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오자를 양산하는 야만적인 교육
오로지 ‘성골(聖骨)’만을 위해 존재했던 학교
초등학교 일제고사가 부활되면서 이로 인한 갈등과 대립이 심화되고 있다. 또 다시 아이들이 무한경쟁으로 내몰리고 있는 것이다. 학창 시절 누구 보다 치열한 학력 경쟁에 내몰렸던 세대의 한 사람으로서 그 시절을 더듬어보며 타의에 의해 일괄적으로 강요되는 경쟁이 얼마나 교육적이었는지 돌아보았다. 내가 초등학교 시절만 하더라도 전국적으로 중학교 입시가 시행되고 있었다. 따라서 적어도 내 또래 이상의 어른들의 학창시절은 오로지 학력에 의해 그 사람의 가치를 평가받던 시대를 살았다고 할 것이다.
이 때 학교생활은 했던 사람들은 누구나 기억하겠지만 학업성적이 우수한 학생은 단지 그 이유 하나 만으로 모든 면에서 특별한 대접을 받았었다. 공부를 잘 하는 학생이라면 다른 모든 면에서 설사 문제가 있다 할지라도 별 문제가 되지 않지만 공부를 잘하지 못하면 인간성이 좋다거나 혹은 다른 부분에서 아무리 특별한 재능을 가졌다고 할지라도 학교와 선생님은 그 학생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내가 다녔던 중학교는 한 학년이 8 학급이었는데 성적 제일주의를 지향하던 요즘 말로 경쟁신봉론자인 교장이 부임하면서 전교 석차 순으로 1반은 우등반 2반은 차등반 등으로 학급을 편성했고, 성적이 낮은 6.7,8 반은 우등반의 수업분위기를 망치지 않기 위한 구실로 숫제 다른 층으로 교실을 배치했었다. 성적에 대한 차별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같은 학년 같은 과목 수업이라 할지라도 상급반은 소위 ‘실력 있다고 소문난 선생님’을, 나머지 학급은 ‘그저 그런 선생님(당사자에게는 죄송하지만)’을 배치했으니 이러한 차별에 대한 모멸감은 학생 뿐 아니라 해당 교사에게 있어서 더 모욕적이었을 것이다.
당시는 지금과 달리 월 단위로 성적을 평가했는데 월말고사가 끝나고 성적이 나오면 대대적인 숙청이 단행되었다. 전교 석차가 60등 이하로 밀린 학생은 2반으로 쫓겨가야 했고, 60위권 내로 진입한 학생은 가방을 싸들고 교장실 옆 우등생 교실로 입성했지만 그들 역시 승리자는 아니었다. 우리는 성적이 항상 상위권에 속해 늘 1반에 머물러 있는 아이들을 ‘성골(聖骨)’이라 불렀고, 성적이 떨어져 2반으로 쫓겨갔다 와신상담하여 돌아온 아이들을 ‘진골(眞骨)’이라 불렀다. 반면 처음에는 1반에 들지 못했다가 성적이 향상하여 1반으로 들어온 아이들을 ‘육두품(六頭品)’이라고 했다.
잦은 성적 평가와 학급 이동은 성골을 제외한 모든 아이들의 마음에 깊을 상처를 남겼다. 학교의 모든 지원은 상위 10%의 ‘성골’에 집중되어 있었고, 우리 학교에서 나머지 90%의 아이들은 단지 숫자에 불과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푸대접을 받았다.
이처럼 상위권 학생들이 과도한 경쟁으로 인한 스트레스로 시달리고 있었던 반면, 하급반의 교육은 거의 포기한 상태로 방치되어 있었다. 학교는 중간 이하의 다수 학생들의 진로에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교육을 포기한 교실에서는 욕설과 폭력이 난무했다. 급기야는 교사의 체벌에 모멸감을 느낀 한 학생이 수업 중 여선생님에게 폭력과 폭언을 행사하여 학생은 퇴학당하고 선생님은 폭행의 충격을 이기지 못해 사직하는 불행한 사건까지 발생하고 말았다.
10%를 위해 90%가 희생해야 한다는 경쟁논리의 오류
포괄적인 입장에서 교육이 어떤 것이라고 단언하기는 쉽지 않지만 교육받는 당사자인 학생들의 입장에서 ‘교육은 사회인으로 적응해 나가기 위한 과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며, 그 과정에서 적당한 경쟁심은 개인의 발전을 위한 아주 중요한 동기가 된다고 할 것이다. 따라서 시험을 치루지 않는 것 보다는 시험을 치루는 것이 성적을 매기지 않는 것보다 성적을 매기는 것이 확실히 학력신장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동기의 정당성은 학력(공부) 만이 교육의 전부라고 할 수 있을 때만 긍정적이다. 우리가 자랄 때 부모님들은 ‘공부 못하면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사람’이 된다며 우리를 책상 앞으로 내몰았었다. 하지만 오늘날 거리에 활보하는 대부분의 어른들 중 학업성적이 좋았던 사람은 단지 5~10%에 불과할 것이다. 어른들의 말씀대로 라면 ‘거리에 활보하는 90%의 어른들이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런데 나의 중학교 동창들만 보더라도 1반 출신이라고 해서 1등급 인생을 살았다거나 8반 출신이라고 해서 열등한 성인으로 성장했던 것은 아니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에도 우등반과 열등반으로 나뉘어졌었던 상처로 인한 서먹함은 좀 채로 지워지지 않고 있지만 누리는 행복은 결코 성적순이 아니던 것만큼은 분명하다.
오늘날 정부와 교육기관이 추진하려하는 교육정책의 핵심은 ‘자유로운 경쟁을 통한 학력신장’을 표방하고 있다. 이에 대한 개인적 견해를 밝히기에 앞서 단지 학생들의 학력만을 생각한다면 경쟁논리는 무조건 옳다. 그런데 우리 사회가 공부 잘하면 출세하는 사회인 것은 분명하지만 모든 학생이 열심히 공부했다고 해서 모두 출세하지는 못한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아니 소위 공부 잘해서 출세할 수 있는 사람은 상위 10% 미만에 속한다고 볼 때, 상위 10%를 위해 나머지 90%는 실속 없이 시달리고 있다고 봐야 하는 것이다.
단순히 경쟁논리로만 생각한다면 "너도 더 노력하면 돼!"라고 할 수 있겠지만, 국가나 사회의 교육은 탁월한 상위 10%를 위해 나머지 90%가 희생하는 시스템이 아니라 설사 상위권 학생들의 학력 신장을 방조하는 한이 있더라도 교육의 낙오자를 양산하지 않는 시스템을 갖추는 것이 이상적이다.
현재 우리 사회의 학력 인플레이션 현상은 심각한 지경을 넘어선지 오래이다. 지난해 고졸자의 84%가 대학에 진학했지만 졸업한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 일자리 중, 높은 학업 성취도를 필요로 하는 연구직이나 사무직. 고급 기술직 등은 극히 일부분이며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일자리의 대부분은 서비스직이나 비정규직이라는 것을 누구나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생이나 학부모는 연간 1천 만원에 육박하는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고도 가져봐야 별 가치도 없는 대학 졸업장을 포기하지 못한다. 그나마도 포기하면 바로 낙오자가 되고 그로 인해 아이가 감수해야 할 학력 차별이 거대한 벽으로 군림하는 사회가 바로 대한민국이기 때문이다.
제대로 말하자면 국가의 교육은 학력 신장만이 목표가 되서는 안 된다. 학력을 위한 경쟁은 학문을 업으로 삼는 학자나 연구직을 목표로 삼는 공부에 재능 있는 사람끼리 경쟁할 수 있도록 하는 한편, 나머지 대부분의 보통 사람들은 보다 평온한 상태에서 각자가 지닌 재능이나 목표를 추구할 수 있도록 지금 릴렉스하고 자유로운 교육환경이 조성되어야 한다.
그런데 오늘날 정부와 교육단체가 시도하는 교육정책은 전혀 반대로 사회적 낙오자를 양산할 무한 경쟁을 부추기고 있다. 그들은 기필코 우리 사회를 오로지 ‘적자(適者)들만 생존(生存)할 수 있는 야생의 세렝게티’로 만들어야만 직성이 풀릴 모양이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가, 기자가 참여한 <블로그>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한겨레 블로그 내가 만드는 미디어 세상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사설] 노동자 안전 뒷전 중대재해법 후퇴가 민생 대책인가 [사설] 노동자 안전 뒷전 중대재해법 후퇴가 민생 대책인가](http://flexible.img.hani.co.kr/flexible/normal/300/180/imgdb/child/2024/0116/53_17053980971276_20240116503438.jpg)

![[올해의 책] 숙제를 풀 실마리를 찾아, 다시 책으로 ①국내서 [올해의 책] 숙제를 풀 실마리를 찾아, 다시 책으로 ①국내서](http://flexible.img.hani.co.kr/flexible/normal/800/320/imgdb/original/2023/1228/20231228503768.jpg)
![[올해의 책] 숙제를 풀 실마리를 찾아, 다시 책으로 ②번역서 [올해의 책] 숙제를 풀 실마리를 찾아, 다시 책으로 ②번역서](http://flexible.img.hani.co.kr/flexible/normal/500/300/imgdb/original/2023/1228/20231228503807.jp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