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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1.28 18:15 수정 : 2005.01.28 18:15

로버트 러플린 한국과학기술원(KAIST) 총장이 지난 해 10월 대전 KAIST에서 열린 국회 과기정위 국정감사에 출석해 증인선서를 하고 있다. 연합


미국모델 이식 충돌…'사립화' 갈등 폭발
이사회뒤 갈등 진정…변화에 공감

많은 관심과 기대 속에 취임했던 로버트 러플린 한국과학기술원(카이스트) 총장이 카이스트 사립화 구상을 내걸면서 카이스트가 홍역을 치르고 있다. 노벨상 수상자인 러플린은 ‘외부수혈’을 통한 개혁과 개방을 이룰 것이라는 기대와는 달리 카이스트의 정체성마저 흔들고 있다는 우려마저 자아내고 있다. 러플린 사태는 주체적인 준비가 안된채 개혁과 개방을 둘러싸고 혼란을 거듭하는 우리의 현 주소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지적되고 있다. 편집자

러플린 총장은 요즘 ‘혼자’다.

한국 과학인재의 요람으로 꼽히는 국립 한국과학기술원(카이스트)의 총장이지만, 대학 행정은 거의 대부분 부총장에 의해 움직인다. 한국 사정에 어두운 그에게 보좌팀은 따로 없다. 통역 수행비서가 유일한 보좌역이다. 카이스트 쪽에 러플린 총장의 정책 방향을 물으면 ‘총장한테 직접 여쭤보시라’는 답변을 듣기 십상이다. 취임 초기에 그는 역할분담에 따라 행정을 부총장한테 넘기고 기획실 조직은 거부했다고 한다.

최근엔 지난해 12월 그가 밝힌 이른바 ‘카이스트 사립화 구상’이 불거지면서 노벨물리학상(1997년)을 받은 저명 과학자 총장의 대학 개혁을 기대했던 교수들조차 그에게서 등을 돌리고 있다. 취임 전부터 러플린 총장을 돕던 박오옥 기획처장이 지난 13일 러플린 구상에 반대하며 보직사퇴한 것은 갈등을 증폭시켰다. 한때 보직교수들의 총사퇴 움직임이 일기도 했다.

"탈산업사회 대학 아직 무리"


한 교수는 “교내 인맥이 없는 외국인인 데다 노벨상을 받는 총장이라면 카이스트인이 생각하지 못한 개혁을 이루리라 기대했는데, 기대가 혼란으로 변했다”고 말한다. 세상사보다 실험실에 더 익숙한 그는 “도대체 왜 학교를 이꼴로 만드는지 모르겠다”며 평소 성품에 어울리지 않는 분통을 터뜨렸다. 이공계 연구중심대학의 전통이 흔들리고 지방 사립대의 하나로 전락하는 게 아니냐는 불안이 교수·학생들 사이에 퍼졌다.

발단은 지난해 12월14일 교수들이 참여하는 ‘카이스트 비전 워크숍’에서 나왔다. 러플린 총장은 취임 다섯달만에 자신의 카이스트 발전 구상을 처음 밝혔다. 교수들은 신임 총장이 향후 카이스트를 어떻게 바꿀지 관심이 높던 때였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연 러플린의 구상은 교수들한테 다소 엉뚱한 것이었다.

러플린 총장은 ‘탈산업사회에 걸맞는 세계 수준의 대학’이라는 비전을 제시했다. 6억원 가량의 고액연봉을 받는 총장으로서 러플린은 자신의 사명을 “카이스트를 세계 수준의 대학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여겼다. 미국의 매서추세츠공대나 스탠포드대학은 그 모델이었다.

이를 위해 우선 충분한 재정 확보가 필요하고, 현재 7천명의 학생을 2만명으로 늘리며 연간 등록금도 80만원 수준(학부 기준)에서 600만원으로 올려야 한다는 제안을 냈다. 산업사회의 고객인 산업체의 인재 양성이 아니라 탈산업사회의 새로운 고객인 학생과 학부모한테 만족과 기회를 주기 위해선 법대·의대·경영대학원 예비반도 만들자는 얘기도 나왔다.

카이스트 교수들이 이해하는 바는 완전히 달랐다. 그대로 간다면 연구중심대학으로 30여년 쌓아온 카이스트의 정체성은 와르르 무너질 판이었다. ‘사립화 구상’으로 요약된 러플린의 제안은 연말부터 언론을 통해 학내외에서 확대됐다.

이 대목에는 약간의 오해가 있다고 최병규 교수(카이스트 비전 임시위원회 위원장)는 말한다. 그는 “러플린 총장은 카이스트 비전 임시위원회에 중진 교수 20명을 발령내고는 자신의 구상에 대한 비판과 대안을 수렴해 카이스트 발전 실행계획을 만들어달라고 주문했다”며 “자신의 구상은 시안일 뿐이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사정을 아는 정부 고위관계자도 “러플린 총장이 만든 제안서는 그가 직접 그린 그림까지 곁들인 ‘에세이’(자유롭게 쓴 글) 수준이었다”며 “총장 러플린의 구상은 큰 울림을 일으킬 수 밖에 없는데 그가 이런 맥락을 이해하고 발언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러플린 구상은 실제보다 다소 확대해석된 측면도 있다는 얘기다.

러플린 총장은 한국 정부가 지원하는 국립대학 체제를 부정하는 듯한 태도를 보여 불신을 사기도 했다. 그는 국립 카이스트가 정부의 재정 지원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립화’는 그런 생각의 핵심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해 러플린 총장은 “(언론이 사립화 구상이라고 말하지만) 나는 사립화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으며 ‘고객(학생·학부모) 관계’라는 말을 좋아한다”라는 말로 에둘러 말했다.

그는 ‘재정 확충’이란 말을 더 자주 쓴다. 정부의 카이스트 재정 지원이 점점 줄어 30여%에 불과한 상황에서 다른 재정 확충 방안이 필요하다고 여러 차례 밝힌 바 있다. 배용덕 노조위원장은 “카이스트 재정은 30여%가 정부 지원금이고 나머지는 기금이나 프로젝트 지원금으로 충당한다”며 “총장은 정부 지원이 줄어드는 불안정한 재정 체제를 등록금 인상으로 풀려 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러플린의 구상에 반발한다고 해서 교수들이 옛 체제를 고수하자는 쪽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변화와 개혁은 외국인 총장과 교수·학생·교직원들 사이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는 ‘공약수’다. 최병규 비전위원장은 “30여년 비슷하게 유지해온 카이스트의 기존 틀로는 이제 안된다는 공감이 많다”며 “카이스트가 새롭게 도약하려면 변화와 개혁은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그는 “총장과 교수들 사이에 ‘어떻게’ 개혁할 것인지에 대한 의견 차이가 벌어지는 것일 뿐이라고 본다”고 덧붙였다.

지난해 과학기술부가 ‘러플린 총장 모시기’에 나선 것도 이공계 대학 개혁의 모범을 이뤄보자는 뜻에서 비롯했다. 당시 과기부 주무국장은 “카이스트가 국제 수준으로 교과과정을 쇄신해 이공계 대학의 개혁을 이끄는 역할을 맡게 될 것으로 기대한다”라는 희망을 강조했다.

그런데도 변화를 요구하는 교수들한테 러플린의 변화 구상이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킨 것은 왜일까. 정부 고위관계자는 “러플린 총장은 한 단계를 생략하고 다음 단계로 뛰어넘는 개혁을 요구하는 것 같다”며 “한국사회는 여전히 산업사회를 지나가는 마당에 탈산업사회에 걸맞는 대학 체제를 요구하는 것은 판단 착오”라고 평했다.

러플린 총장이 한국을 바라보는 시각도 불신의 뿌리 구실을 하고 있다. 노벨상 수상자로서 노무현 대통령의 면담은 당연하다며 대통령 면담을 요구해 주변에서 애를 먹기도 했다는 후문도 들린다. 여기에 외국인 총장의 ‘미국식 사고방식’과 그만의 독특한 개성이 한몫했다. 러플린은 ‘나는 돈 벌러 한국에 왔다’는 말을 거침없이 할 정도로 자기 생각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성품으로 잘 알려져 있다. ‘교수들의 생각은 교수들 생각이고 내 생각은 내 생각이다’는 식의 고집스러움은 교직원들을 애먹이고 있다.

한국사회, 그리고 카이스트가 걸어온 ‘역사’의 경험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그의 머리 속에서만 이뤄진 ‘사고실험’의 결과는, 외국인 총장과 교수들 사이에 깊은 골만 만들었다. ‘한국 과학기술계의 히딩크’로 기대를 모았던 러플린 총장에게 적절한 한국인 참모들이 없었고, 그의 견해가 조율되어 공개되는 과정이 없었다.

한때 러플린 총장의 사퇴 가능성까지 제기되자 가장 곤혹스러운 것은 과기부다. 과기부 관계자는 “참 어렵게 됐다. 러플린이 사퇴하겠다고 해도 문제이고 사립화를 고집해도 문제다“라며 난감한 처지를 내비쳤다. 최석식 과기부 차관은 27일 러플린 총장을 만나 오랜 시간 의견을 나누기도 했다. 과기부 관계자는 “일단 러플린 구상이 세계 수준의 대학을 목적으로 한 것이지 사립화 자체를 고집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며 “다음주 러플린이 직접 자신의 구상을 정리해 밝히는 기자회견을 마련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지난 24일 카이스트 이사회 이후 ‘사립화 구상’ 논란은 다소 진정국면에 들어갔다. 과기부 조청원 과학기술기반국장은 이사회에서 “한국과학기술원법에 따라 설립된 카이스트의 변화는 법의 틀 안에서 이뤄져야 한다”는 현 체제의 기본틀 유지 원칙을 전달했다. 이후엔 러플린 총장도 ‘대화’와 ‘협의’라는 말을 유난히 강조하고 있다. 그는 “나는 선거로 뽑힌 총장도 아니니 과기부와 협의해 일을 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자유분방한 그가 꽤나 신중해졌다.

공은 다시 카이스트 쪽으로 넘어갔다. 3월 임시이사회에 러플린 총장 체제가 만든 카이스트 발전 계획안이 제출돼 논의를 시작하게 된다. 과기부 국장이 이사로 참여하는 이사회는 러플린 총장의 선택 카드를 좁힐 것이다. 최병규 비전위원장은 “교내의 다양한 의견 뿐 아니라, 청와대·과학기술부·국회 등을 찾아 의견을 듣고 있다”며 “대체로 과학인재 양성이라는 카이스트의 미션(임무)은 변함 없다는 의견이 다수여서 그 틀 안에서 발전계획이 모색될 것 같다”고 말했다.

러플린이 카이스트 총장에서 스스로 도중 하차한다면 그것을 그의 책임만으로 돌릴 수 있을까. 교수들이 총장의 개혁안에 반대한다면 그것을 세계 대학의 추세를 외면하는 우물안 개구리의 시각으로만 돌릴 수 있을까. 러플린 사태의 핵심은 개혁과 개방을 둘러싼 우리의 현주소라는 것이 이 사태를 지켜본 사람들의 공통적인 지적이다. 오철우 기자 cheolwoo@hani.co.kr



학생 교직원 반응
공공연구 기술인재 양성 정체성 지키기에 '한표'

로버트 러플린 총장의 이른바 ‘카이스트 사립화 구상’을 둘러싸고 총장과 교수들 사이에 의견차이를 나타내고 있는 가운데 학생과 교직원들은 신중한 자세를 보이면서도 러플린의 사립화 구상에 대해 부정적 시각을 나타내고 있다. 일부 학생·교직원들은 “언론이 러플린 총장과 교수사회의 갈등으로만 바라보고 있다”며 불만을 나타내기도 했다.

학생들은 대체로 현재의 국립 연구중심대학의 체제를 선호하는 쪽으로 나타나고 있다. 대학원과 학부 총학생회는 지난해 12월 러플린 총장이 자신의 구상을 밝힌 데 이어 ‘사립화’와 ‘학부 중심 종합대학화’가 쟁점으로 떠오르자 지난 17일 ‘카이스트 비전 학생토론회’를 열어 학생들 내부의 의견 수렴에 나섰다. 이들은 현재 학생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벌이고 있다.

현재 진행 중인 설문조사에서도 응답자들은 대체로 러플린 구상에 대해 부정적인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설문조사를 중간 집계한 결과, 학부 중심의 대학 육성 방안을 지지한다는 답변은 11.1%에 그친 반면에, 79.7%는 지금의 대학원 중심 교육기관을 유지하는 것을 찬성했다. 이런 응답은 카이스트가 는 국가 재정지원을 받아 공공연구를 주로 하며 이공계 인재를 양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세워졌는데, 학부 중심의 종합대학으로 탈바꿈하는 것은 결국 카이스트의 정체성을 뒤흔들 것이라는 우려가 더 큰 것으로 풀이된다.

교직원들의 반발 역시 심상찮은 가운데, 노조는 일단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배용덕 노조위원장은 “러플린 총장의 진의가 무엇인지 직접 듣고 파악하는 게 우선이므로 현재 러플린 총장의 개혁방안에 대해 가타부타 말할 수 있는 단계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배 위원장은 “다만 총장의 개혁방안은 그대로 따르면 교수 충원 문제나 학생기숙사 문제 등 여러 현실의 문제들이 생겨난다”며 “좀더 현실적 실행방안이 담긴 개혁과 변화가 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대전/송인걸 기자 igs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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