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2월27일 3주기를 계기로 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가 결성돼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이 초대 이사장으로 선출했다. 서울 종로2가 기념사업회 사무실에서 간사를 맡은 누나 박은숙(왼쪽)씨가 현판을 달고 있다.
박정기-아들보다 두 살 많은 아버지 44
박은숙이 막내 철이(종철)를 떠올릴 때 잊히지 않는 날이 있다. 1986년 봄, 태어나서 처음으로 구치소에 간 날이다. 그는 아버지와 함께 면회실에서 기다렸다. 낯선 죄수복을 입은 동생이 들어왔다. 아버지는 사과문을 쓰면 선처해줄 것이라며 설득했다. 그러자 동생은 갑자기 일어나 소리쳤다.
“앞으로 그런 말 하실 거면 다신 오지 마세요.”
은숙은 너무 놀라 울고 말았다. 한참 뒤 마음을 진정시킨 동생이 말했다.
“사과문 쓰란 말 하지 마시고 재판할 때 내가 말하는 최후진술을 잘 들으세요.”
그날 재판정에서 최후진술을 하던 모습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인간은 불을 사용하게 되면서 전쟁 무기를 만들었습니다.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불평등이 발생했습니다.”
동생은 인류의 기원과 노동의 탄생, 불평등의 역사를 설명했다. 자세는 반듯했고 목소리는 거침없고 당당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의 목소리가 흔들리고 있었다. “전태일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는 외침을 남기고 산화했습니다. 박정희의 죽음으로 70년대 유신체제가 막을 내렸지만 역사는 더 깊은 어둠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80년 5월 전두환 정권은 광주에서 죄 없는 민중들을 학살했습니다.” 더 말을 잇지 못한 동생은 울먹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재판정이 숙연해졌다. 최후진술은 긴 시간 이어졌다. 동생은 감정을 가눌 수 없는 순간엔 울분을 가라앉히며 말을 끊었고 잠시 후 다시 열변을 토했다. 재판정에서 박수가 쏟아질 때 그도 힘껏 박수를 쳤다. 판사 앞에서 당당한 동생이 자랑스러웠다. 동생의 최후진술은 ‘내가 아닌 학살자 전두환을 이 법정에 세워라’는 말로 끝맺었다. 그의 이상형은 동생이었다. 박은숙이 서른셋에 이르러서야 결혼하게 된 것은 동생 닮은 사람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철이 같은 사람이 없드라구요. 아무리 둘러봐도 비슷한 사람도 없는 거예요. 혼담이 참 많이 들어왔는데 그래서 결혼이 늦었지예.” ‘철이 같은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는 질문에 그는 ‘외유내강형, 선하면서 불의를 보면 지나치지 않는 사람, 기타를 잘 치는 사람’이라고 답변했다. 학창시절 동생은 외출할 때마다 기타를 둘러멨다. 동생이 오랫동안 분신처럼 여기던 기타는 지금 박종철기념관에 보관되어 있다. 박은숙은 동생만큼 헌신적인 운동가를 만난 적이 없다. “동생 자랑하는 것 같아 민망한데 정말 그래요. 난 걔처럼 순수한 인간을 본 적이 없어요. 내가 박종철기념사업회에서 서울대 후배들과 많은 일을 했는데, 언젠가 한번은 후배들이 ‘종철형이 어떤 사람이냐?’고 묻더라고요. 무슨 말인가 했더니 간밤에 제가 술에 취해 무지 나무랐대요. ‘철이 반만큼도 못 따라갈 놈들아!’ 그 말을 여러 차례 했대요.” 어느덧 쉰 줄에 들어섰지만 그는 여전히 동생이 그립다.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고 하잖아요. 부모만 그런 게 아니에요. 나도 그랬어요. 꿈에서라도 한번 보는 게 소원이에요.” 87년 5월 이후 동생은 꿈속에 나타나주지 않는다. 그런데 20년 전 그는 딱 한번 동생을 만났다고 했다. 마포의 어느 거리에서였다. 길을 걷던 그는 78번 버스를 보고 걸음을 멈추었다. 78번은 서울대로 가는 버스였다. 버스가 지나쳐 갈 때 그는 뒷좌석에서 낯익은 청년 한 명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는 것을 보았다. 박종철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다시 바라보았다. 다시 봐도 분명 동생이었다. 뛰기 시작했다. 버스는 빠른 속도로 멀어졌다. 앞을 횡단보도가 가로막았다. 빨간불이었다. 하지만 속도를 늦출 수 없었다. 질주하는 차들 사이로 뛰었다. 사방에서 경적 소리가 들렸다. 옆을 돌아볼 수 없었다. 숨이 차고 다리가 아팠다. 버스는 보일 듯 말 듯 멀어져 갔다. “그때 철이를 분명히 봤어요. 버스를 놓치고 길거리에 주저앉아 하염없이 울었어요. 철이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 자리에서 한 시간 넘게 울었어요.” 박은숙은 지금도 박종철이라는 이름 석 자를 입에 담기 어려워한다. 첫아이를 가졌을 땐 아파트 베란다에서 달을 보며 기도했다. 동생 닮은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실제 세 아이 중 첫애가 동생을 닮았다고 한다.
그는 88년 대학을 졸업한 뒤 백기완 선생이 운영하는 사직동의 통일문제연구소에서 일했다. 통일문제연구소는 동생이 맺어준 인연이었다. 백 선생의 조카 이은주가 동생의 가까운 친구였다. 백 선생의 사위 이종회는 오빠 종부의 대학시절 친구이기도 했다. 박은숙은 그 후 박종철기념사업회, 민주연합, 유가협 등에서 일하며 동생의 뜻을 이어왔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 공주로 자랐어요. 철이 떠나고 나서야, 왜 저렇게 똑똑한 학생들이 감옥생활을 하고 터무니없이 죽음을 당해야 하나 생각하게 되었어요. 알고 싶었고, 알아야 했어요. 인생 한번 사는 건데 의미있게 살고 싶었고 철이가 바라던 세상을 만들고 싶었어요. 다 같이 간고등어 먹는 세상요.”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고문/구술작가 송기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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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은 인류의 기원과 노동의 탄생, 불평등의 역사를 설명했다. 자세는 반듯했고 목소리는 거침없고 당당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의 목소리가 흔들리고 있었다. “전태일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는 외침을 남기고 산화했습니다. 박정희의 죽음으로 70년대 유신체제가 막을 내렸지만 역사는 더 깊은 어둠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80년 5월 전두환 정권은 광주에서 죄 없는 민중들을 학살했습니다.” 더 말을 잇지 못한 동생은 울먹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재판정이 숙연해졌다. 최후진술은 긴 시간 이어졌다. 동생은 감정을 가눌 수 없는 순간엔 울분을 가라앉히며 말을 끊었고 잠시 후 다시 열변을 토했다. 재판정에서 박수가 쏟아질 때 그도 힘껏 박수를 쳤다. 판사 앞에서 당당한 동생이 자랑스러웠다. 동생의 최후진술은 ‘내가 아닌 학살자 전두환을 이 법정에 세워라’는 말로 끝맺었다. 그의 이상형은 동생이었다. 박은숙이 서른셋에 이르러서야 결혼하게 된 것은 동생 닮은 사람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철이 같은 사람이 없드라구요. 아무리 둘러봐도 비슷한 사람도 없는 거예요. 혼담이 참 많이 들어왔는데 그래서 결혼이 늦었지예.” ‘철이 같은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는 질문에 그는 ‘외유내강형, 선하면서 불의를 보면 지나치지 않는 사람, 기타를 잘 치는 사람’이라고 답변했다. 학창시절 동생은 외출할 때마다 기타를 둘러멨다. 동생이 오랫동안 분신처럼 여기던 기타는 지금 박종철기념관에 보관되어 있다. 박은숙은 동생만큼 헌신적인 운동가를 만난 적이 없다. “동생 자랑하는 것 같아 민망한데 정말 그래요. 난 걔처럼 순수한 인간을 본 적이 없어요. 내가 박종철기념사업회에서 서울대 후배들과 많은 일을 했는데, 언젠가 한번은 후배들이 ‘종철형이 어떤 사람이냐?’고 묻더라고요. 무슨 말인가 했더니 간밤에 제가 술에 취해 무지 나무랐대요. ‘철이 반만큼도 못 따라갈 놈들아!’ 그 말을 여러 차례 했대요.” 어느덧 쉰 줄에 들어섰지만 그는 여전히 동생이 그립다.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고 하잖아요. 부모만 그런 게 아니에요. 나도 그랬어요. 꿈에서라도 한번 보는 게 소원이에요.” 87년 5월 이후 동생은 꿈속에 나타나주지 않는다. 그런데 20년 전 그는 딱 한번 동생을 만났다고 했다. 마포의 어느 거리에서였다. 길을 걷던 그는 78번 버스를 보고 걸음을 멈추었다. 78번은 서울대로 가는 버스였다. 버스가 지나쳐 갈 때 그는 뒷좌석에서 낯익은 청년 한 명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는 것을 보았다. 박종철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다시 바라보았다. 다시 봐도 분명 동생이었다. 뛰기 시작했다. 버스는 빠른 속도로 멀어졌다. 앞을 횡단보도가 가로막았다. 빨간불이었다. 하지만 속도를 늦출 수 없었다. 질주하는 차들 사이로 뛰었다. 사방에서 경적 소리가 들렸다. 옆을 돌아볼 수 없었다. 숨이 차고 다리가 아팠다. 버스는 보일 듯 말 듯 멀어져 갔다. “그때 철이를 분명히 봤어요. 버스를 놓치고 길거리에 주저앉아 하염없이 울었어요. 철이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 자리에서 한 시간 넘게 울었어요.” 박은숙은 지금도 박종철이라는 이름 석 자를 입에 담기 어려워한다. 첫아이를 가졌을 땐 아파트 베란다에서 달을 보며 기도했다. 동생 닮은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실제 세 아이 중 첫애가 동생을 닮았다고 한다.
박정기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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