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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 이민 100주년 계기 미국이외 동포에도 관심을 |
올해는 해방 60주년이자, 을사조약 100주년이 되는 역사적 의미를 갖는 해다. 역사학계는 기념 학술대회를 계획하고 있으며, 방송도 특집 프로그램들을 기획하고 있다는 보도가 연초부터 나오고 있다. 이와 함께 한쪽에서는 멕시코 이민 100주년 기념 준비 소식도 들린다. 그러고 보니 우리의 이민 역사도 어언 100년을 넘어섰다.
근대적 의미의 이민은 20세기 들어 하와이 이민에서 시작됐다. 하와이에 대규모 사탕수수 농장이 개발되면서 일손이 부족하자, 농장주들은 태평양의 섬들이나 아시아에서 이민을 받아들여 부족한 일손을 채우려고 했다. 중국인과 일본인 등에 이어 한국인도 그 대상이 됐다. 이들은 대한제국 정부에 요구해 1902년 11월 이민 업무를 담당하는 수민원(綬民院)을 만들고, 한국인 노동자를 모으는 회사를 세웠다. 하와이로 이민을 가면 직업을 얻고 돈을 벌어서 가족을 데리고 잘 살 수 있다고 선전했다. 자녀 교육을 시킬 수 있고, 의료 혜택을 받을 수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모집을 시작한지 불과 한 달만인 12월 22일 한국인 노동자 121명을 실은 배가 인천항을 떠났다. 몇 차례 신체검사를 거친 끝에, 이듬해 1월 13일 하와이에 97명의 노동자가 상륙했다. 공식적인 한국인 최초의 해외 이민자들이었다. 이후 1905년까지 7000여명의 한국인이 하와이로 이주했다. 그러나 잘 살게 된다는 꿈을 안고 하와이로 건너간 이들을 맞이한 것은 하루 10시간이 넘는 고된 노동과 낮은 임금, 그리고 농장주들의 감시와 가혹한 처벌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멕시코 이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1905년 4월 인천을 출발한 멕시코 이민 275가구 1033명은 5월 14일 멕시코에 도착했다. 새로운 생활에 대한 기대감에 한껏 부풀어 있던 이들은 곧 애니깽(용설란의 일종) 농장의 고된 노동과 적응하기 어려운 무더위에 시달려야 했다. 이들 중 일부는 탈출해 고종 황제에게 억울함을 호소하기도 했다. 그러나 제국주의 열강의 다툼 속에서 주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던 대한제국 정부는 별다른 대책을 세우지 못했다.
1906년 대한제국 정부는 이민보호법을 제정했다. 그러나 을사조약으로 이미 외교권을 빼앗긴 상태여서 이민 업무도 일본 통감의 승낙을 얻어야 했다. 오히려 이민보호법은 해외에 반일 한국인 사회가 생겨나는 것을 통제하는 장치로 이용됐다.
미국과 멕시코에서 이렇게 어려운 삶을 이어 가면서도, 일부 사람들은 그곳에 정착해 해외 이민의 첫 세대가 됐다. 2003년 하와이에서 미국 이민 100주년 기념 행사를 연 것과 마찬가지로, 멕시코에서도 이민 100주년을 맞이해 이민사를 정리하고, 한인회관과 한글학교를 세우는 등 뿌리를 찾기 위한 노력이 이뤄지고 있다고 한다. 이 행사가 미국 이외 지역에 사는 동포들에 대한 우리의 관심을 높이는 계기가 됐으면 하는 마음이다.
김한종 한국교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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