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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교육

[길을찾아서] 1년전 뼛가루 뿌린 강가 찾아 “철이 어데까지 갔노?” / 박정기

등록 2012-02-14 20:08

1988년 1월14일 박종철 1주기를 맞아 열린 서울대 추모대회에서 어머니 정차순씨가 유족 대표로 인사하고 있다. 같은 시기 전국의 대학가에서 추모 행사가 진행됐다. 뒷줄 왼쪽부터 당시 민통련 의장 문익환 목사와 형 박종부씨가 보인다.  사진작가 박용수씨
1988년 1월14일 박종철 1주기를 맞아 열린 서울대 추모대회에서 어머니 정차순씨가 유족 대표로 인사하고 있다. 같은 시기 전국의 대학가에서 추모 행사가 진행됐다. 뒷줄 왼쪽부터 당시 민통련 의장 문익환 목사와 형 박종부씨가 보인다. 사진작가 박용수씨
박정기-아들보다 두 살 많은 아버지 50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를 앞둔 11월29일 이라크의 바그다드를 출발한 대한항공(KAL) 여객기가 인도양 상공에서 폭파됐다. 선거 전날에 맞춰 정부가 북한 공작원에 의한 테러라며 범인으로 지목한 마유미가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언론은 이 사건을 집중 보도하며 국민들의 안보심리를 자극했고 이는 선거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12월16일 선거 결과, 예상대로 집권 민정당의 노태우 후보가 36.6%의 득표로 당선되었다. 쟁취한 직선제 선거였지만 결과는 군부세력 집권 연장으로 이어졌다. 김영삼과 김대중 후보는 각각 28%와 27.1%를 득표했다. 단일화가 성사됐다면 결과는 달라졌을 것이 분명했다.

88년 1월12일 아침, 박정기는 임진강의 샛강변에 서 있었다. 1년 만이었다. 그는 아들 철이의 1주기를 앞두고 며칠 전부터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두통이 일고 정신이 멍해지는 증상에 시달렸다. 통증은 기일이 가까워질수록 심했다. 아들을 만나지 않으면 통증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는 아들을 찾아 집을 나섰다.

지난 1년 동안 겪은 변화는 그의 육십 평생 삶의 변화보다 큰 것이었다. 6월항쟁과 이한열 장례식, 노동자 대투쟁,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의 출범, 제13대 대통령 선거…. 박정기는 중요한 역사의 현장마다 서 있었다. 지난해 1월16일 이 샛강을 떠난 이후 알 수 없는 삶의 물결에 실려 흔들리며 걸어왔다. 아들의 길을 헤아리는 시간이었다. 아들의 길을 알아야 자신의 길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365일의 여정 끝에 그는 아들 곁으로 돌아왔다. 샛강변에서 박정기는 아들의 이름을 불렀다.

“철아!”

아들은 대답이 없었다. 그의 부름은 찬 공기에 실려 메아리로 되돌아왔다. 긴 침묵이 흘렀다. 그는 사방을 둘러보며 아들의 흔적을 찾았다. 가루로 흩어진 아들의 몸은 바람에 실려 어디로 날아갔을까? 박정기는 아들을 향해 혼잣말을 했다.

“우리 철이는 어데까지 갔노? 인제는 좁디좁은 강을 빠져나가 글마의 포부만큼이나 넓은 바다로 갔겠구마.”

언 강이 녹을 무렵 아들은 물결을 따라 서해로 흘러갔을 것이다. 지금쯤 서해 바다의 파도가 되어 굽이치며 더 너른 바다를 향하고 있을 것이다. 후회가 엄습해왔다. 그는 자신만큼 못난 애비가 또 있을까 생각했다. 그는 아들을 어느 땅에도 묻어주지 못했다. 정부의 강요에 의해 화장으로 떠나보낸 것이 못내 회한으로 남았다. 묘소라도 있으면 술 한잔 올리련만 황량한 샛강변에 선 자신이 서러웠다.

박정기는 얼마 전부터 후회를 씻는 심정으로 박종철의 묘를 만들어주려 노력했다. 주변 사람들의 조언으로 아들의 뜻을 기릴 수 있는 기념관도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일의 진척은 더뎠다. 다음 2주기 땐 샛강의 황량한 강변에서 아들을 만나고 싶지 않았다. 박정기는 강변에서 돌아서기 전 마지막으로 한번 더 이름을 외쳐 불렀다.


“철아, 잘 있그라. 이 못난 아부지는 간대이.”

어딘가로 떠나가는 아들의 뒷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눈시울이 붉어졌다. 날선 바람이 뺨을 때렸다.

다음날인 1월13일 오전 10시 부산의 사리암에서 1주기 추모법회가 열렸다. 박정기는 부산으로 돌아와 법회에 참석했다. 아내 정차순과 딸 은숙은 이튿날 서울대에서 열리는 추모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갔다. 추모법회엔 친척들과 전국 각지에서 찾아온 민가협과 유가협 회원 100여명이 참석했다.

법회는 도승 백우 스님의 집전으로 진행되었다. 백우 스님은 정도 스님과 함께 해마다 추모법회를 집전했다. 부산의 추모법회와 서울의 추모제는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열렸다. 올해 25주기 추모법회도 백우 스님의 집전으로 진행되었다.

추모법회 전날 박정기는 임진강변에서 본격적으로 유가협 활동을 할 것을 결심했다. 지난 1년간 그가 지켜본 유가협은 마음을 터넣고 함께할 수 있는 하나뿐인 공간이었다. 같은 처지의 유가족만이 주고받을 수 있는 이심전심이 그를 위로했다. 이소선 어머니에 대한 신뢰와 믿음도 유가협 활동을 결정하는 데 중요하게 작용했다. 87년 노동자 대투쟁을 거치며 이소선은 지식인과 노동운동가들에게 존경받는 이에서 노동자들의 어머니로 거듭나고 있었다. 박정기가 본 이소선은 거인의 풍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에게선 전태일이 느껴졌다. 박정기는 그런 면에서 감명을 받았다. 자신도 닮고 싶었다. 박정기에게서 누군가 박종철을 느껴주길 바랐다. 그는 아들을 닮고 싶었다.

박정기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고문
박정기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고문
매사에 신중한 박정기는 결정에 이르기까지 긴 시간이 걸리는 편이지만, 한번 결심하면 그 뜻에 흔들림이 없었다. 이때부터 그의 유가협 활동은 여든다섯이 된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침 없이 이어져왔다.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고문/구술작가 송기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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