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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교육

이성은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가

등록 2008-01-27 15:42수정 2008-01-27 20:33

박용성 교사의 시 읽기, 논술하기
박용성 교사의 시 읽기, 논술하기
박용성 교사의 시 읽기, 논술하기 /
[난이도 수준-고2~고3]

<시 읽기>

중세 천년을 왜 암흑기라고 하는지 알아? 역사적으로 보면, 그렇게 오랜 기간에 그렇게 발전이 더딘 적이 없었기 때문이래. 중세인들은 억압적인 종교의 울타리에 갇혀서,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었어. 마녀 재판이 그 좋은 예야. 전염병이 돌라치면 원인을 찾아 치료하는 게 아니라, 마녀가 저주를 내렸다며 주위에서 사라져 주었으면 하는 여자를 마녀로 찍었어. 예컨대, 정신이 이상한 여자는 귀찮다는 이유로, 가난한 노파는 부담스럽다는 이유로, 젊고 예쁜 처녀는 남자들의 인기를 독차지한다는 이유로. 찍히고 나면 끝이야. 반론할 기회가 없었거든. 자백할 때까지 고문이 계속되었을 뿐이니까. 이렇게 희생당한 수가 유럽에서만 900만 명 가까이 된대. 이 끔찍한 마녀 재판은, 왜 중세가 무너져야 하는지를 웅변적으로 보여 주지.

그런데 17세기 이후 꾸준히 발전한 자연과학을 통해 사람들은 우주의 질서를 새롭게 알게 되었고, 세계를 과학적으로 인식하게 되었어. 특히 코페르니쿠스는 인간을 우주의 중심에서 몰아내어, 무한 공간의 구석에 있는 한 점으로 떨어뜨렸지. 인간으로 하여금 ‘주제 파악’을 하게 한 거야. 데카르트는 “나는 믿는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중세적 사유 방식에서 벗어나,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근대적 선언을 하기에 이르지. 이제 인간은 자신의 주인이 신이 아니라 바로 이성을 가진 그 자신이라고 당당하게 밝힌 거야.

인간의 이성이 이뤄낸 사회적 진보와 역사적 발전은 놀라웠어. 우리 사회가 이성에 토대를 두고 발전해 온 과학 기술에 힘입어,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누리고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잖아. 하지만 인간의 해방을 내걸고 추진된 이성의 기획이, 현재의 시점에서 보면 썩 밝아 보이지만은 않아. 풍요의 뒤안길에는 수많은 근대화의 병리가 켜켜이 쌓여 있거든. 정말이지, 인간은 더 이상 세계의 주인이 아니고 무엇인가―물질이건, 제도이건, 사상이건 간에―에 의해 노예 취급받고 있어. 인간을 중세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한 이성이, 인간을 다시 새로운 억압의 울타리에 가두어 버린 것이 아닐까? 우리가 김광규를 만나러 가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어.


이성은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가
이성은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가
일찍부터 우리는 믿어 왔다.
우리가 하느님과 비슷하거나
하느님이 우리를 닮았으리라고

말하고 싶은 입과 가리고 싶은 성기의
왼쪽과 오른쪽 또는 오른쪽과 왼쪽에
눈과 귀와 팔과 다리를 하나씩 나누어 가진
우리는 언제나 왼쪽과 오른쪽을 견주어
저울과 바퀴를 만들고 벽을 쌓았다.

나누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
자유롭게 널려진 산과 들과 바다를
오른쪽과 왼쪽으로 나누고

우리의 몸과 똑같은 모양으로
인형과 훈장과 무기를 만들고
우리의 머리를 흉내내어
교회와 관청과 학교를 세웠다
마침내는 소리와 빛과 별까지도
왼쪽과 오른쪽으로 나누고

이제는 우리의 머리와 몸을 나누는 수밖에 없어
생선회를 안주 삼아 술을 마신다
우리의 모습이 너무나 낯설어
온몸을 푸들푸들 떨고 있는
도다리의 몸뚱이를 산 채로 뜯어 먹으며
묘하게도 두 눈이 오른쪽에 몰려 붙었다고 웃지만

아직도 우리는 모르고 있다
오른쪽과 왼쪽 또는 왼쪽과 오른쪽으로
결코 나눌 수 없는
도다리가 도대체 무엇을 닮았는지를

­김광규, <도다리를 먹으며>

‘봄 도다리, 가을 전어’라는 말이 있듯이 봄에 먹는 도다리는 그야말로 일품이야. 가을에 비해 씨알은 잘아도 고소하고 담백한 맛이 기가 막혀. 이렇게 맛있는 도다리를 먹으며 그냥 입에 착착 감기는 맛만 즐겨도 될 텐데, 시적 화자는 이러한 일상의 세계에 머물지 않고 우리를 모순으로 가득 찬 현실 세계로 데려가네. 우선 그는 “우리가 하느님과 비슷하거나/ 하느님이 우리를 닮았으리라고” “일찍부터 우리는 믿어 왔다.”라고 선언해. 〈창세기〉의 바벨탑 이야기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말이야. 당시 사람들이 벽돌로 탑을 세워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게 하려고 했듯이, 지금도 ‘이성’의 힘을 바탕으로 사람들이 쌓아 가는 바벨탑은 계속 높아지고 있잖아.

결과는 뻔해. 자기 오만에 빠진 인간은 자기밖에 모르게 되고, 스스로를 세상의 유일한 기준이라고 착각하게 돼. “말하고 싶은 입과 가리고 싶은 성기”를 중심으로 “오른쪽과 왼쪽에/ 눈과 귀와 팔과 다리”가 하나씩 붙어 있는 것을 본 인간은, 자기 몸에 비추어 절대 불변의 규율을 제정하지. 침대에 비해 짧으면 다리를 잡아 빼 키를 늘리고, 길면 다리를 절단하는 프로크러스테스처럼, 인간은 획일적인 잣대로 모든 것을 재단해. 인간 세상에 양팔을 가진 ‘저울’을 만들고, 양쪽으로 붙어 굴러가는 ‘바퀴’를 만들고, 결국 다양하게 존재하는 가치들이 넘나들지 못하게 ‘벽’을 쌓아.

제 버릇 개 주겠어? 인간은 결국 “나누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 자유롭게 널려진 산과 들과 바다”마저도 “오른쪽과 왼쪽으로 나누고” 백이 아니면 흑으로 편을 가르지. 그리하여 자기들―‘선’이라고 생각하는―과 생각이 다른 집단을 무조건 ‘악’이라고 몰아붙여. 흑과 백 사이에는 회색이나 청색 등 다른 색도 분명히 존재하는데 말이야. 한반도를 두 동강이로 나눈 분단 이데올로기도, 겉으로는 그럴 듯하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획일적인 흑백 논리에 지나지 않아.

남북의 정치 권력이 자신의 지배를 확고히 하기 위해 어떤 사회 체제를 만들어왔는지 보면 알 수 있어. 뒤에서 조작이 가능한 꼭두각시(인형)를 만들고, 맹목적 복종을 부추기는 완장(훈장)을 통해 사람들을 꾀며, 그래도 말 안 듣는 이들을 위협하려고 각종 제도(무기)를 완비하지. 그리고 사람들의 의식을 교묘하게 지배하는 기제(교회)와 함께, 광범위한 통제 조직(관청)과 교육 기관(학교)을 통해 분단을 고착화시켜. 그리하여 “마침내는 소리와 빛과 별까지도/ 왼쪽과 오른쪽으로 나누고” 제멋대로 색칠하지.

시인 김남주가 “삼팔선은 삼팔선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울부짖은 까닭은 멀리 있지 않아. 정말이지, 우리는 북이 즐겨 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동무’라는 소리를 입에 올리기도 어려운 시대를 살아 왔어. ‘인민’이라는 그 좋은 단어마저도 모든 공식적 대화에서 사라진 지 오래야. 붉은빛으로 된 머리띠만 해도 사상을 검증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어. 어디 그뿐인가? 하늘의 별을 그리면서도 북의 깃발을 상징하는 어떤 모습이 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는 자기 검열을 하며 우리는 살고 있어.

이처럼 분단이 고착화되고 심화되면서 고단한 우리네 삶은 결국 자기 분열에 빠질 수밖에 없어. 그래서 “이제는 우리의 머리와 몸을 나누는 수밖에 없어/ 생선회를 안주 삼아 술을 마”셔. 그러면서 시적 화자는, 몸 따로 마음 따로 해체되어 버린 “우리의 모습이 너무나 낯설어” 우리를 보고 있는 도다리마저 “온몸을 푸들푸들 떨고 있”다고 하지. 하지만 우리는 아직도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채 “도다리의 몸뚱이를 산 채로 뜯어 먹으”면서도 “묘하게도 두 눈이 오른쪽에 몰려 붙었다고” 도다리를 오히려 비웃어.

도다리가 이상한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이상한데도 “오른쪽과 왼쪽 또는 왼쪽과 오른쪽으로/ 결코 나눌 수 없는/ 도다리가 도대체 무엇을 닮았는지를” “아직도 우리는 모르고 있”어. 도다리야말로 중심과 주변의 충돌, 지배와 복종의 대립,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의 갈등 같은 일체의 분열적인 삶을 타개함으로써 이루어지는 융합과 합일의 세계인데, 그것이 바로 하느님을 닮은 모습인데, 아니 그것이 바로 중세의 어둠을 무너뜨린 이성의 처음 기획이었는데, 뒤틀릴 대로 뒤틀린 시각의 인간이 알 턱이나 있겠어?

흔히들 이성에 합당한 성질을 가리켜 합리성이라고 하지. 합리성? 좋지. 하지만, 합리성―정확히 말하면 효율성―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우리에게 던져지는 명령에는 섬뜩함이 묻어 있어.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고, 주면 주는 대로 받고, 그렇다면 그런 줄로 알아.”라는 식으로 우리에게 강요되는 명령에는,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착취와 사상적 기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 있거든. 마르쿠제의 말처럼, ‘왜’라는 비판적 질문이 사라지고 ‘예’라는 무조건적 긍정만이 남은 사회는 바로 차원이 낮아도 한참 낮은 1차원적 사회거든.

그동안 현대 사회는 과학 기술과 관련된 ‘도구적 이성’만이 기형적으로 발달해 왔어. 무엇보다 인간의 이성에서 가치 합리적 측면을 없앰으로써, 목적 달성을 위해 가장 효율적인 수단을 선택하는 기준으로 인간의 이성을 변질시킨 거야. 이성의 또 다른 기능인 목적의 정당성을 검토하는 비판적인 차원은 사라져 버렸다는 말이지. 그리하여 근대 초기 이성이 추구하였던 본래의 역사적 목적이 없어지고, 결국 우리는 맹목의 구렁텅이에 빠져 버렸어. ‘비판적 이성’이 사라져 버린 결과가 얼마나 참혹한지는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거야.

풍요롭고 편리하게 살기 위해서는 도구적 이성도 필요해. 하지만 그것이 과연 인간다운가 하는 비판적 질문이 전제되지 않으면, 풍요로움과 편리함은 도리어 비이성적인 상황을 가져오게 할 수도 있어. ‘경제만 살릴 수 있다면’ 모든 게 용납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 이제 알겠지? 그런데 우리 사회의 합리성은, 한쪽은 기형적으로 커지고 한쪽은 거의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퇴화되었어. 새가 좌우의 날개로 날 듯, 인간 또한 도구적 이성과 함께 비판적 이성의 두 날개로 날아야 하는데 말이야. 하지만 절망하지 마. 삶의 전반적인 합리화가 도리어 자유의 상실과 인간의 소외를 가져오는 이성의 역설(逆說)을 풀어나갈 방법은 분명히 있거든. 이것이 역사에 대한 우리의 신뢰야. 문제는, 김광규의 표현처럼, “아직도 우리는 모르고 있다”는 데에 있지만.

박용성 여수여고 교사, <독서와 함께 구술 논술 뛰어넘기> 저자

<토론하기>

‘이성’이라는 단어는, 인류가 맹목과 무지로 점철된 중세의 어둠을 뚫고 근대라는 새 시대를 여는 상징이었어. 그런데도 이성이 항상 긍정적인 측면만을 지니고 있지는 않아. 이성이 지배하는 인간 사회가 야만에 빠지게 된 것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잖아. 그렇다면 과연 ‘이성’은 인간을 구원할 수 있을까?

<논술하기>

위 글과 관련된 문제(2002학년도 고려대 논술문제)는 인터넷한겨레(www.hani.co.kr.)에서 볼 수 있습니다. 본지에 연재되고 있는 문제에 대한 박용성 선생님의 동영상 강의는 전라남도교육정보원(www.jnei.or.kr)에 들어가 ‘인터넷교육방송→고교논술→실전논술’ 순으로 검색하면 무료로 들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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