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교과서 문구변경 과정과 학계 의견
보수진영, 헌법의 ‘자유민주적’ 문구 예로들며 주장
헌법학계 “정치체제로서 자유민주주의 의미 아냐”
진보진영 “반공 개념만 강조…되레 헌법정신 위반”
보수진영, 헌법의 ‘자유민주적’ 문구 예로들며 주장
헌법학계 “정치체제로서 자유민주주의 의미 아냐”
진보진영 “반공 개념만 강조…되레 헌법정신 위반”
지난 7월26일 서울 중구 국가브랜드위원회(위원장 이배용) 회의실. 한국현대사학회의 권희영 회장과 이명희 교과서위원장이 박홍갑 국사편찬위원회 편사부장, 전인영 역사교육과정 개발추진위원회 부위원장과 머리를 맞대고 앉았다. 올해 5월20일 창립된 한국현대사학회는 뉴라이트 성향의 역사 관련 단체다.
2시간 동안 진행된 이날의 비공개 협의회에서 한국현대사학회 쪽은 “개정 교육과정의 ‘민주주의’ 용어를 ‘자유민주주의’로 수정해달라”는 요구를 강하게 전달했다. 7월15일 열린 교육과학기술부의 ‘교육과정심의회’ 심의 통과 때까지 ‘민주주의’로 돼 있던 사회와 역사 개정 교육과정의 각론은, 8월9일 교과부 고시에서 갑자기 ‘자유민주주의’로 모조리 수정됐다. 더욱이 이명희 위원장은 8월23일부터 아예 ‘역사교과서 집필기준 개발 공동연구진’의 한 명으로 참여하고 있다. 김유정 민주당 의원은 “교과부와 국사편찬위원회가 한국현대사학회와 전국경제인연합회, 한국기독교총연합회 등 보수단체의 의견만을 수렴해 교육과정을 개정했다”고 비판했다.
■ 헌법에 ‘자유민주주의’ 개념 있다? 밀실 협의에 따른 교육과정 수정에 대해 논란이 일자, 보수 진영에선 ‘민주주의’를 ‘자유민주주의’로 바꿔야 하는 이유가 헌법 전문과 제4조에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라는 말이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헌법학계에서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라는 말이 곧 정치체제로서의 ‘자유민주주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보고 있다.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라는 말은 독일 헌법에서 따왔는데, 다원성을 존중하는 민주주의 사회에서도 나치즘이나 전체주의와 같이 허용될 수 없는 것들은 막아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게 학계의 대체적 시각이다.
장영수 고려대 교수(헌법학)는 “헌법에 나오는 ‘자유민주주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 등의 말은 구체적으로 어떤 맥락에서 사용되고 있는지를 봐야 한다”며 “만약에 이 말들을 ‘자유민주주의는 되고 사회민주주의는 안 된다’는 식으로 쓴다면 적절하지 못한 것”이라고 말했다.
또 세계적으로도 ‘자유민주주의’만을 정치체제나 기본이념으로서 단적으로 표방하는 나라는 찾아보기 어렵다고 한다. 흔히 자유민주주의적 국가로 간주되는 미국의 헌법도 그 내용을 보면 민주주의에 대한 포괄적인 규정만을 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임지봉 서강대 교수(법학)는 “우리나라 헌법에서 말하는 민주주의는 자유민주주의, 사회민주주의 등을 모두 포괄하는 넓은 범위의 민주주의이기 때문에 자유민주주의만 강조한 것은 헌법 정신에 맞지 않는다”고 말했다.
실제 우리 헌법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뿐만 아니라, 사회민주주의적 성격을 담은 조항도 다수 포함하고 있다. 119조 2항은 “국가는…(중략)…적정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하고,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며,…(중략)…경제의 민주화를 위하여 경제와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고 경제 민주화와 관련한 규정을 두고 있다. 하지만 개정 교육과정이 ‘자유민주주의’로 한정된 용어를 집필기준 등으로 고시하면, 교과서에서 경제 민주화 부분을 다루는 내용은 배제될 가능성이 크다.
■ ‘자유민주주의’ 부정하면 북한 추종세력? 보수진영 일각에선 “‘자유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세력은 북한식 ‘인민민주주의’를 하자는 것”이라며 색깔론을 들고나오고 있다. 하지만 이는 ‘민주주의’의 기본 개념조차 모르는 주장이라는 게 학계의 대체적인 견해다. 안병욱 가톨릭대 교수(국사학)는 “인류 역사는 개인의 자유가 발전하는 과정을 담고 있고, 여기서 자유와 민주라는 개념은 귀족과 왕족이 다스리는 봉건국가에서 민주정으로 바뀌는 민주주의 과정에서 통용되는 것”이라며 “하지만 한국현대사학회 등은 ‘자유민주주의’를 반공 질서의 확립이라는 개념으로만 한정해서 보고 있다”고 말했다. 박병섭 상지대 교수(법학)는 “‘자유민주주의’라는 개념은 냉전시대에 ‘공산주의는 자유롭지 못하고 우리는 자유롭다’고 선전할 때나 사용됐던, 이제는 세계적으로도 폐기된 개념”이라고 지적했다. 이 때문에 교육계에선 정치권이나 보수진영이 교육과정을 이념투쟁 문제로 변질시키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재훈 최원형 김민경 기자 nang@hani.co.kr
■ ‘자유민주주의’ 부정하면 북한 추종세력? 보수진영 일각에선 “‘자유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세력은 북한식 ‘인민민주주의’를 하자는 것”이라며 색깔론을 들고나오고 있다. 하지만 이는 ‘민주주의’의 기본 개념조차 모르는 주장이라는 게 학계의 대체적인 견해다. 안병욱 가톨릭대 교수(국사학)는 “인류 역사는 개인의 자유가 발전하는 과정을 담고 있고, 여기서 자유와 민주라는 개념은 귀족과 왕족이 다스리는 봉건국가에서 민주정으로 바뀌는 민주주의 과정에서 통용되는 것”이라며 “하지만 한국현대사학회 등은 ‘자유민주주의’를 반공 질서의 확립이라는 개념으로만 한정해서 보고 있다”고 말했다. 박병섭 상지대 교수(법학)는 “‘자유민주주의’라는 개념은 냉전시대에 ‘공산주의는 자유롭지 못하고 우리는 자유롭다’고 선전할 때나 사용됐던, 이제는 세계적으로도 폐기된 개념”이라고 지적했다. 이 때문에 교육계에선 정치권이나 보수진영이 교육과정을 이념투쟁 문제로 변질시키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재훈 최원형 김민경 기자 n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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