이 지금 막 옷고름을 사르르 풀려고 하고 있다. 옷고름보다 마음이 먼저 당신을 향해 풀려버린 것이겠지만….

정지원 / 시인
정지원 / 시인
나는 이 그림을 볼 때면 대학시절 은사님 박두진 선생님의 시 ‘꽃에게’가 떠오른다. 특히 마지막 두 행. ‘왜 꽃이냐, 어떻게 하라고 꽃이냐, 어떻게 할 수도 없게 꽃이냐/ 왜 하필이면 내 앞에서 꽃이냐.’ 신윤복은 이 그림 속 여인의 표정 하나, 숨소리, 말투, 웃음까지 가슴 가득 품고 그린 것은 아니었을까? 하필이면 내 앞에 꽃인 사람, 겹겹이 내 안에서 피어나는 사람을 당신은 차마 떨쳐내지 못하고 품어본 적 있는가. 신윤복의 그림들이 새삼 가슴 속으로 파고든다면 당신은 이미 가을을 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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