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리 안에 굶는 이가 없도록 하라”는 신념을 실천했던 경주 최부자 가문의 고택. 최부자 가문은 우리나라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대명사로 손꼽힌다.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NIE 홈스쿨] 노블레스 오블리주
얼마 전 80대 택시운전사가 서울 장충동 신라호텔 회전문을 망가뜨려 4억원의 피해를 끼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당시 이부진 신라호텔 사장이 이 택시운전사의 배상 책임을 면제해주면서 큰 화제가 됐죠. 몇몇 언론들은 이 사장의 행동을 두고 ‘노블레스 오블리주’라고 평가했습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는 프랑스어로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를 뜻합니다. 이 말을 설명할 때는 일반적으로 14세기, 백년전쟁 당시 프랑스의 도시 ‘칼레’가 영국군에게 포위당했을 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칼레는 더 이상 원군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고 항복을 합니다. 그리고 칼레의 항복 사절단이 영국 왕 에드워드 3세에게 파견됩니다. 하지만 영국 쪽에서는 “모든 시민의 생명을 보장하는 조건으로 누군가가 그동안의 반항에 대해 책임을 지라”며 도시의 대표 6명이 목을 맬 것을 요구합니다. 모두 머뭇거리는 상황에서 칼레에서 가장 부자로 알려진 ‘외스타슈 드 생피에르’가 나섭니다. 이어 다른 귀족들도 처형을 자청합니다. 하지만 임신 중이었던 에드워드 3세의 왕비는 태아에게 안 좋은 영향이 갈지도 모른다며 이들을 처형하지 말 것을 왕에게 간청합니다. 귀족들이 높은 신분에 따라 공동체를 보호하는 데 앞장서는 등 도덕적 의무를 졌다는 이 이야기는 널리 알려집니다. 프랑스의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은 이들의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 ‘칼레의 시민’이라는 기념상을 제작하기도 했습니다.
로마제국 귀족들에게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불문율로 통했습니다. 초기 로마 공화정 귀족들은 솔선해 카르타고와 벌인 포에니 전쟁에 참여했습니다. 16년 동안 이어진 제2차 포에니 전쟁(BC218~202) 때는 13명의 집정관이 전사했습니다. 집정관은 로마 공화정 시기에는 가장 높은 관직이었습니다. 로마 귀족들은 자신이 노예와 다른 점은 단순히 신분이 높다는 것만이 아니라 사회적 의무를 실천할 수 있다는 점으로 보고 노블레스 오블리주 실천에 대해 자부심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병역의 의무를 다하지 않은 사람은 호민관이나 집정관 등 고위공직자가 될 수 없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전쟁에 참여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사례로는 영국 왕실이 손꼽힙니다. 귀족 집안 자제들이 다니던 영국 이튼스쿨과 트리니티칼리지 등 명문학교 재학생 중에는 제1, 2차 세계대전에 자원해 전사한 학생이 많았습니다. 또 영국 왕실 남자들은 100% 장교의 신분으로 군복무를 마치도록 되어 있습니다. 상류층, 사회 저명인사들이 병역기피 문제로 손가락질을 받는 우리나라와는 다른 모습입니다.
그런데 노블레스 오블리주에 대해서는 또다른 견해가 있습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사회 공동체의 보호와 통합 등을 위한 귀족 계층의 의무’로 평가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를 ‘상위계층의 지배 논리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근대 이전까지 백성은 귀족에게 세금을 바치는 존재에 불과했습니다. 정치, 외교 등에 대한 고민은 백성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귀족들의 고민이었죠. 그런 점에서 귀족들이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건 사회 공동체 모두를 위한 게 아니라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행위였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실제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강조하는 유럽에서 국민 개병제는 나폴레옹 시대 이후에 나왔고, 이전까지 전쟁은 기사계급만의 일이었습니다. 서양 봉건사회에서 백성들은 영주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영주끼리 싸워 한 영주가 이기면 이 사람에게 세금을 내면 그만이었습니다. 이때는 민족국가라는 게 없었습니다.
역사적으로 우리나라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사례로는 조선 정조 때 기근으로 식량난에 허덕이던 제주도 사람들을 위해 전 재산으로 쌀을 사서 나눈 거상 김만덕, “백리 안에 굶는 이가 없도록 하라”는 신념을 실천했던 경주 최부자 가문 등이 손꼽힙니다. 미국에서 중국 상인이 탈세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고 자신의 사업체를 설립한 뒤 정경유착, 탈세 등을 절대 하지 않았다던 유한양행 설립자 유일한도 있습니다. 전세계적으로는 스스로 부유세를 거둬야 한다고 강조하는 워런 버핏 버크셔해서웨이 회장의 경우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대표하는 인물로 꼽힙니다.
평소 상류층 특권 누리는 대신
신분에 상응하는 의무 이행 앞장
로마 귀족들은 전쟁터 자청했고
영국 왕실 남자들은 군복무 당연시
병역기피 지탄받는 한국과 달라 공동체 보호하려는 책임의식인가
지배층 논리 정당화하는 수단인가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주인공들은 ‘귀족’이 아니라 ‘부를 많이 축적한 기업가’입니다. 특히 최근 들어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기업가의 기부, 자선 행위 등에 한정해 이야기되는 현상이 두드러집니다.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 미국의 거대 기업들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잘 이용했다는 평가도 받습니다. 세계 최고의 부자이자 위대한 자선가로 알려졌던 석유왕 존 록펠러는 미국 자본주의를 대표하는 록펠러 가문을 일으킨 사람입니다. 그는 석유 사업으로 막대한 부를 쌓았지만 항상 “더러운 돈으로 부자가 됐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미국 석유 시장의 대부분을 점유한 독점 기업을 운영하면서 온갖 편법과 불법을 저질렀기 때문입니다. 이 악덕 기업가가 세계 최고의 자선 사업가로 알려진 건 그동안의 오명을 씻고자 엄청난 돈을 사회에 기부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1913년 5000만달러를 기부하며 세계 최대의 재단인 록펠러재단 등을 설립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기부활동을 비판적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기업가의 기부, 자선 행위 등이 그동안의 잘못에 대한 면피를 위한 방책으로 쓰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루스벨트 대통령은 록펠러에 대해 “그가 얼마나 선행을 하든지 간에 재산을 쌓기 위해 저지른 악행을 갚을 수는 없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호텔신라 이 사장의 ‘선심’에 대해서 의견도 분분합니다. “택시기사에게 배상책임을 묻지 않은 일은 긍정적으로 평가받을 만하지만 개운치 않은 면이 있다”는 이야기도 나옵니다. 이 사장의 아버지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과 삼성그룹이 그동안 많은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기 때문입니다. 교과서 펼쳐보기 | 개인의 사회적 책임 “‘대한민국 홍보전문가로 알려진 서○○ 교수는 대학 시절 다양한 경험을 하며 보냈다. 그는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실험해 보자는 취지에서 전국 대학생 연합 동아리를 만들어 많은 시도를 해왔다. 첫 프로젝트는 서울시 수도 600년 기념 타임캡슐 행사였다. 서울시에서는 타임캡슐에 들어갈 서울의 대표 문물 600점을 모으고 있었다.(…)’ 위 사례의 주인공은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개인적 삶에 만족하지 않고,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자신의 역할을 적극적으로 찾아 실천하고 있다. 이처럼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자신의 선택과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 사회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지 이해하고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중학교 <도덕 3>, 미래엔, 21~22쪽)
책으로 확장하기 | 자본주의 사회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역사적으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뜻은 ‘귀족이 목숨을 아끼지 않는 용기와 솔선수범’에서 ‘사회지도층의 도덕적 책무’로 변해왔습니다. 요즘 시대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부를 많이 축적한 사람의 나눔’ 정도로 이야기됩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세상을 비추는 기부의 역사>는 고대 그리스부터 현대까지 이어지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역사 및 미국과 우리나라의 기부 문화를 살펴보면서 우리 사회에 건전한 기부 문화가 자리를 잡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지를 이야기합니다. 저자는 책의 말미에 우리나라 기부 현실을 살펴보면서 “기업의 기부가 많고, 기업들은 홍보활동에 더 신경을 쓰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합니다. 그러면서 우리 사회 기부를 기업 중심에서 개인 중심으로, 일회성 기부에서 정기 기부로, 비자발적 기부에서 자발적 기부로, 다액 소수에서 소액 다수로 바꿀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논제로 정리하기 | 노블레스 오블리주와 기업의 사회공헌
2006년 이건희 삼성 회장은 8000억원을 사회에 헌납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다며 긍정적으로 보는 입장도 있었지만 당시 에버랜드 전환 사채 편법 배정 논란 등을 무마하려는 전시용 행위라는 비판도 있었습니다. 당시 경희대, 숙명여대 수시 논술에서는 ‘기업에 대한 부정적인 정서를 완화시키는 데 이러한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어떠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말해 보시오’라는 논제가 출제됐습니다. 기업이 행했던 부도덕한 일들이 막대한 돈을 들인 사회공헌으로 무마될 수 있을지 생각해보게 하는 논제입니다. 김청연 기자 carax3@hanedui.com
신분에 상응하는 의무 이행 앞장
로마 귀족들은 전쟁터 자청했고
영국 왕실 남자들은 군복무 당연시
병역기피 지탄받는 한국과 달라 공동체 보호하려는 책임의식인가
지배층 논리 정당화하는 수단인가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주인공들은 ‘귀족’이 아니라 ‘부를 많이 축적한 기업가’입니다. 특히 최근 들어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기업가의 기부, 자선 행위 등에 한정해 이야기되는 현상이 두드러집니다.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 미국의 거대 기업들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잘 이용했다는 평가도 받습니다. 세계 최고의 부자이자 위대한 자선가로 알려졌던 석유왕 존 록펠러는 미국 자본주의를 대표하는 록펠러 가문을 일으킨 사람입니다. 그는 석유 사업으로 막대한 부를 쌓았지만 항상 “더러운 돈으로 부자가 됐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미국 석유 시장의 대부분을 점유한 독점 기업을 운영하면서 온갖 편법과 불법을 저질렀기 때문입니다. 이 악덕 기업가가 세계 최고의 자선 사업가로 알려진 건 그동안의 오명을 씻고자 엄청난 돈을 사회에 기부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1913년 5000만달러를 기부하며 세계 최대의 재단인 록펠러재단 등을 설립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기부활동을 비판적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기업가의 기부, 자선 행위 등이 그동안의 잘못에 대한 면피를 위한 방책으로 쓰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루스벨트 대통령은 록펠러에 대해 “그가 얼마나 선행을 하든지 간에 재산을 쌓기 위해 저지른 악행을 갚을 수는 없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호텔신라 이 사장의 ‘선심’에 대해서 의견도 분분합니다. “택시기사에게 배상책임을 묻지 않은 일은 긍정적으로 평가받을 만하지만 개운치 않은 면이 있다”는 이야기도 나옵니다. 이 사장의 아버지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과 삼성그룹이 그동안 많은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기 때문입니다. 교과서 펼쳐보기 | 개인의 사회적 책임 “‘대한민국 홍보전문가로 알려진 서○○ 교수는 대학 시절 다양한 경험을 하며 보냈다. 그는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실험해 보자는 취지에서 전국 대학생 연합 동아리를 만들어 많은 시도를 해왔다. 첫 프로젝트는 서울시 수도 600년 기념 타임캡슐 행사였다. 서울시에서는 타임캡슐에 들어갈 서울의 대표 문물 600점을 모으고 있었다.(…)’ 위 사례의 주인공은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개인적 삶에 만족하지 않고,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자신의 역할을 적극적으로 찾아 실천하고 있다. 이처럼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자신의 선택과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 사회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지 이해하고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중학교 <도덕 3>, 미래엔, 21~22쪽)
<노블레스 오블리주-세상을 비추는 기부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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