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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1.16 18:07 수정 : 2005.01.16 18:07

그래서 방학은 필요한가 보다

며칠 전 학교에 가서 책상 서랍을 정리했다. 서랍을 엎어 보면 별의별 것이 다 나온다. 평가 자료도 수북하고, 미처 답장을 주지 못한 편지도 나온다. 따로 지도하려고 챙겨 두었던 원고도 나오고, 아이들에게 협박용으로 준비했던 경고장도 나온다. 대부분 미운 털이 숭숭 박힌 녀석들과 벌인 전투의 흔적들이다. 그때그때 매듭지어야 했을 것을 차일피일 미루다가 그만 까맣게 잊고 지나친 것이니, 이게 다 빚 뭉치다.

버릴 것은 버리고 챙길 것은 챙겨서 집으로 싸들고 온다. 이제 방학 숙제가 시작되는 것이다. 화해와 격려―다시 만날 아이들인데 해묵은 감정을 가슴에 담아 두고 새학기를 맞을 수는 없지 않은가. 우선 ‘원한’이 컸던 녀석부터 시작해서 짬짬이 숙제하듯 쪽지 편지를 쓴다. 이런저런 점 때문에 속이 상하고 가슴이 아팠다고, 그래도 네가 아까워서 잔소리를 포기할 수 없었다고, 새 학기에 다시 만나면 이젠 자잘한 문제쯤은 훌쩍 뛰어넘어 좀 더 큰 문제로 싸우자고. 이렇게 쓰고 나면 괜히 가슴이 아릿해서 꼭 연애편지처럼 끝을 맺게 된다. 다 쓴 편지는 그 아이가 남긴 족적, 이를테면 반성문이거나 수업시간에 돌리다 빼앗긴 편지쪼가리 같은 것과 함께 넣어 꼭꼭 봉인한다. 미운 감정일수록 빨리 털어버리는 것이 서로를 돕는 길이다.

어찌 미운 녀석들만 있겠는가. 참 근사한 녀석인데, ‘미운털’과 싸우느라 칭찬 한마디 못하고 지나쳐 버린 아이들도 있다. 별스럽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영악한 아이들 틈에서 말없이 제 할 일 챙기고 약속도 꼬박꼬박 잘 지키는, 그런 소박한 녀석들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다. 수업 시간에 그런 아이들의 눈빛과 마주치면 목이 멜 때가 있다. ‘너는 네가 얼마나 이쁜지 잘 모를 것이나, 교실에서 만나는 너는 참 아름답다’라고 쓰면서 오히려 내가 위로를 받는다.

50이 코앞인 늙은 선생이 쓰는 이 촌스런 편지가 제대로 읽힐지는 모르겠으나 이렇게라도 수습을 해야 마음이 개운해지고 경쾌해진다. 하긴 편지 한 통으로 어찌 그 많은 것을 다 해결할 수 있을까마는.

이번에 챙겨온 명단을 보니, ‘웬수’들 이름이 훨씬 많다. 얼굴을 하나씩 떠올려 보니 사실 웬수랄 것도 없다. 발랄 경쾌한 그저 열대여섯 그 또래들일 뿐인 것을, 단호하지도 너그럽지도 않은 태도로 대응하면서 문제 상황을 만들었으니 탓하려면 내 무능을 탓해야 옳다. 한발 물러서서 보니, 그게 보인다. 방학은 이래서 필요하다 싶다. 노자의 도덕경을 옮겨 적은 책에 이런 구절이 있다.

“말을 너무 많이 하면 학생들은 안 듣는다. 너무 오래 앉아 있으면 학생들은 지쳐 떨어진다. 너무 열심히 하면 길을 잃고 만다. 교사와 학생들은 배우기를 멈추고 서로 떨어져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 거리가 학습으로 돌아가 서로 만날 수 있도록 해 준다.”

이상대/서울 신월중 교사 applebighead@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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