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난 16일 송곡여고 학생들이 서울시농업기술센터의 ‘찾아가는 전통음식 체험 프로그램'을 통해 간단고추장을 만들고 있다.
지난 16일 아침 서울 관악구에 위치한 인헌중. 발걸음을 재촉하며 등교하는 학생들 틈에 끼어 교문에 들어서자 화사한 꽃들이 눈에 띈다. 몇몇 학생들은 교정을 돌아다니며 나무와 꽃 사진을 열심히 찍고 있다. 낯선 풍경이다. 보통 아침 시간이면 책상에 엎드려 부족한 잠을 자거나 친구와 수다 떠느라 바쁜 아이들 모습과는 달랐다.
사진을 찍는 이들은 식물이름적기대회를 준비하는 꽃사랑 동아리 학생들이었다. 교무실에서도 꽃 사진과 특징이 적힌 종이를 코팅하는 다른 친구들의 손길이 분주했다. 교내 화단에 있는 식물과 꽃의 이름표를 만드는 작업을 위해 식물도감을 일일이 찾아 정확한 이름을 확인했다.
인성교육·감성교육 강조하지만
삭막한 환경서 아이들은 교과수업만
생태정원 가꾸기·전통음식 만들기 등
서울시교육청 특색사업 눈길
감성지수 오르고 식습관 개선 효과도
동아리를 이끄는 이선희 교사는 “지난해 학교에 발령받아 왔는데 건물만 덩그러니 있어서 삭막한 공장 같았다. 아이들이 간식을 사먹느라 넘어 다니는 담벼락 아래쪽도 흙만 쌓인 채 방치돼 있었다”고 했다. 이 교사는 학교 환경을 바꿔보자 마음먹고 학생들과 ‘꽃사랑 동아리’를 만들어 생태정원 가꾸기에 나섰다.
2. 지난 16일 숭례초 학생들이 김영자 교사와 교내 현관 앞 화단에 심은 꽃에 물을 주고 있다.
학생들은 각자 팀을 꾸려 세밀화 그리기 대회나 교내 식물사진 공모전, 식물 이름 쓰기 대회 등 다양한 행사를 직접 기획했다. 환경 퀴즈대회를 준비하는 팀은 점심시간에 등나무 아래 벤치에서 퀴즈를 열기로 했다. 상품도 준비했다. 인터넷을 뒤져 마거리트, 버베나 등 학교에 있는 꽃의 압화를 구매해 직접 꽃배지를 만들어줄 생각이다. 단순히 동아리 부원만 관심을 갖는 게 아니라 다른 친구들의 참여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다.
학생들뿐 아니라 교사도 나섰다. 미술교사는 학교 정문 앞 전봇 대나 동네 버려진 공간에 ‘게릴라 가드닝’(남의 땅이지만 비어 있는 상태로 방치된 곳을 깨끗이 치우고 정원으로 꾸미는 행위를 뜻함) 계획을 세우고 있다. 아이들과 함께 자료조사를 해서 적당한 위치를 정했고 화단을 만드는 데 필요한 재료를 구매했다.
동아리 부원인 3학년 조인영양은 “세밀화 그리기 대회를 준비하면서 꽃의 생김새를 자세히 들여다보게 됐다. 평소 미술에 관심이 많아서 기존 세밀화를 찾아서 어떻게 그리는지 보고 학교에 있는 꽃을 관찰해 직접 그려봤다”고 했다.
숭례초 등 전체 학급에 씨앗트레이와 화분 있어
도시 아이들은 자연과 접할 기회가 드물다. 요즘에는 아파트가 아니라도 화단이나 장독대가 있는 집도 드물다. 최근 들어 감성교육, 인성교육을 강조하지만 학교 현장에서는 여전히 교과학습 위주로 수업을 진행한다.
이런 삭막한 환경에서 자라는 아이들을 위해 교육청 차원에서 발벗고 나섰다. 서울시교육청은 올해부터 ‘2016 서울학생, 꽃과 친구가 되다’라는 주제로 ‘학교생태정원 가꾸기’ 31곳, ‘꽃사랑 동아리’ 220곳을 지정했다. 또 ‘전통음식문화 계승 선도학교’도 17곳을 선정해 운영 중이다. 각각 꽃사랑 동아리를 꾸려 생태정원을 만드는 활동을 지원하고, 명인에게 직접 전통음식을 만드는 법을 배울 수 있게 하는 내용이다. 식물을 기르며 아이들의 감성을 깨우고 우리 전통 식문화를 알리기 위한 특색사업인 셈이다.
3. 지난 16일 인헌중 꽃사랑 동아리 학생들과 이선희 교사가 압화를 이용해 만든 꽃배지를 들고 자세를 취했다.
인헌중의 다양한 활동도 교육청의 지원을 받아 진행할 수 있었다. 이 교사는 아이들이 꽃과 식물 이름을 많이 아는 것보다 주체적으로 활동을 계획하고 실행하는 데 방점을 찍었다. “처음 동아리에 모인 학생들이 식물에 관심은 있었지만 구체적으로 뭘 해야 할지 몰라서 나만 멀뚱멀뚱 쳐다봤다. 나는 ‘물 주라는 말도 안 할 거고, 식물이 시들어도 너희 몫이다. 뭔가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지원해주겠다’고만 얘기했다.”
이 교사는 학생들이 기획한 활동에 필요한 예산을 배분하고 구매하는 데만 도움을 줬다. 조양은 “무엇을 할지 우리가 직접 회의를 해서 결정했다. 또 자기가 직접 심은 식물은 스스로 돌봐야 한다. 식물이 죽어가도 선생님이 따로 물 주지 않기 때문에 잘 키워야 한다는 책임감도 생겼다. 관리를 잘해서 학교 곳곳에 봄꽃이 화려하게 색색깔로 펼쳐진 걸 보니 기분이 좋다”고 했다.
이 사업을 단순히 동아리 차원이 아니라 전교생 대상으로 확대한 경우도 있다. 인성을 교실에서 책으로 가르치기보다 직접 활동하며 깨우치게 하기 위해서다.
숭례초(서울 성북구)는 모든 학급에 씨앗트레이와 화분이 있다. 학생들은 콩·상추·쑥갓·치커리·케일 등을 기르고 있다. 씨앗을 심는 과정부터 싹을 틔우고 어느 정도 자라면 화분에 옮겨심는 작업까지 학생들이 직접 체험해본다.
조부모가 시골에 사는 소수의 아이들을 빼고는 이전까지 직접 씨앗을 길러본 경험이 없었다. 서로 앞다퉈 물조리개를 들고 화단에 물을 주던 학생들은 “씨앗이나 모종이 자라서 꽃이 피고 잎이 나는 걸 보면 신기하다”고 했다. 이 활동을 하면서 알게 된 꽃을 묻자 “마가렛(마거리트)·바위취·종이꽃·사루비아(샐비어)·패랭이·베고니아” 등 생소한 꽃 이름이 아이들 입에서 술술 나왔다.
배혜경 교장은 “학교가 도로변에 있어서 번잡한 분위기에 낙엽만 잔뜩 쌓여 있었다. 교내 화단에 야생화를 심고 미니연못을 만들자 학교가 예뻐졌다며 나한테 고맙다고 인사하는 학생도 있었다. 학부모들도 야생화나 수중식물을 심어놓은 걸 보고 아이들과 사진을 찍으며 좋아한다”고 했다.
김영자 교사는 “학생들이 변화된 학교의 모습에 관심을 갖고 식물을 아끼는 마음을 기르기 위해 ‘학교사랑 사진공모전’을 준비 중”이라며 “학생들이 각자 식물관찰일지를 쓰는데 친구들과 함께 꽃을 관찰하면서 우정도 쌓고, 식물을 접하는 아이들 표정이 전보다 밝아졌다”고 했다.
송곡여중, 장 담그며 전통음식 접할 기회 줘
같은 날 중랑구에 위치한 송곡여중에서는 귀여운 앞치마를 두르고 요리사 모자를 쓴 1학년 학생 20명이 가사실에 모였다. 학생들 앞에는 쌀조청·메줏가루·고추장용 고춧가루·소금 등이 놓여 있었다. 서울시농업기술센터의 ‘찾아가는 전통음식체험’ 프로그램을 통해 ‘뚝딱고추장’을 만들기로 한 날이었다. 이 학교는 ‘전통음식문화 계승 선도학교’로 선정돼 전통장을 초청해 음식을 직접 배우고 식문화를 개선하는 활동을 하고 있다.
수업을 진행한 김찬희 우리장 연구가는 “예전에 비해 먹거리 종류는 늘어났지만 오염되고 건강을 해치는 음식도 많다. 지금은 세계적으로 슬로푸드가 유행이다. 한국의 전통음식 대부분이 슬로푸드인 ‘장’들로 양념해 만든 음식”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고추장의 역사와 전통 찹쌀고추장 만드는 방법을 설명했다.
전통 방식으로 고추장을 담그려면 찹쌀을 씻어 불리고, 엿기름을 만들고 찹쌀풀을 내서 재료를 섞고 발효시키는 등 최소 이틀이 걸린다. 이 때문에 수업에서는 쌀조청을 이용해 간단 고추장을 담가 떡꼬치용 소스를 만들고 떡꼬치와 함께 먹기로 했다. 실제 예전에 할머니들도 몸이 힘들었을 때 갱엿을 이용해 간편하게 고추장을 만들어 먹었던 것에서 착안한 것이다.
이 고추장은 시중에 파는 고추장에 비해 염도가 10%밖에 안 되고 다른 식품 첨가물이 들어가지 않았다. 아이들 몸에 좋은 식품을 만들기 위해 재료도 국내산 고춧가루를 빼고 전부 유기농을 썼다. 학생들은 메줏가루를 손으로 찍어 맛보며 “발 냄새가 난다”고 말하거나 재료를 골고루 섞다가 양념이 담긴 큰 대야에 수저를 빠뜨리기도 했다. 평소 요리를 해보지 않은 탓에 서툴렀지만 고추장을 만들고 떡을 굽는 내내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실습이 끝나고 학생들은 자신이 만든 고추장을 500㎖ 용기에 나눠 담았다. 집에 가져가 한달간 숙성시킨 뒤 가족들과 직접 요리를 해먹기 위해서다. 차현양은 “여태껏 고추장 만드는 걸 본 적이 없다. 처음으로 직접 만들어 보니 신기했다. 학교 앞에서 사먹는 떡꼬치의 고추장 소스와 맛이 완전 달랐다. 집에 가서 아빠한테 이 고추장으로 떡볶이 만들어달라고 해야겠다”고 했다.
이정현 교사는 “맞벌이 가정이나 한부모 가정이 많아 아이들이 끼니 자체를 제대로 챙겨 먹지 못한다. 지난해 중랑구청 조사 결과 비만도가 다른 학교보다 상대적으로 높아서 보건과에서 운동도 시키고 관리할 정도”라고 말했다.
“아이들이 집밥을 먹을 여건이 안 돼서 편의점이나 패스트푸드점을 자주 이용하고 돈을 모아 먹고 싶은 것을 사먹는 경우가 많다. 고추장 만들 때도 엿기름이 ‘엿을 끓여서 만든 기름’이라고 잘못 말하거나 자신들이 좋아하는 식혜에 들어간다는 사실도 모르는 친구가 많았다. 아이들을 보며 전통음식에 대해 알 수 있는 동시에 바른 먹거리를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싶었다.”
학생들은 앞으로 식습관을 개선하는 캠페인도 벌일 생각이다. 이 교사는 “전통 식문화를 알리는 광고와 포스터를 만들고 전통식문화 요리경연대회도 열 계획이다. 아이들이 직접 만들고 먹어봐야 몸에 좋은 게 어떤 건지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글·사진 최화진 <함께하는 교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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