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가협은 1990년 8월 후원회를 창립하고 옥중의 문익환 목사를 초대 후원회장으로 뽑았다. 그해 11월24일 특사로 풀려난 문 목사가 석방 환영회 겸 후원회 현판식에서 인사를 하고 있다.
박정기-아들보다 두 살 많은 아버지 79
1990년 8월12일, 8개월 남짓의 준비 끝에 유가협 후원회 창립대회가 열렸다. 후원회 창립 논의는 89년 말 한울삶 집들이에서 처음 나왔다. 그 자리에서 뜻있는 이들이 “열사의 뜻을 계승하는 일을 유가족에게만 맡길 수 없다”며 후원회 건설을 제안했다.
후원회는 5월13일 발족하려 했으나 준비 부족 등의 이유로 연기되었고, 그날 모인 10여명의 회원이 준비위원회를 꾸려 창립대회를 준비했다. 유가족의 지인들과 전진상 노래모임 등 100여명이 창립과 함께 후원회원으로 가입했다. 유가족과 달리 후원회원은 대부분 청년들이었다. 유가협은 후원회원과 대중들에게 활동 소식을 알리는 유가협 소식지 <한울삶>을 90년 3월부터 발간했다.
창립대회에서는 유가협 간사 정미경의 후배 권은경이 후원회 간사로 뽑혔다. 유가족인 박종철의 누나 박은숙과 이한열의 누나, 박선영의 언니 등이 실무를 거들기로 했다. 후원회 부회장은 이행자와 김재선, 총무는 전진상 노래모임의 이승혁이 뽑혔다.
초대 후원회장엔 89년 4월 ‘단독 방북’에서 돌아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전주교도소에 수감돼 있던 문익환 목사가 옥중 선출되었다. 창립대회 전부터 박정기와 이소선은 문익환을 천거했다.
“딴사람이 하면 안 돼요. 문익환 목사밲에 없습니더.”
방북 이후 문익환은 언론의 집중적인 지탄을 받고 있었다. 대중의 정서를 고려해야 한다며 몇몇 회원이 반대했지만, 그를 가까이서 지켜본 이들은 후원회장으로 그 외에 다른 이를 고려하지 않았다.
유가족들에게 문익환은 허물없이 의지하고 하소연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분신 사건이 터져 유가족들이 달려가면 늘 문익환이 있었다. 그는 유가족을 만나면 항상 아픈 곳을 물어보았다. 회원들이 성치 않은 몸을 내보이면 감옥에서 배운 파스요법으로 치료해주었다.
어느 자리에서든 재야의 어른 노릇을 맡아 의연한 모습만 보이던 유가족들은 문 목사가 오면 속엣말을 털어놓고 더러 투정도 부렸다. 박정기는 그런 문 목사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 않았다.
“내는 문 목사가 좋아. 유가협을 각별히 사랑한 따뜻한 어르신이었어. 항상 열사들에 대한 존경심을 힘주어 표현하곤 했어. 내는 그만큼 열사들을 존경한 사람을 보지 몬했어.”
박정기는 박래군, 김거성 목사와 함께 전주교도소에 찾아가 유가협 후원회장을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얼마 뒤 문익환은 흔쾌히 승낙의 편지를 보냈다. <한울삶> 제11호엔 문익환이 유가족들에게 보낸 편지가 실려 있다.
“몸에 불을 지르고 그 극심한 고통도 아랑곳않고 엉망으로 일그러진 입으로 ‘목사님, 이 땅에 노동자 농민의 생존권을…’, ‘아, 이 땅에 민주주의를…’, ‘민족통일을…’ 외치는 이 땅의 젊은 넋들의 아름다움과 비길 것이 이 지구상 어디에 또 있겠습니까? … 그것이 바로 그 아름다운 넋들의 한을 푸는 일이요, 그 넋들을 역사에서 되살리는 일 아니겠습니까? 이 일에 유가족이 앞장서지 않으면 누가 앞장서겠습니까?”
93년 3월6일 문익환이 특별사면으로 풀려난 뒤 박정기와 유가족들은 함께 모란공원을 찾아갔다. 문익환은 모란공원에 도착하자마자 열사들 묘역을 빠짐없이 찾아다니며 넙죽넙죽 절을 했다. 유가족들이 의아하게 생각했다.
“목사님은 기독교의 지도자신데 왜 그렇게 끝도 없이 절을 하십니까?”
문익환은 땀을 훔치며 대답했다.
“열사들께 석방 인사는 드려야죠.”
그는 목사였지만 종교에 매이지 않는 사람이었다. 박정기는 유가협 회장을 맡으며 그에게 숱하게 많은 부탁을 했지만 단 한번도 부탁을 거절당한 적이 없다. 문익환에게 열사들과 유가족들은 이 땅에 온 예수였다.
11월24일 동대문 한울삶 앞 골목에서 문익환 후원회장 환영회 및 유가협 후원회 현판식을 열었다. 문익환이 뒤늦은 취임사로 고마움을 전했다.
“많은 분들이 후원회를 만들고 힘써 일하는 것에 감명을 받았습니다. 이 일은 세상에서 가장 기쁘고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런 후원회의 회장이 된 게 기쁩니다.”
이날 문익환은 북한에 갔을 때 평양 봉수교회에서 부른 ‘마른 잎 다시 살아나’를 노래했다. 유가협 후원회는 93년 200명을 넘어설 만큼 하나의 단체로 성장했다. 후원회가 생기면서 한울삶과 앞 골목이 북적거리고 생기가 넘쳤다.
유가협은 후원회의 제안으로 90년 9월 말부터 11월 초까지 서울 소재 각 대학의 대동제에서 장터를 열었다. 유가협의 활동을 알리고 기금을 마련하려는 것이었다. 동대문의 한울삶을 마련하면서 생긴 빚을 청산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유가족들이 갹출하는 회비로는 빚은커녕 활동비를 마련하기에도 빠듯했다. 장터는 서강대·연세대·성균관대에서 열렸다. 어머니들은 주로 음식을 만들고 아버지들은 장터에 필요한 물품을사오고 음식을 날랐다.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고문/구술작가 송기역
박정기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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