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교사·학부모의 사교육 한마디
“굉장히 바쁘게 움직여야 했습니다. 어지간한 일이 없는 한 학원에 늦는 일은 없어야 했고, 숙제는 반드시 끝내놓아야 했으며 그 또한 어느 정도 이상의 정답률을 넘어야 했습니다. 그렇게 바쁘게, 열심히 했는데도 성적은 잘 오르지 않았습니다.” 교육시민단체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이 지난 4월에 실시한 <아깝다 학원비!> 전국독후감대회에서 중학생 부문 우수상을 받은 서울 가원중학교 이모(15)군이 쓴 독후감의 한 구절이다. 학원을 다녀본 경험이 있는 학생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얘기다. 하루 4~5시간을 학원에서 옴짝달싹 못했다는 이군은 현재 학원을 그만두고 스스로 공부하고 있다.
이군이 학원을 그만두기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초등학교 때 영어학원을 시작으로 많은 학원을 다녔다. 성적이 조금이라도 떨어지면 바로 학원을 바꿨다. “중학교 때는 종합반을 다녔어요. 학교 수업이 끝나면 교재와 필기도구를 갖고 학원에 갔죠. 학원에 가면 종일 문제집을 풀었어요. 뭘 배웠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학원의 엄청난 숙제만큼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네요.”
학원을 다녀도 오르지 않는 성적에 스트레스는 점점 쌓여갔다. 늦은 귀가 탓에 잠은 늘 부족했고 학교 수업에도 집중할 수가 없었다. 학원 선행학습도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무조건 들어야 했다. 중학교 2학년 때는 고등학교 2학년 수학을 배우기도 했다.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면서 그냥 앉아 있었던 것 같아요. 선생님도 잘하는 아이들 수준에 맞춰 가르치거든요.”
숙제만 잔뜩 내주는 학원에 대한 불신이 커져갔다. 그러다 학원에 다니지 않고도 공부를 잘하는 친구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학원에 계속 다녀야 하는지 고민을 많이 했죠. 주위에 소위 ‘공부 좀 한다는 친구’를 보면 학원에 전혀 다니지 않거나 부족한 한 과목 정도만 수강하더라고요. 너무 학원에만 의존했던 것 같아요. 스스로 공부해 볼 생각은 하지 않고 말이죠.” 중학교 3학년이 되면서 다니던 학원을 그만두기로 결정했다. 부모님은 여전히 학원의 울타리에 머물길 원했지만 결국 아들의 결정을 따랐다.
학원 생활에서 벗어나는 게 처음엔 쉽지 않았다. 스스로 계획을 세워 공부하는 게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기초가 부족한 영어 공부가 어려웠다. “교과서도 꼼꼼히 다시 읽어보고 학교 수업 시간에도 집중하면서 공부하고 있어요. 수업이 모두 끝나면 집에서 할 공부 계획을 세워요. 하루 3시간 정도 혼자 공부하죠. 성적도 학원에 다닐 때보다 평균 3~4점이 올랐어요. 고등학교에 가서도 스스로 공부하고 싶습니다.”
창원 삼계초등학교 모회정 교사는 <아깝다 학원비!> 전국독후감대회에서 교사 부문 우수상을 받았다. 교사인 남편이 한번 읽어보라고 권해준 책이었다. “조그만 시골학교로 처음 발령받았을 때 아이들에게 ‘너희들은 선생님만 믿고 학교에서 열심히 공부해야 해. 학원에 다니는 건 어리석은 일이야’라고 말했어요. 하지만 학급 인원이 30명 넘는 큰 학교에 근무하면서 점점 이 말에 책임지기가 힘들어졌죠. 학원에 다니는 아이들이 대부분이었어요.” 바쁜 업무 가운데 시간을 내어 뒤처지는 학생의 공부를 봐 주었지만 성적은 오르지 않았다. 자신감이 없어질 때쯤 학생이 학원에 다닌다는 얘기를 들었다. “좀 씁쓸했죠. 그냥 웃으면서 ‘그래, 열심히 해’라는 말밖에 하지 못했어요.”
쉬는 시간에 학원 숙제만 부여잡고 있는 아이들을 보면 속상했다. 학원에서 배운 내용으로 수업 시간에 빠른 답을 내뱉는 게 과연 올바른 공부인지 고민도 했다. 그러다 지난해 학교가 ‘사교육 없는 학교’로 지정되면서 방과후에도 아이들을 가르치게 됐다. “사교육비를 줄이고 공교육의 신뢰를 회복하는 게 목적이었지만 교육방식은 사교육과 큰 차이가 없었어요. 비용만 적게 들 뿐 학원의 수업방식을 그대로 학교에 옮기는 수준이었죠. 문제집 한 권을 교재로 가르쳤는데 선행학습 위주로 수업이 흐르더군요. 학교 진도보다 빠르게 나갈 수밖에 없었거든요. 왜 아이들이 이걸 풀고 있어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죠. 나중에는 복습 위주로 수업을 이끌었어요.”
참여한 아이들은 결국 중간에 다시 학원으로 돌아갔다. 학부모들은 학원의 철저한 관리 시스템과 선행학습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이런 일들을 겪고 <아깝다 학원비!>를 읽으며 사교육에 대한 생각을 정리했다. “단순히 내 영역 밖으로 치부했던 것에 책임의식을 느끼게 됐어요. 당장 눈에 보이는 결과만 놓고 보면 학부모님들의 선택을 무시할 순 없죠. 하지만 아이들을 위한 올바른 교육이 무엇인지 고민해 봤으면 해요. 아이들도 학원에 다니고 싶지 않다고 말하거든요. 문제집을 많이 풀고 단기간에 성적을 올리는 게 아이의 성장에 얼마나 도움이 될까요.”
모회정 교사는 “수업 시간에 아이들과 공부 이외에 다양한 방법으로 소통하려고 노력한다”고 말했다. 사교육의 화려한 수업 기술에 현혹되기보단 아이들의 내면을 변화시킬 수 있는 교육에 힘쓰고 싶기 때문이다. “학원의 문제풀이식 학습에 익숙한 아이들은 공부를 어렵게 생각해요. 배우면서도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죠. ‘진정한 배움’은 아이들의 삶에 천천히 영향을 줘요. 조금만 아이들을 기다려줬으면 합니다.”
“영어를 어렸을 때부터 배우면 나중에 아이들에게 큰 도움이 될 거야.” 경기도 남양주에 사는 최호영(44)씨 자녀들의 사교육은 영어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에서 출발했다. 첫째 딸을 영어유치원에 보내기 위해 어렵게 마련한 집까지 팔아 이사를 했다. 5~6살 아이가 어설프게 영어를 한마디 내뱉으면 그렇게 뿌듯했다. 하지만 그 뿌듯함은 곧 미안함으로 바뀌고 말았다. “첫째와 둘째 아이 모두 영어유치원에 보냈죠. 둘째는 왕복 3시간이 넘는 강남의 영어유치원에 다녔어요. 아이에게 큰 고통이라는 걸 당시에는 잘 몰랐어요. 중학생이 된 첫째는 가끔 우리말 표현에 서투를 때가 있죠. 부모의 잘못된 교육관으로 아이들이 제대로 놀지 못하고 고생만 한 것 같아 미안할 뿐입니다.”
최씨의 이런 교육관이 바뀌게 된 건 거실을 서재로 꾸미면서부터다. 텔레비전을 없애니 부부간에도 대화가 늘었고 아이들과도 진솔한 얘기를 나누게 됐다. ‘사교육걱정없는세상’에서 여는 강의를 들으며 사교육에 대한 생각도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지난해 첫째 아이를 대안학교에 보냈어요. 마음껏 자유를 누리며 멋진 꿈을 찾길 바라는 마음에서였죠. 둘째 아이도 사교육을 전혀 받지 않고 있습니다. 좋아하는 축구에 빠져 있는 아이의 모습은 마냥 행복해 보여요.”
지난해 출간된 <아깝다 학원비!>를 읽으며 최씨의 생각은 더 확고해졌다. 독후감으로 장려상도 받았다. “혼자 읽기 아까워 친척들과 돌려보면서 읽고 있습니다. ‘나 같은 아버지가 또 생기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거죠. 지금은 공부 욕심보단 아이의 의견을 최대한 존중해 주려고 합니다.”
함께 장려상을 받은 경기도 안산의 정순옥(50)씨는 아이가 초등학생일 때는 학원에 보내지 않았다. 하지만 아이가 중학생이 되면서 학원에 보내기 시작했다. 다른 아이들도 다니기 때문에 똑같이 보내야 한다는 생각이 앞섰다고 한다. 학원에 다니느라 지친 아이를 보면 안쓰럽다는 생각보단 아이의 약한 의지를 탓했다. “아이를 믿지 못해 무작정 학원으로 내몰았던 것 같아요. 하루라도 학원에 빠지면 크게 혼을 내고 시험 성적이 좋지 않으면 다른 학원을 알아보곤 했죠. 지금 생각해보면 아이 스스로 공부할 수 있는 기회는 주지 않고 학원에만 의존한 것 같아 후회가 됩니다.”
아이가 좋은 고등학교에 들어갔으면 하는 바람이었지 정작 학원에서 어떻게 공부하는지는 잘 몰랐다. 왜 그렇게 아이가 피곤해하는지, 학원에서 어떤 식으로 아이를 지도하는지는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학원이 돌아가는 시스템을 잘 몰랐던 거죠. 과도한 선행학습과 당장의 성과에 집착하는 공부는 결국 아이를 지치게 한다는 걸 말이죠. 조금 느리더라도 개념을 이해하면서 공부에 재미를 느끼게 해줘야 했는데 그러질 못했어요.”
긴 망설임 끝에 아이의 학원 문제에 결단을 내렸다. 학원에 다니지 않고도 좋은 성적을 유지했던 초등학교 시절을 떠올리며 스스로 공부하는 습관을 길러주기로 했다. “처음에는 불안해하더니 지금은 스스로 계획을 세워가며 안정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사교육에 흔들리지 않는 부모의 마음이 중요한 것 같아요. 공부는 억지로 시킨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요. 학원에 맡기는 것에 위안 삼지 말고 아이 스스로 열정을 갖고 공부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해요.”
이란 기자 rani@hanedui.com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