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록]을 통해 ‘읽기’와 ‘쓰기’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펼쳐 보인 미셸 에컴 드 몽테뉴의 초상화. <한겨레> 자료사진
피와 살 튀던 종교전쟁 시대
고전 책갈피에 빼곡이 적은…
자아·세계에 대한 사유실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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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석의 고전으로 철학하기-몽테뉴의 <수상록>
몽테뉴는 비극적인 학살과 인간 사고의 혼돈으로 점철된 16세기 종교전쟁의 시대를 살았다. 몽테뉴 평전을 쓴 홋타 요시에의 말을 빌리면 부조리와 비합리성이 노출된 이른바 ‘관절이 어긋난 시대’를 살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 시대의 인간 조건을 통찰하는 방법으로 그는 ‘밖’이 아니라 ‘안’을 본다. 역설적으로 자기 자신과의 치열한 만남, 즉 ‘자아 실험’을 시도했던 것이다. 이는 우리가 ‘수상록’ 또는 ‘인생 에세이’ 등으로 번역하고 있는 몽테뉴 저서의 원제 ‘엣세(Les Essais)’를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는 이 책의 저술을 통해 사유의 실험(essai)을 했던 것이다. 그것은 또한 ‘살아간다는 것’ 자체에 대한 실험이기도 한 것이다.
이 실험의 첫발은 구체적으로 과거의 정신적 유산과의 만남이었다. 즉 고전의 독서였다. 자기 성찰과 세계 인식을 위한 몽테뉴의 사유와 명상은 책읽기에서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는 말한다. “책은 언제나 내가 가는 곳에 있으며 어디서나 나를 도와준다.” 그리고 “ 어느 시간에라도 내게서 귀찮은 동무들을 떼어 준다.” 그래서 그는 “구두쇠들이 귀한 보물을 갖고 즐기듯” 혼자서 진지하게 책을 즐겼다. 물론 책은 그것을 택할 줄 아는 사람에게는 마르지 않는 쾌락을 주지만 좋은 일로 수고가 들지 않는 것이라고는 없다. 그래서 그는 “심령이 거기서 훈련받는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꼈다.
중요한 것은 훈련받은 심령이 가만히 있지 않는다는 것이다. 몽테뉴는 사색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사색의 열매를 어떤 형태로든 기록했다. 그는 독서하면서 책의 여백 혹은 뒷면에 자신의 느낌과 생각들을 깨알같이 적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데, 이 작은 기록들의 연장선상에서 그의 대작이 탄생했기 때문이다. 독서로 훈련받은 그의 심령이 글을 쓰지 않을 수 없게 한 것이다. 그러므로 읽기와 쓰기는 그에 있어 별개의 것이 아니었다. 그는 ‘타인의 책’과 교제함으로써 ‘자기 책’의 창조자가 된 것이다. 그리고 글을 씀으로써 비로소 진정한 사유의 세계로 이행한 것이다. 그래서 “내 책이 나를 만든 것 이상으로 내가 내 책을 만들지는 않았다.”는 몽테뉴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혼란의 시기, 자아를 찾고 세계를 인식하기 위한 실험의 여정을 동반하는 좌우에 읽기와 쓰기가 있었던 것이다.
이 점이 바로 지식을 지속적으로 창출해야 하는 지식기반사회에 사는 우리에게 몽테뉴의 <수상록>이 던지는 실용적 성찰의 실마리다. 그가 20여 년 동안 수많은 가필과 수정을 거쳐 출간한 이 책은 총 3권 107장으로 되어 있는 방대한 작품이다. 이는 인생과 세계에 대한 지혜의 보물 창고라고 할 만한 것이다. 그로부터 우리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더구나 이 근대 초기에 살았던 사색자의 책에서 오늘의 독자는 타자의 포용, 다름의 가치, 다양성 존중, 문화 상대성 등 ‘탈근대적’ 덕목이라 할 수 있는 것들도 접할 수 있다. 이 고전을 다각적으로 해석하면서 다양한 철학적 사유에 이를 수 있다. 그러나 이 ‘성실한 책’의 작가가 어떻게 생각의 실험이자 삶 그 자체의 실험을 했는지, 그 과정을 살펴보는 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하고 의미 있는 일이다.
읽기와 쓰기의 관계 그 자체가 철학적 사유의 단초가 될 수 있다는 것은, 몽테뉴의 삶과 저술이 우리에게 던지는 흥미로운 주제다. 읽기가 쓰기의 의욕을 불러일으키지만, 쓰기는 읽기를 증가시킨다. 무엇보다도 글쓰기는, 몽테뉴의 경우처럼 자신의 혼란한 생각을 정리하는 것이자 사유의 세계를 구축하는 것 이상으로, 타인에게 자기를 노출하는 것이다. 글은 어떤 형태로든 ‘자기 노출의 창’이다. 그 창을 통해 -몽테뉴의 저작에서 드러나듯이- 아주 개인적인 것도 타인들의 읽기에 노출되는 것이다. 글쓰기는 노출의 고통을 수반한다. 그러므로 더욱 자아 성찰의 치열함을 겪게 한다. 바로 여기에 읽기와 쓰기의 철학적 의미가 있다. 독서는 자아 성숙의 길이지만, 글쓰기의 실험에 이를 때 타자의 존재를 온 몸으로 대면하면서 그 여정을 완성한다. 읽기와 쓰기가 자아 성숙의 길이자 곧 타자성의 통로라는 것, 그것이 <수상록>이 우리에게 던진 또 하나의 철학적 화두이다.
김용석/영산대 교수 anemoskim@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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