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범의 거꾸로 공부법
이범거꾸로공부법/
철학을 전공한 한 선배가 술자리에서 ‘이런 문제로 논술고사를 보는 건, 불필요하고 무의미하다’고 일갈한다. 그럴 만도 하다. 적지 않은 인문학 전공자들이 ‘바람직한 논술고사’를 프랑스의 철학 바칼로레아(baccalaureat) 시험의 한국판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 이른바 ‘통합교과형 논술’ 문제의 유형은 프랑스 철학 바칼로레아에서 벗어나 미국 대학수학능력시험(SAT)의 읽기(critical reading)와 쓰기(essay writing)를 결합시킨 모양새인 것이다.
철학 바칼로레아가 우리나라 논술고사의 원형으로 작용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철학 바칼로레아는 애초에 우리나라에 그대로 도입되기 어려웠다. 철학 바칼로레아 시험에는 제시문이 없이, ‘진리는 경험을 통해 확증될 수 있는가?’ 라든가 ‘우리는 욕망을 해방시켜야 하는가, 욕망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하는가?’와 같은 달랑 한두줄짜리 질문이 있을 뿐이다. 우리로선 당황스러운 문제이다. 하지만 프랑스 학생들은 철학을 전공한 교사로부터 필수 교과목으로서 철학을 배우므로, 이에 근거해 논술문을 써내려갈 수 있다. 예컨대 진리-경험 문제에는 데카르트와 베이컨이, 욕망 문제에는 에피쿠로스와 스토아학파가 동원 가능하다.
이런 시험이 철학 교육의 기반이 없는 우리나라에 그대로 도입되기란 불가능했다. 한국의 논술고사가 철학 바칼로레아와 달리 처음부터 ‘제시문’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 타협의 증거이다. 철학사상사적 이야깃거리를 담고 있는 제시문을 보여주고, 이에 대한 ‘독해’에 근거해 자신의 논지를 전개하도록 한 것이다. 이것이 과거 우리나라의 표준적인 논술고사였다. 애초에 ‘짬뽕’이라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고, 무게중심이 ‘지식’(철학사상사적 내용)이냐 ‘방법’(해석 및 추론, 비판적 사고)이냐를 놓고 진자운동을 할 운명이었다.
그렇다면 최근에 이른바 ‘통합교과형 논술’로 전환되면서 무엇이 변화했는가?(이하 문과 논술에 국한된 내용임) 일단 이전보다 훨씬 소재가 다양해진 것이 눈에 띈다―시장경제의 문제점에서부터 댐건설 논란, 이혼율 지표, 조선시대 진경산수화에 이르기까지. 그런데 이와 아울러 시험의 근본 성격에 결정적인 변화가 있었다. ‘지식’과 ‘방법’ 가운데에서 확실히 ‘방법’ 중심의 시험으로서 그 성격을 자리매김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SAT 읽기-쓰기를 모델로 삼은 새로운 논술고사의 가장 큰 특징이다.
서울대 통합교과형 논술 1·2차 예시문제의 1번 문제가 이를 잘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다. 이 문제들은 제시문과 이에 부속된 세개씩의 질문으로 구성돼 있는데, 첫번째 질문은 해석(제시문의 논지를 요약할 것을 요구), 두번째 질문은 추론(수능 언어영역의 추론 문제와 사실상 같음), 세번째 질문은 판단(가치판단에 입각한 자신의 주장 및 이를 뒷받침하는 논거를 요구) 등으로 도식화돼 있다. 물론 철학사상사적 내용도 출제되지만, 이에 대한 선(先)이해를 요구하는 문제는 아니다―수능 언어영역 문제에서 칸트가 나오지만 칸트 철학에 대한 선이해를 요구하지 않는 것처럼. 유럽 인문교육의 전통선상에 놓여있는 철학 바칼로레아와 미국식 프래그머티즘을 반영하는 SAT 읽기-쓰기 사이에는 뜻밖에 이처럼 깊은 심연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이범 와이즈멘토 이사, EBS·곰TV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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