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굴 없는 학생의 전학사건 -
‘
‘
집단폭력(왕따, 성폭행)과 얼굴 없는 학생’
‘경쟁이데올로기의 중독성과 왕따 증후군’
나는 학교 가기가 두려워요. 얼굴 없는 학생과, 무서운 학교
왕따 학생의 자살과 출교 정지를 보면서, 이 글을 소개하고자 한다.
나는 오늘도 교무실에서 어느 담임선생님이 자기 반 아이의 장기 결석생에 대한 상담일지를 쓰면서 고뇌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 사연의 요지를 듣고는, 커다란 충격과 슬픔을 가누기 힘들어 이 글을 소개한다. 학생의 주인공은 정원외 관리냐, 유예냐 하는 지경에 처한 사정을 담임선생으로부터 듣고서, 교육자로서 무관심할 수 없어 나는 그 학생이나 부모님을 한 번 직접 대면하고 상담 좀 할 수가 없느냐고 물었다. 그런데 그럴 수가 없다고 하는 사연을 듣고는 더욱 더 우리 학교문화의 뿌리 깊은 상처와 불신에 또 한 번 충격을 받는다. 말로 하기 불편한 사연인즉, 전학오기 전의 학교에서 받은 친구에 대한 집단폭력과, 이 학교에서도 친구들과 함께 생활할 수가 없을 정도로 예상되는 왕따증후군에 시달릴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고서 또 한 번 가슴이 메인다. 문서상으로 전학을 와서 학교에 이름만 올려놓고는, 얼굴 없는 학생으로 담임은 부모의 얼굴도 학생의 얼굴도 볼 수 없는, 무언의 백지 앞에서 일방통행의 고독한 상담일지를 쓰고 있는 담임선생에게 나는 무슨 말을 할 수도 없고 어떤 도움을 줄 수가 없는 심정이 참으로 무겁다. (2009.11.16 교단일지)
오늘 아침 방송에서 일본의 학교에는 이지매를 가한 학생에게 출교 정지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도 왕따 학생들이 겪는 초.중고생들의 학교생활의 고통과 그 피해 사례가 심각한 상태에 놓여 있다. 왕따로 인한 교내 집단따돌림의 폭력에 시달리다 못하여 학교생활을 그만두거나,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가거나, 아니면 심지어 자살을 하기도 한다. 왕따를 당하는 학생의 상처와 해당 학생의 부모와 가족은, 더 이상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소속감을 갖지 못하고, 인간들에 대한 신뢰를 부정하게 된다. 결국은 아이를 해외 유학을 보내거나, 또는 가족 모두가 이민을 떠나기도 한다. 이런 현상이 점점 확산되면서 우리 사회에 기러기 가족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가족 문화가 발생하여, 서로 다른 생활권에서 외로움과 이별의 슬픔을 맛보아야 하는 현실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가. 우리 사회에 번지고 있는 이같은 집단폭력으로 시달리는 왕따 증후군에 의한 정신적 피해와 사회 공동체의 황폐화는, 해를 거듭할수록 수그러들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이와 같은 왕따 증후군의 확산 속도를 그대로 방치한다면, 급기야는 우리 사회의 도덕적 기반을 무너뜨릴지도 모른다. 언제부터 이런 집단 따돌림이란 폭력성과 사회 병리적인 왕따 증후군이 우리 사회에 점점 소리 없이 전염 확산되고 있는가. 얼마 전에 내가 직접 보고 겪은 집단 따돌림의 학생 한 명을 예로 들어보기로 한다. 그 학생은 고등학교 1학년 학생인데, 그는 자기 반 학급에서 친구들로부터 돌아가면서 비웃음과 놀림을 당하고, 또한 구타를 당하기도 하였다. 이 학생의 경우는 자신의 생각이나 주장을 친구들에게 표현하는 능력이 없는 학생이다.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글로 표현할 수는 있었다. 학생의 경우는 법이 없어도 자신이 먼저 다른 사람을 절대로 해치거나 피해를 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피해에 대하여 속으로만 삼키는 그런 학생이다. 그러한 학생을 반 친구들이 돌아가면서 집단적으로 폭력을 휘두르고 있을 때, 어느 친구도 한 사람이 나서따돌림을 당하는 친구를 돕거나 막아주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이다. 말 못하는 동물이나 짐승도 인간이 학대를 하거나, 또는 동물과 가축이 배가 고프거나, 어디 상처가 나서 고통을 당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그것을 측은하게 여기는 것이 인간의 상정이지 않는가. 하물며 동종의 인간으로서, 특히나 다른 동물이나 말 못하는 짐승과는 달리, 충분한 의사소통의 언어와 지성이라는 특별한 수단을 가졌음에도, 어찌하여 사람이 사람을 아무런 이유도 없이 집단적으로 따돌리고 폭력을 일삼는단 말인가. 도대체 인간은 어떤 동물인가? 우리 사회가 교육을 통하여 이룩한 정신적 가치의 수준은 무엇이며, 인간의 본성을 깨워내기 위하여 자아실현을 통하여도달한 사회적 진화의 모습은 과연 이런 것인가? 세간에 전염되고 있는 이러한 왕따 현상이 인간 사회에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따지고 보면 어제 오늘의 이야기는 아니다. 멀리는, 예수가 십자가에서 왕따 당했고, 소크라테스는 감옥에서 독약을 든채 왕따를 당했다. 그러나 예수는 십자가 속에서도 그를 십자가에 매달고 구경하든 사람들을 끝까지 지켜보면서, 그를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속삭였다. '주여, 진정 나를 버리시나이까. 당신의 뜻대로 하십시오. 당신의 뜻이 여기서 이루어지나이다.'라고 하였다. 예수는 자신을 왕따시킨 사람들을 측은히 여기면서, '네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고 하였던가. 소크라테스는 법정에서 자신을 사형시키려는 마당에서, 뒤늦게 나선 친구(크리톤)의 변론도 거부하고, 마침내 자신의 손에 든 독약을 마시면서, 마지막까지 자신의 정의를 흐트리지 않고 의연한 죽음을 보였던가. 인류의 왕따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듯이, 오늘날 우리에게 남은 지금의 왕따 문화는 학교에서 자라나는 청소년들의 배움의 과정에서 얼마나 부끄러운 폭력인지를 깊이 뒤돌아보아야 할 문제이다. 아이들이 집단적으로 따돌리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것인지, 자신이 왕따를 당하지 않으려고 자신의 방어에 급급한 나머지, 먼저 다른 한 명의 친구를 반드시 따돌려야 된다고 한다. 이렇게 극도로 변질된 이기적 심리와 비굴함이, 모두 가정과 학교 교육을 통하여 길러지고 방치되었다면, 여기까지 오게 된 우리의 교육 환경이 너무도 슬프다는 것이다. 교사와 부모가 학교와 가정에서 왕따를 예방하고, 아이들을 보호해주지 못한다면, 이미 학교는 왜 존재해야만 하며, 학교가 붕괴되기 이전에 먼저 가정이 붕괴된 것은 아닌지 물어보고 깊이 반성해볼 일이다. 그렇다. 예수와 소크라테스에게서 우리는 분명히 보았다. 우리는 왕따로 인한 인간의 비굴한 심리와 증오심, 그리고 거기서 오는 사회에 대한 분노를 목격하면서, 가정과 학교와 사회가 처한 총체적 위기와 도덕성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해야 할 단계에 왔다. 왕따 문화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그 사회는 우리들 자신의 이중성과 깊은 불신을 기반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은 자신의 불안과 불행을 감추고, 다른 사람의 행복을 시기하며, 동시에 남의 불행을 즐기는지도 모른다. 이 모든 왜곡된 심리는 경쟁 때문이라고 본다. 이러한 경쟁 심리를 넘어서 승화된 인간성의 또 다른 진화와 개화를 보기까지 인류의 역사는 얼마나 많은 고통과 긴 시간이 필요했던가. 학교 문화는 사회 환경을 그대로 비추는 거울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 번지고 있는 심각한 병리 현상인 왕따 증후군은, 우리의 아이들을 심각한 폭력으로 내몰고 있다. 무엇 때문에 이러한 왕따 증후군이 우리의 아이들을 위협하고 있는가? 날이 갈수록 개선의 여지가 보이지 않는 서열 중심의 대학 입시제도와, 극도로 이기적 경쟁 체제 속에서 배움을 강요당하고 있는 학교 교육의 현실 때문에, 우리의 아이들은 지금 심각한 폭력에 노출되어 있다. 자신의 불안과 두려움을 감추고 방어하기 위해, 다른 누군가를 한 사람 공격해야만 하는 또 다른 형태의 폭력과 비굴함을 본다. 그리하여 인간은 자신의 불안과 고통에서 스스로 벗어나지 못하고, 누군가의 감시와 의지 속에서 눈치를 보며 집단생활을 하는 건강하지 못한 자기 정체성의 파괴 현상을 본다. 학교에서 아이들이 겪는 집단 따돌림에서 오는 불안과 정신적 피해는, 결국 왜곡된 자아의 변질된 모습으로 자신과 세계의 관계에서 적대감을 은폐하거나 도피한다. 자신의 개성과 다양한 능력을 표현하거나 수용할 수 없는 것은, 삶과 동떨어진 지식과 성적 하나에만 매달려 살아가는 경쟁이라는 획일적 가치 때문이다. 그러한 학교 문화가 지금 청소년들로 하여금 친구들 사이에 조금만 다른 행동과 모습을 보여도, 집단적으로 거부 반응을 일으키는 것이 왕따 현상이다. 자신의 삶이 집단 속에 매몰되고 있는 청소년들을 보면서, 우리 교육은 언제까지 지식 경쟁이라는 획일적 입시제도를 이대로 방치하고만 있을 건가. 청소년들의 건강한 발달과정을 파괴하는 현재의 대학 입시제도를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는 한, 앞으로도 왕따 증후군은 더욱 더 확산될 것이며, 학교의 존립 자체가 의심받게 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따라서 전국의 모든 학교에서 일상화 되고 깊이 뿌리 내리고 있는 왕따 증후군은, 단순히 학교만이 겪는 일시적 현상으로 치부해서는 안 될 것이다. 왕따 증후군은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물신숭배와, 경쟁이데올로기로 인한 극도로 자기 중심의 이기적 행동이 가져 온 가치 전도의 위기라는 사실을 직시해야만 할 것이다. 차제에 우리는 한국 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학벌위주의 조직과 제도를 혁명적으로 개혁할 수 있는 대안을 마련하고, 그렇게 준비된 정부를 세우기 위하여 모든 국민의 관심을 일깨우는 교육자가 있을 때, 그리하여 다가오는 대선에서 그러한 지도자를 국민의 손으로 뽑을 수 있을 때, 비로소 교육에 희망이 있다. 2009. 11. 16 슬픈 학교문화를 지켜보면서
오늘 아침 방송에서 일본의 학교에는 이지매를 가한 학생에게 출교 정지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도 왕따 학생들이 겪는 초.중고생들의 학교생활의 고통과 그 피해 사례가 심각한 상태에 놓여 있다. 왕따로 인한 교내 집단따돌림의 폭력에 시달리다 못하여 학교생활을 그만두거나,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가거나, 아니면 심지어 자살을 하기도 한다. 왕따를 당하는 학생의 상처와 해당 학생의 부모와 가족은, 더 이상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소속감을 갖지 못하고, 인간들에 대한 신뢰를 부정하게 된다. 결국은 아이를 해외 유학을 보내거나, 또는 가족 모두가 이민을 떠나기도 한다. 이런 현상이 점점 확산되면서 우리 사회에 기러기 가족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가족 문화가 발생하여, 서로 다른 생활권에서 외로움과 이별의 슬픔을 맛보아야 하는 현실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가. 우리 사회에 번지고 있는 이같은 집단폭력으로 시달리는 왕따 증후군에 의한 정신적 피해와 사회 공동체의 황폐화는, 해를 거듭할수록 수그러들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이와 같은 왕따 증후군의 확산 속도를 그대로 방치한다면, 급기야는 우리 사회의 도덕적 기반을 무너뜨릴지도 모른다. 언제부터 이런 집단 따돌림이란 폭력성과 사회 병리적인 왕따 증후군이 우리 사회에 점점 소리 없이 전염 확산되고 있는가. 얼마 전에 내가 직접 보고 겪은 집단 따돌림의 학생 한 명을 예로 들어보기로 한다. 그 학생은 고등학교 1학년 학생인데, 그는 자기 반 학급에서 친구들로부터 돌아가면서 비웃음과 놀림을 당하고, 또한 구타를 당하기도 하였다. 이 학생의 경우는 자신의 생각이나 주장을 친구들에게 표현하는 능력이 없는 학생이다.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글로 표현할 수는 있었다. 학생의 경우는 법이 없어도 자신이 먼저 다른 사람을 절대로 해치거나 피해를 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피해에 대하여 속으로만 삼키는 그런 학생이다. 그러한 학생을 반 친구들이 돌아가면서 집단적으로 폭력을 휘두르고 있을 때, 어느 친구도 한 사람이 나서따돌림을 당하는 친구를 돕거나 막아주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이다. 말 못하는 동물이나 짐승도 인간이 학대를 하거나, 또는 동물과 가축이 배가 고프거나, 어디 상처가 나서 고통을 당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그것을 측은하게 여기는 것이 인간의 상정이지 않는가. 하물며 동종의 인간으로서, 특히나 다른 동물이나 말 못하는 짐승과는 달리, 충분한 의사소통의 언어와 지성이라는 특별한 수단을 가졌음에도, 어찌하여 사람이 사람을 아무런 이유도 없이 집단적으로 따돌리고 폭력을 일삼는단 말인가. 도대체 인간은 어떤 동물인가? 우리 사회가 교육을 통하여 이룩한 정신적 가치의 수준은 무엇이며, 인간의 본성을 깨워내기 위하여 자아실현을 통하여도달한 사회적 진화의 모습은 과연 이런 것인가? 세간에 전염되고 있는 이러한 왕따 현상이 인간 사회에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따지고 보면 어제 오늘의 이야기는 아니다. 멀리는, 예수가 십자가에서 왕따 당했고, 소크라테스는 감옥에서 독약을 든채 왕따를 당했다. 그러나 예수는 십자가 속에서도 그를 십자가에 매달고 구경하든 사람들을 끝까지 지켜보면서, 그를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속삭였다. '주여, 진정 나를 버리시나이까. 당신의 뜻대로 하십시오. 당신의 뜻이 여기서 이루어지나이다.'라고 하였다. 예수는 자신을 왕따시킨 사람들을 측은히 여기면서, '네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고 하였던가. 소크라테스는 법정에서 자신을 사형시키려는 마당에서, 뒤늦게 나선 친구(크리톤)의 변론도 거부하고, 마침내 자신의 손에 든 독약을 마시면서, 마지막까지 자신의 정의를 흐트리지 않고 의연한 죽음을 보였던가. 인류의 왕따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듯이, 오늘날 우리에게 남은 지금의 왕따 문화는 학교에서 자라나는 청소년들의 배움의 과정에서 얼마나 부끄러운 폭력인지를 깊이 뒤돌아보아야 할 문제이다. 아이들이 집단적으로 따돌리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것인지, 자신이 왕따를 당하지 않으려고 자신의 방어에 급급한 나머지, 먼저 다른 한 명의 친구를 반드시 따돌려야 된다고 한다. 이렇게 극도로 변질된 이기적 심리와 비굴함이, 모두 가정과 학교 교육을 통하여 길러지고 방치되었다면, 여기까지 오게 된 우리의 교육 환경이 너무도 슬프다는 것이다. 교사와 부모가 학교와 가정에서 왕따를 예방하고, 아이들을 보호해주지 못한다면, 이미 학교는 왜 존재해야만 하며, 학교가 붕괴되기 이전에 먼저 가정이 붕괴된 것은 아닌지 물어보고 깊이 반성해볼 일이다. 그렇다. 예수와 소크라테스에게서 우리는 분명히 보았다. 우리는 왕따로 인한 인간의 비굴한 심리와 증오심, 그리고 거기서 오는 사회에 대한 분노를 목격하면서, 가정과 학교와 사회가 처한 총체적 위기와 도덕성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해야 할 단계에 왔다. 왕따 문화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그 사회는 우리들 자신의 이중성과 깊은 불신을 기반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은 자신의 불안과 불행을 감추고, 다른 사람의 행복을 시기하며, 동시에 남의 불행을 즐기는지도 모른다. 이 모든 왜곡된 심리는 경쟁 때문이라고 본다. 이러한 경쟁 심리를 넘어서 승화된 인간성의 또 다른 진화와 개화를 보기까지 인류의 역사는 얼마나 많은 고통과 긴 시간이 필요했던가. 학교 문화는 사회 환경을 그대로 비추는 거울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 번지고 있는 심각한 병리 현상인 왕따 증후군은, 우리의 아이들을 심각한 폭력으로 내몰고 있다. 무엇 때문에 이러한 왕따 증후군이 우리의 아이들을 위협하고 있는가? 날이 갈수록 개선의 여지가 보이지 않는 서열 중심의 대학 입시제도와, 극도로 이기적 경쟁 체제 속에서 배움을 강요당하고 있는 학교 교육의 현실 때문에, 우리의 아이들은 지금 심각한 폭력에 노출되어 있다. 자신의 불안과 두려움을 감추고 방어하기 위해, 다른 누군가를 한 사람 공격해야만 하는 또 다른 형태의 폭력과 비굴함을 본다. 그리하여 인간은 자신의 불안과 고통에서 스스로 벗어나지 못하고, 누군가의 감시와 의지 속에서 눈치를 보며 집단생활을 하는 건강하지 못한 자기 정체성의 파괴 현상을 본다. 학교에서 아이들이 겪는 집단 따돌림에서 오는 불안과 정신적 피해는, 결국 왜곡된 자아의 변질된 모습으로 자신과 세계의 관계에서 적대감을 은폐하거나 도피한다. 자신의 개성과 다양한 능력을 표현하거나 수용할 수 없는 것은, 삶과 동떨어진 지식과 성적 하나에만 매달려 살아가는 경쟁이라는 획일적 가치 때문이다. 그러한 학교 문화가 지금 청소년들로 하여금 친구들 사이에 조금만 다른 행동과 모습을 보여도, 집단적으로 거부 반응을 일으키는 것이 왕따 현상이다. 자신의 삶이 집단 속에 매몰되고 있는 청소년들을 보면서, 우리 교육은 언제까지 지식 경쟁이라는 획일적 입시제도를 이대로 방치하고만 있을 건가. 청소년들의 건강한 발달과정을 파괴하는 현재의 대학 입시제도를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는 한, 앞으로도 왕따 증후군은 더욱 더 확산될 것이며, 학교의 존립 자체가 의심받게 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따라서 전국의 모든 학교에서 일상화 되고 깊이 뿌리 내리고 있는 왕따 증후군은, 단순히 학교만이 겪는 일시적 현상으로 치부해서는 안 될 것이다. 왕따 증후군은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물신숭배와, 경쟁이데올로기로 인한 극도로 자기 중심의 이기적 행동이 가져 온 가치 전도의 위기라는 사실을 직시해야만 할 것이다. 차제에 우리는 한국 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학벌위주의 조직과 제도를 혁명적으로 개혁할 수 있는 대안을 마련하고, 그렇게 준비된 정부를 세우기 위하여 모든 국민의 관심을 일깨우는 교육자가 있을 때, 그리하여 다가오는 대선에서 그러한 지도자를 국민의 손으로 뽑을 수 있을 때, 비로소 교육에 희망이 있다. 2009. 11. 16 슬픈 학교문화를 지켜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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