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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교육

판타지소설만 읽지말고, 판타지소설도 읽어요

등록 2010-12-27 10:14수정 2010-12-27 15:01

판타지소설만 읽지말고, 판타지소설도 읽어요 (※ 클릭하시면 더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판타지소설만 읽지말고, 판타지소설도 읽어요 (※ 클릭하시면 더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커버스토리] ‘마니아’ 중학생 4명의 진솔한 대화
“<아린 이야기>가 시작이었어요. 도서대여점 아저씨가 추천해줘서 읽게 됐었는데….” 박선우(성재중 3년)양의 말에 배승식(노곡중 3년)군이 반색한다. “저도 알아요! 5학년 때 봤었어요.” 선우소정(월촌중 3년)양은 “나는 판타지만 보는 건 아니고 <트와일라잇>, 요즘 나오는 로맨스소설 등을 좋아한다”며 “로맨스소설은 판타지성이 강하다”고 설명했다. 이들은 이날 처음 만났지만 몇 분도 되지 않아 이야기꽃을 피웠다. 하도연(봉원중 3년)양이 <드래곤라자>라는 책 이야기를 꺼내자 분위기는 더 무르익었다. “아! 그 책 알아….” 모두 입을 모았다. 지난 12월17일 저녁 신촌 한겨레교육문화센터에 모인 이 네 명의 중학생들은 ‘판타지 소설’이라는 주제 하나로 두 시간 만에 꽤나 친해진 모습이었다.

<함께하는 교육>이 이들을 불러모은 이유는 한 학부모 독자의 편지 때문이었다. “중학교 1학년 아들이 <해리 포터> 시리즈, <룬의 아이들> 등을 보다가 요새는 무협 판타지를 많이 봅니다. 근데 이거 보면서부터는 거실에도 잘 안 나와요. 왕따까지는 아니지만 몸이 왜소하고 말수도 적어서 친구도 없는 편인데 이러다 정말 혼자서만 지내게 될까 걱정스럽습니다.” 걱정할 일일까? 전문가의 틀에 박힌 답변보다는 판타지소설에 푹 빠져봤던 ‘선배님들’ 말씀을 들어보는 편이 낫겠다 싶었다.

학생들이 판타지소설에 빠지게 된 계기는 비슷했다. 때는 초등학교 고학년이던 어느 날. ‘책읽기도 좋아하고, 평소 이런저런 공상이 많은 캐릭터였던’ 이들한테 대여점 소설이 눈에 들어왔다. 하양은 “생각이 많은 친구들, 그러니까 어른들한테 잡생각 많다고 소리 좀 듣는 친구들이 잘 빠진다”고 했다.

다행스러운 건 네 학생 모두 이미 <해리 포터>나 <반지의 제왕> 시리즈 등 명작 소리를 듣는 판타지소설을 뗀 시점에 대여점 판타지소설을 만났다는 것이다. 이들한테는 이미 ‘좋은 판타지’와 ‘나쁜 판타지’를 구분하는 눈이 있었다.

판타지소설도 종류가 다양하다. 기본적으로 판타지는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는 환상적인 이야기다. 박양은 “다른 세계로 가거나 힘이 없는데 힘이 생긴다는 등의 이야기가 기본 얼개가 된다”고 했다. 문제는 유명 판타지소설을 읽다 폭을 넓혀 검증되지 않은 책에 손을 댈 경우에 많이 발생한다. 배군은 “판타지소설에도 세대가 있다”며 “요즘에 나오는 양산형 판타지는 완성도도 떨어지고 허접스러운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2000년대 초반부터 시작된 전통 판타지를 1세대라고 하구요. 개그 등 가벼운 소재가 가미된 것을 2세대 퓨전 판타지라고 해요. 요즘 대여점에 나오는 것은 여러 가지가 혼합된 3세대 판타지죠. <드래곤라자>는 작품성 있는 1세대 대표작입니다. 이런 작품 말고 3세대 판타지 가운데에는 허접스런 스토리들도 정말 많아요.”

판타지소설 삼매경에는 부작용이 분명히 있다. 하양은 “특히 공부와 연관을 짓자면 나쁜 점이 참 많다”며 “일단 빠지기 시작하니까 잠잘 시간에도 이걸 보게 되고, 자연스레 수면 시간이 줄고, 학교에 가선 꾸벅꾸벅 졸게 됐다”고 했다. “소설 속 상황이 등굣길 환상처럼 펼쳐지고 하루종일 몽롱한 상태로 지내기도 해요. 현실과 괴리감이 생기죠.” 실제로 판타지소설은 다른 장르와 비교할 때 중독성이 강하다. 정신과전문의 문지현 미소의원장은 “현실에서 불가능한 것이 가능하니까 ‘여긴 다르구나’ 하는 마음에 더 끌리는 것”이라며 “결국은 대리만족 때문에 인기가 많은 것”이라고 했다. “특히 많은 학생들이 판타지소설에 빠지게 되는 초등학교 고학년 때는 상상력이 발달하는 시점이거든요. 추상적인 사고가 확장되는 때라 더 관심이 클 겁니다.”

중독은 자연스럽게 본업인 공부에서 손을 놓게 하고 성적을 떨어뜨린다. 배군은 “원래 성적이 나쁘지 않았었는데 올 초에 많이 떨어졌다”고 했다. “돈도 많이 썼어요. 판타지소설은 분량도 짧고 정말 빨리 읽거든요.”


스토리텔링이 강한 판타지소설에 푹 빠지면서 비교적 딱딱한 교과 텍스트가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하양은 “과학처럼 건조한 정보만 담은 책과는 거리가 멀어지기도 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학부모 독자의 고민은 정말 큰 걱정거리일까? 이날 모인 학생들의 말을 정리하면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하양은 “판타지소설에는 다른 책에서는 만나기 힘든 스토리텔링이 있다. 이게 매력이고, 재미”라고 설명했다. “플롯이 확장되고 이야기가 풍성하죠. 추천도서로 나오는 문학작품처럼 틀에 박힌 읽을거리가 아니죠. 그래서 중요한 게 ‘독서 입문’으로 판타지를 읽는 건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배군은 “이건 정말 개인차가 있다”고 했다.


판타지소설 읽는 자녀가 걱정된다면?
판타지소설 읽는 자녀가 걱정된다면?
곁에서 누가 어떤 관심을 주느냐에 따라 판타지소설 독서의 부작용은 생길 수도 있고, 안 생길 수도 있다. 엄마가 독서교육전문가인 박양은 판타지소설을 한참 읽을 당시, 엄마와 한 약속을 떠올렸다. “엄마가 독서 쪽 전문가시니까 엄마를 이기기는 힘들거든요.(웃음) 지금도 기억나는 게 무조건 보지 말라고 하진 않으셨어요. 판타지소설 읽는 대신, 한 권 볼 때마다 엄마가 추천하는 역사 관련 책도 한 권 읽어야 한다고 제안하셨죠.”

판타지소설에 빠진 자녀가 있다면 무조건 야단을 치기보다는 무엇을 읽는지 관심을 기울여주는 태도가 필요하다. 독서교육전문가 임성미씨는 “판타지소설의 문제점을 이야기할 때 ‘그것도 보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것만 보는 게 문제’가 아닐까 싶다”고 했다. 편식처럼 그것 하나에만 빠지지 않도록 여러 책을 골고루 보게 하는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성장기에는 어느 정도 판타지가 필요하다고도 하잖아요. 그렇지만 이상한 판타지도 많다니까 골라줘야죠.” 경희중 안정선 교사는 “말린다고 되진 않더라”며 “아이가 뭘 보는지 물어보고, 그것에 대해 얘기를 하는 등의 대화가 중요하다”고 했다. “이유 없이 좋아하는 경우도 있지만 현실의 불만이나 어려움 때문에 빠져든다면 대체 아이가 어떤 고민을 안고 있는지 살펴봐야죠. 판타지소설로 독서 입문을 한 아이한테 접점을 잘 찾아주면 오히려 독서가 확장되기도 하더라구요.”

우리나라 학생들이 유독 판타지소설에 빠지는 이유를 살펴보면 환경 영향이 적지 않다. 하양은 학교의 주입식 수업이 한몫을 한다고 본다. “저는 교과서에 나오는 문학작품을 읽고, 이게 몇 년도 작품이고, 작가는 누구고 외우는 게 너무 지겨워요. 이렇게 외우기식으로 공부하는데 상상력이 어떻게 발휘되고, 애초에 있던 상상력을 어디에 써요.”

선우양은 “사실 어떤 애들이 특정 연예인을 좋아하는 것처럼 판타지소설에 빠진 아이들도 하나의 취미를 가진 아이로 봐줬으면 한다”고 했다. 박양도 동의했다. “맞아요. 학교와 집, 학원 돌다가 어느날 보니 제가 벌써 고딩인 거예요.(웃음) 입시공부 하는 게 죽을 것처럼 힘든 건 아니지만 삶이 무미건조한 건 사실이에요. 그런 상태에서 판타지소설을 만나면 확실히 스트레스가 해소되죠. 전혀 다른 세계로 갈 수 있잖아요.” 하양은 “판타지소설이라고 아주 이상한 거라고 생각하시는데 사실 우리 사는 세상이 판타지와 떼려야 뗄 수 없지 않냐”고 했다. “<슈렉>도 판타지고, <시크릿 가든>도 판타지잖아요. 너무 나쁘게만 보시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글·사진 김청연 기자 carax3@hanedu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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