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3월 서울 강서구 양천향교에서 공자를 추모하는 봄철 석전제가 열려 참석자들이 예를 봉행하고 있다. 이종근 기자
통합논술 교과서 / (29) 중용의 의미
관련 논제 해결하기 / [난이도 수준-초등 고학년~중1]
<논제> 공자는 이상적인 삶의 방식으로 ‘중용’을 제시했지만, 제시문 (가)에 나타난 것처럼 현실에서 ‘중용’의 삶을 살아가기란 쉽지 않다. 그 이유는 무엇인지 제시문 (나), (다), (라), (마)를 참고해 논술하시오. (700~800자)
(가)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올바른 도가 행하여지지 않고 있음을 내가 안다. 지혜로운 자는 지나치고, 어리석은 자는 미치지 못한다. 올바른 도가 밝혀지지 않고 있음을 내가 안다. 현명한 자는 지나치고 못난 자는 미치지 못한다. 사람 중에 마시고 먹지 않는 이는 없으나, 맛을 제대로 아는 이는 드물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사람들은 모두 나는 지혜롭다고 말하나, 그를 몰아다가 그물이나 덫이나 함정 가운데 넣어도 그것을 피할 줄 모른다. 사람들은 모두 나는 지혜롭다고 말하나, 중용을 택하여 한 달 동안도 지켜내지 못한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사람들이 잘 모르는 특이한 것을 추구하고 괴이한 짓을 행하면 후세에 칭찬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나 나는 그런 짓을 하지 않겠다. 군자가 도를 따라 행하다가 중도에 그만두기도 하지만 나는 그만두지 못한다. 군자는 중용에 의지하여 세상에서 숨기어져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후회하지 않는 것이니, 오직 성인만이 그렇게 할 수 있다.”
- <중용장구> 제4장, 제7장, 제11장
(나) 하늘이 사람들에게 내려준 것을 ‘본성’이라 하고, ‘본성’에 따르는 것을 ‘도’라 하고, ‘도’를 닦는 것을 ‘가르침’이라 한다. ‘도’라는 것은 잠시도 떨어져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니, 떨어져 있을 수 있다면 ‘도’가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군자는 남이 그를 보지 않는 곳에서도 경계하고 삼가며, 남이 그에 대하여 듣지 않는 곳에서도 두려워하는 것이다. 숨겨진 것보다 더 잘 드러나는 것이 없으며 미세한 것보다 더 잘 나타나는 것은 없다. 그러므로 군자는 그가 홀로 있을 때를 삼가는 것이다. 기쁨·노여움·슬픔·즐거움의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것을 ‘중’이라 하고, 드러나서 모두 절도에 맞는 것을 ‘화’라 한다. ‘중’이라는 것은 천하의 위대한 근본이고, ‘화’라는 것은 천하에 통달되는 ‘도’인 것이다. ‘중’과 ‘화’에 이르게 되면 천지가 자리 잡히고 만물이 육성되는 것이다. 정성이란 것은 하늘의 도요, 정성스럽게 하는 것은 사람의 도이다. 정성스러운 사람은 힘쓰지 않아도 알맞게 되며 생각하지 않아도 터득하게 되어 의젓이 도에 알맞게 되는 것이니 바로 성인인 것이다. 정성스럽게 한다는 것은 선을 가리어 굳게 지키는 것이다. 널리 배우고, 자세히 연구하고, 신중히 생각하고, 밝게 분별하며, 성실히 행동해야 한다.
- <중용장구> 제1장, 제20장
(다) 아마도 주식 시장의 경향 분석에는 어떤 분야보다도 많은 지적 에너지가 투입되었을 것이다. 돈이 걸려 있는 문제이니 오죽하겠는가? 그러나 세계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들이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아부었는데도 그 체계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일관된 방법이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이는 그러한 인과 관계가 원래 존재하지 않으며 주식 시장은 사실 무작위적임을 뜻한다.
사람들이 경향을 바라볼 때 흔히 저지르는 두 번째 오류는 어떤 방향성은 맞게 찾아냈으나 같은 방향으로 동시에 움직이는 다른 어떤 것이 그 원인이라고 잘못 가정하는 것이다. 인과 관계를 융합시키는 이 오류는 어떤 순간에는 모든 것이 같은 방향으로 움직인다는 잘못된 믿음에서 발생한다(핼리 혜성이 지구에서 멀어짐에 따라 우리집 고양이의 성질도 점점 고약해져가고 있다). 연관된 것처럼 보이는 사건들의 대부분은 실제로 아무런 인과 관계가 없다. 이와 관련된 전형적인 한 예로, 한 유명한 통계학자가 19세기 미국의 침례교 목사의 수와 술주정으로 잡혀간 사람 수 사이의 관계를 발표한 것이 있다. 언뜻 보면 두 수치는 진짜 밀접한 연관 관계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둘 사이에 인과 관계는 없으며 두 수치의 증가는 미국 인구 전체의 급격한 증가라는 다른 요인에서 온 결과일 뿐이라고 추정해도 좋을 것이다. (중략)
외견상의 방향성 또는 경향은 사실 한 시스템 안에서 변이의 정도가 축소되거나 확장된 부차적 결과이지 어떤 것이 특정한 방향으로 움직여간 결과가 아님을 깨닫지 못하는 데서 오류가 생겨난다. 메이저리그의 평균 타율이 그렇고, 박테리아 형태가 유사 이래 지금까지 계속된 것에서 볼 수 있듯이 한 시스템 내의 평균값은 언제나 일정하다. 방향성이란 그러한 시스템의 가장자리가 확장되거나 위축되는 변이의 한 극단에서 찾아낸 희귀한 대상에 근시안적 초점을 맞추는 것에서 비롯된다. 변이의 경계가 확장되고 축소되는 이유는 평균값이 변화되는 원인과는 전혀 다른 범주의 것이다. 따라서 경계선의 확장과 위축을 전체 덩어리의 확장과 위축으로 착각하면 완전히 엉뚱한 해석을 내릴 수 있다.
-S. J. 굴드, <풀하우스> 54~56쪽
(라) 아리스토텔레스의 도식에 상대적으로 더 잘 들어맞는 덕들이 있다는 것은 수긍될 수밖에 없다. 너그러움은 인색과 낭비 사이에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친절의 양편에는 두 악(惡)이 서로 맞서 있는가? 저 도식이 잘 들어맞는 경우라고 하더라도, 저 도식이 꼭 생기 없거나 머뭇거리는 덕론을 동반하는 것은 아니다. 그 자체만 놓고 본다면, 중용설은 과다와 과소를 양 극단으로 하는 눈금의 어디쯤에 적정이 자리잡고 있는가에 대하여 말해 주는 바가 전혀 없다. 우리 모두는 너그러움이 낭비와 인색 사이에 자리잡고 있음에 대해서는 꽤나 쉽게 의견의 일치를 볼 수 있지만, 그 분기점이 되어야 할 곳은 어디냐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입장을 취하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내 눈에는 인색한 사람으로 보이는 이가 당신 눈에는 너그러운 품성의 소유자로 비칠 수도 있을 것이다. 때문에 도덕적인 덕은 맞서 있는 두 악한 상태들 사이에 놓여 있는, 품성의 상태라는 언명이 제공하는 실천적인 지침은, 그것이 보수적인 류의 것이건 혁신적인 류의 것이건 간에 거의 전무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도덕이 갖고 있는 진정한 색깔과 진정한 내용은 그의 이론적 논설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개개의 덕과 악들에 대한 그의 상세한 기술에서 나온다. 개개의 덕 및 악과 관련하여, 그는 자신의 동시대인들이 품고 있던 생각과 그들이 취했던 입장을 얼마간 채택하기도 한다.
-J. L. 아크릴,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 254~2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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