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에서 공부를 좀먹는 유령이 있다. 상대주의라는 유령이.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외치는 이 유령은 90년대의 포스트모던주의의 야단법석이 지나간 현재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대충대충 생각하면서도 비판은 받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꺼내드는 무기가 되었다. 논쟁을 하다가 불리해지면 원래 의견이 갈리는 문제엔 ‘답’이 없다며 그 모든 논의의 지반에 핵폭탄을 아무렇지도 않게 터뜨린다. 그러면서 그게 쿨한 태도인 양 생각한다. 이렇게 ‘더 나은 것’이 없다는 이들의 태도에 오염되고 나면 대충 생각하는 버릇에 물든다. “그래, 네 결론은 그렇겠지. 그러나 내 결론은 달라. 끝.”
반면에 상대주의와는 전혀 다른 것으로, 공부에 꼭 필요한 게 있다. 그것은 ‘개방성’으로, 모든 문제에 대한 답은 잠정적이며, 더 나은 답을 찾기 위해서는 항상 다른 사람들의 논증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상대주의와 개방성을 구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가 쿨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개방적인 태도이다. 자신이 열렬히 지지하던 견해에 결정적인 반대 증거가 나오면 견해를 바꾸고, 반례가 제기되면 그 반례를 설득력 있게 처리하려고 하고, 상대 주장 중 옳은 부분이 있으면 수용하는 태도 말이다. 이것은 공부를 더 나은 답을 찾는 과정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태도다. 만약 이렇게 결론 내려도 좋고 저렇게 결론 내려도 좋은 문제를 갖고 왈가왈부하고 있다면 개방성이 가치를 가질 이유가 있겠는가? 개방적인 태도를 취한 사람의 문제해결이 폐쇄적이고 완고한 태도를 취한 사람의 문제해결과 아무런 가치 차이가 없을 텐데 말이다. 또한 개방성은 모든 주장을 똑같이 진지하게 대하라는 것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허황되거나 엉터리의 주장을 펼친다. 영구동력기관을 만든다며 투자해달라는 사람의 1000쪽에 달하는 사업보고서를 의무적으로 읽고 나서야 결정을 내려야 하는 법은 없다. 모든 사람들의 주장을 다 검토했다간 일상생활도 불가능할 것이다. 개방성은 합리적이고 합당한 지식의 구조에 맞는 논증 형태를 취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적용된다.
‘개방성’은 나태한 태도와는 정반대에 서게 된다. 그런데 개방성을 ‘열린 마음을 가져라’ 같은 수사로만 강조하는 것은 아무런 효과가 없다. 공부를 하다 보면 불가피하게 어떤 모델 ‘안’에서 작업하게 된다. 그래서 다들 자기 자신은 열려 있고 다른 사람은 닫혀 있다고 보기 쉽다.
비결은 ‘매듭짓기’에 있다. 문제에 대해 답을 냈는가? 그렇다면 문제를 적고, 그 근거와 결론을 모두 명제로 정리하라. 논리적 구조가 한눈에 들어오도록 순서대로 쓴다. 비판해야 할 다른 견해가 있다면 그 견해에 대한 결정적인 논박과 반례를 명제 형태로 정리한다. 이렇게 ‘명제의 논리적 구조’로 매듭짓기를 하지 않는 사람은 기껏해야 “넌 그 일을 겪지 않아서 몰라”라든가 “네가 뭘 모르네. 이 책을 읽어봐”라는 이야기만 한다. 바빠서 그런 게 아니라 진짜 그 말밖에 못한다. 이런 이야기는 스승과 제자가 되기로 한 사람 사이에는 의미 있는 대화지만 토론을 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전적으로 무의미한 말이다. 반면에 명제로 정리해두면 다른 사람에게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을 뼈대만이라도 쉽게 공유할 수 있다. 그리고 논증 과정에 모순이 있다면 단박에 드러난다. 틀린 걸 틀리지 않았다고 은폐할 수도 없다. 그리고 누군가 결국 타당하지는 않지만 의미 있는 논박을 하면 그 명제 아래에 반박과 재반박의 명제와 그 근거를 써넣어 알고 있는 바를 더 발전시킬 수 있다.
<이것이 공부다> <정의란 무엇인가는 틀렸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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